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265화 (265/284)

#265

광기의 왕 (4)

거인의 복부를 베고 심장까지 노리던 빛의 궤적이 거대한 손에 가로막혔다.

직후, 하인리히의 신장보다 큰 다섯 개의 손가락이 공기를 꿰뚫으며 그를 움켜쥐려 했으나.

파앗—

순간적으로 빛에 휩싸인 그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허탕을 친 거인이 이를 갈았지만 머뭇거릴 틈은 없었다.

그는 즉시 몸을 돌리며 반대편 손을 휘둘렀고.

쿠우웅—!

그것은 거칠게 쇄도해 오던 할리의 육탄공세와 맞부딪쳐 거대한 충격파를 만들었다.

“크하하핫! 어딜 보나, 친구? 나랑 놀자고!”

압도적인 질량이 기반된 에너지의 충돌에 대기가 흔들리고 지반이 뒤틀리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공격의 연쇄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내리꽂히는 정령 화살과 마법은 집요하게 거인의 얼굴을 폭격하며 예민한 감각을 교란했으며.

속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다수의 진혈 뱀파이어들은 순식간에 그 몸뚱이를 뜯어내고 이탈하길 반복했다.

“끄으, 이 귀찮은 버러지들!”

꾸구국—

그런 정신없는 연계가 이어지는 와중.

거인의 시선이 다시 다른 이들에게 돌아가려는 조짐이 보이자, 할리는 냉큼 그 거대한 팔을 전신으로 틀어쥐며 움직임을 봉쇄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몸집의 차이가 워낙 극심했기에 그로 인해 발생한 틈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잠깐의 여유는 다른 이들이 태세를 재정비하고 놈의 허점을 노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스윽—

일시적으로 거인의 신경이 흐트러진 찰나.

인식의 틈을 파고든 하인즈 2세가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거인의 팔뚝 위쪽 허공에.

스카칵—!

그의 등장과 동시에 피의 칼날이 채찍처럼 허공을 갈랐다.

또한 같은 타이밍에 지상에서 출발한 브리키의 공격이 타격 지점의 반대쪽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그것은 어느 한쪽의 공격만이었다면 깊은 상처로 끝날 수준이었지만, 종속 관계의 의념 공유를 이용한 합공은 순간적으로 더없는 시너지를 일으켰고—.

쿠웅!

마침내.

수차례나 난도질당했던, 그 버스만 한 크기의 왼쪽 팔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크아악! 이 벌레 같은 것들이!”

그에 이성을 잃은 거인이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주변 공기가 밀려나며 일대에 태풍이 휘몰아치고.

그의 감정에 반응한 듯 그곳을 중심으로 사방의 광기가 그에게 빨려들기 시작했다.

‘크흐흐— 빌어먹을, 답이 안 보이는군. 그래, 이 자리가 내 죽음이로구나.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 자신이 직접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혁명가는 그렇게 체념하는 한편 최후의 대안을 실행하기 위한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순 없지. 내 이 한 몸 바쳐 다음 세대를 위한 씨앗이 되리라.’

그렇게 뭔가를 결심한 그는.

광기로 가득 찬 거인의 몸속에서— 겨우 자신을 지탱해 주던 무언가를 스스로 끊어버렸다.

이 세상을 파멸로 이끌 온전한 ‘광기’로 거듭나기 위해.

***

어느새 거인의 뒤쪽으로 이동한 하인리히.

그는 놈이 무슨 짓을 하건 말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양손으로 단단히 틀어쥔 성검을 고요하게 치켜들었다.

우우웅—

성녀로부터 온갖 버프와 신성력을 지원받아 10미터 이상으로 날카롭게 치솟은 「축복 : 광검」.

그는 그 빛의 기둥에 「공간 베기」의 힘을 담아, 어쩐 일인지 반응이 굼뜬 놈의 발목을 그대로 썰어버렸다.

쿠우웅—!

발목이 잘려 나간 거체가 무너져 내리며 산사태와 같은 충격이 주변을 휩쓸었다.

레이드 파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각자의 방법대로 넘어진 거인의 약점인 머리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기어코 쓰러진 코끼리의 숨통을 끊으려는 하이에나들처럼.

‘이거, 재생 속도가···.’

하지만 공격을 쏟아붓던 이들은 곧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실시간으로 빨려 들어간 광기 탓에 끝도 없이 치솟은 거인의 회복량이 어느새 피해가 누적되는 속도를 넘어섰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

결국 광기가 골수까지 치민 듯, 일말의 이성조차 찾아볼 수 없는 포효가 터져 나오고.

그 몸을 짓누르던 육중한 무게의 할리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모두 멀리 튕겨져 나갔다.

“큭, 또 무슨 짓을?”

“잠깐, 저거···!”

