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디펜스 게임 (1)
이온 대륙 북서부에 위치한 이름 없는 작은 섬.
“요란하게도 움직이는군.”
절벽의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선 한 30대 사내가 바닷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칙칙한 금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곤에 찌든 금안으로 하염없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감정이 짙게 담긴 깊은 눈빛으로.
‘최근엔 좀 잠잠한가 싶었건만.’
사내의 눈길이 향한 방면에 있는 대륙.
한동안 정신없이 몰아치던 광기의 소용돌이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이번엔 그보다 더한 죽음의 기운이 번져들고 있었다.
기운의 발원지는 이 섬과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그에게 그런 거리의 제약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가 바로 한때 세계의 수호자라고까지 불렸던 최강의 종족이자—.
그중에서도 긍지 높은 골드 일족의 엘더 드래곤, 슈리하트겐이었으니까.
“불사왕···.”
종족의 원수인 그 끔찍한 심연의 괴물을 떠올린 그가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일족의 번영과 쇠퇴, 그리고 멸망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삶 그 자체였던 그에게 불사왕의 존재는 역린과도 같았으니.
하지만 슈리하트겐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집어삼키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는 성질난다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전에는 일족의 명맥이 자신의 대에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면.
지금은 일족의 마지막 후예를 지키고 가능한 많은 것을 전수하기 위해서.
‘어차피 지금의 내가 간다고 큰 도움이 될 리도 없고.’
지그시 눈을 감은 그는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변함없이 막대한 기운이 담긴 드래곤 하트.
하지만 대전쟁의 후유증으로 생긴 어긋난 흐름은 그것을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으로 만들었다.
평소라면 그가 가진 압도적인 마력 지배력을 이용해 억지로 눌러놓을 수 있었으나, 격렬한 전투가 발생했을 때도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고, 전투도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퇴물이지.’
그런 상황이었기에.
그렇게 허망하고 비참한 최후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더욱 기꺼운 것이었다.
용신께서 일족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후예를 보내주셨다는 것이.
그리고 그의 성장