고오오오—

그 직후, 거센 폭풍이 휘몰아치며 놈을 중심으로 거대한 붉은 소용돌이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농도의 광기 그 자체.

세상에 퍼진 모든 광기가 밀집하며 빨려 들어가는 압도적인 장관이 사방을 뒤덮었다.

“크으으— 캬악!”

“크, 크윽··· 하이 로드···!”

“정신 침식이···.”

그런 짙은 기류 속에서.

당연하지만 그것을 접한 이들에게도 점차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들 최소 극의 이상의 강자들이었지만, 이만한 농도의 광기 속에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주신이시여—! 당신의 아이들을 보호해 주소서!”

물론 성녀가 포함된 용사 파티는 서둘러 신성력의 가호를 받아 그것을 떨쳐낼 수 있었으나, 지상에 있던 뱀파이어들은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영역 밖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태생상으로도 반쯤은 마물이나 다름없던 그들은 광기의 영향을 더욱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기에.

‘그뿐만이 아니군. 이 짙은 농도의 기운이 다른 에너지를 방해하고 있어.’

견제 삼아 몇 차례의 공격을 날려봤으나, 그 모두가 주위를 감싼 거센 격류에 휩쓸려 반감되거나 아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런 약해진 공격으론 안 그래도 지금 재생력과 방어력이 극도로 치솟은 놈에겐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뿌드득—! 우득!

그렇게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작스러운 놈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어느새 폭풍의 중심에서 웅크린 채 주변의 기운을 받아들이던 거인의 몸에서 뭔가 비틀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잘려 나갔던 팔과 발이 순식간에 재생하고, 징그럽게 꿈틀거리던 근육이 증식과 압축을 거듭했으며, 그 와중에도 육체는 계속해서 점차 커지고 있었다.

[끄흐흐흐— 크키카카학!]

이젠 조금의 이성도 느껴지지 않는 비웃음이 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광기의 양을 넘어서면서 결국 전대 불사왕들처럼 자아가 먹혀버린 것처럼.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아니, 아무리 2페이즈라고 해도 그렇지.’

어지간한 이는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설령 접근하더라도 이 공간에선 공격력이 극도로 떨어져 놈의 단단한 외피를 뚫기 힘들어진다.

또 만약 그 몸에 피해를 주더라도 불사에 가까운 재생력으로 순식간에 회복해 버리니···.

‘현실에서 변신 중 무적 상태가 무슨 말이야!’

그에 「공간 베기」까지 사용해 몇 차례 광검을 휘둘러보던 하인리히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저 거인의 육체는 언데드와는 달리 신성력에도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나마 심연의 일부인 광기에 우위를 가지는 기운이었기에 위력 저하가 크지 않아 조금 기대했었는데.

거기다 곤란한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2페이즈를 맞아 실시간으로 진화하고 있는 거인도 골치였지만, 방금 다른 아바타를 통해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세상에 퍼진 광기의 흐름이 이곳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을 따라, 지금 이곳을 향해 대륙 차원의 마물 대이동이 시작될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당연히 북부 산맥과 인접한 타라크가 궤멸적인 타격을 입는 건 물론이고, 그 외의 수많은 도시도 큰 피해를 보게 될 터였다.

‘젠장. 최대한 빨리 놈을 처치해야 하는데.’

하인리히가 짧은 한숨을 토했다.

이제 더는 수단이고 뭐고 가릴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만약을 위해 계속 아껴두고 있었던 최후의 수단까지 꺼낼 수밖에···.

‘응? 잠깐, 이건···.’

하지만 그 방법을 사용하기 직전.

뭔가를 깨달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느 한 곳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오오—

그곳은 이 이상 사태의 중심이자.

쉴 새 없이 빨려 들어가는 붉은 소용돌이의 종착지였으며.

세상의 모든 광기를 집어삼키는 거인이 있는 곳···의 바로 옆이었다.

‘어? 이거 어쩌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웅크린 거체의 옆에 멀뚱히 붙은 채 덩달아 광기의 수혜를 받고 있는 할리였다.

***

“카핫! 아아— 이거 알딸딸하구만!”

얼떨결에 거인의 옆에서 같이 광기 샤워를 맞게 된 할리는 사방에서 밀려 들어오는 그 짙은 에너지에 취해 깊게 심호흡했다.

그동안 그가 빨아들였던 것이 기체와 같았다면, 지금 이것은 액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응축된 농도였다.

‘이거 굉장하군.’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광기의 폭군」을 이용해 대기 중의 광기를 체내에 축적하던 할리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는데···.

할리는 슬쩍 시선을 돌려 웅크린 백색 거인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거대한 흰 생명체는 여전히 전신 이곳저곳을 꿈틀거리며 광기를 수습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바로 옆에 그가 있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으며.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자신감인가?’

아니면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 거인의 몸에 있는 광기의 씨앗은 이전 심연에서 나오는 과정에서 대다수가 갈려 나간 파편의 일부.

그런데 그런 것들을 강제로 끌어모아 하나가 되는 과정이 그리 간단할 리 없지 않나?

푸욱— 촤악! 콰드득!

그리고 그 추측은 실컷 거인의 몸을 찢고 뜯고 때려 부수면서 확신이 되었다.

주변에 가득한 광기까지 이용해 전력으로 공격을 이어갔음에도 놈은 같은 자세로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할리도 같은 광기를 사용하니 위력 저하는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일반적인 거인들보다 훨씬 단단하면서 어떤 깊은 상처를 내든 1초도 채 되지 않아 깔끔하게 사라져 버린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놈이 재생할 틈도 없이 두개골을 부수고 약점을 꿰뚫을 극강의 공격력이 필요한데, 지금 상태로는 그의 아바타들과 힘을 합치더라도 힘들어 보였다.

···아니, 힘들었을 터였다.

일반적인 환경에서라면.

‘하지만 여기에서라면 다르지.’

할리는 주변에 가득한 에너지를 바라보며 사납게 이빨을 드러냈다.

그리곤 지체할 것도 없이, 곧바로 「광기의 폭군」으로 주변 광기를 되는대로 끌어들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오랜만에 다른 아바타들의 리소스까지 총동원해 아예 주변의 흐름 일부를 자신에게로 비틀었다.

고오오오—

이내 주변을 감싼 소용돌이의 핵이 일시적으로 두 개가 되었다.

전 대륙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광기를 끌어모으는 거인과 달리, 그는 도착 지점의 일부를 손보는 데만 전력을 다하면 되었기에 훨씬 효율적으로 힘을 운용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마치 반발하듯 거인의 몸이 몇 번 꿀렁거렸으나, 당연히 할리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뿌드득— 빠득!

막대한 에너지의 집중에 그의 몸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가 순식간에 회복했다.

사실 육체의 질만 따지자면 그의 「궁극의 진화 생명체」가 백색 거인보다 딸릴 이유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 이제 대등한 입장이구나.’

몸속 가득 충만한 에너지를 느끼며 할리가 가볍게 목을 비틀었다.

이어서 다음 단계.

그는 풍족한 에너지를 한꺼번에 태우며 「투왕의 각인」에 쏟아부어 모든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거기에 이어, 광기가 뒤섞인 「생체 오러」를 자신의 신체 일부에 한계 이상으로 집중했다.

바로.

상어처럼 돋아난 이빨에.

빠직—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밀집되자 한껏 강화된 몸이었음에도 이빨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깨져나갔지만.

그 손상은 이어진 재생력에 조금씩 수복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계속되는 파괴와 재생.

또 그 과정이 이어질수록 「궁극의 진화 생명체」는 부서졌던 이빨의 강도를 점차 진화시켜 나갔다.

기어코 집중된 에너지를 버틸 수 있을 수준까지.

‘좋아,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할리가 가진 최강의 공격력.

그것은 바로 「폭식」에서 비롯된 치악력이었다.

그 덕분에 일전엔 드래곤의 비늘조차 과자처럼 씹어먹을 수 있지 않았던가?

물론 단순히 그것만으론 거인의 두개골을 뚫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달랐다.

카득— 카득—!

턱을 움직여 이빨을 몇 차례 맞부딪친 할리.

단지 그것뿐인데도 공간의 일부가 찢겨나가며 허공에 가느다란 실금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냥 직전의 맹수처럼 어슬렁어슬렁 걸어, 잘 차려진 밥상처럼 얌전히 웅크리고 있는 거인의 머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에 맞춰 폭풍을 헤치고 다가온 하인리히와 하인즈 2세도 준비를 마치고 자세를 잡았다.

“크하하핫! 자— 착하지, 친구? 얌전히 있으라고.”

거인이 미묘하게 꿈틀거리는 것 같았지만 아마 기분 탓일 것이다.

변형을 거쳐 극도로 발달한 할리의 턱이 크게 찢어지며, 어마어마하게 밀집된 광기와 「생체 오러」가 깃든 검붉은 이빨이 날카롭게 빛났다.

“금방 끝나니까!”

번뜩이는 빛의 검과 핏빛 송곳이 두개골의 한 지점에 틀어박히고.

이어서 예리한 이빨이 그대로 그곳을 파고들었다.

콰드드득—!

그것은 고작 몇 차례 만에 단단한 방어력을 꿰뚫고 들어가.

마침내 그 안에 숨어있던 광기의 씨앗까지 닿았다.

그리고—

‘잘 먹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내가 ‘광기의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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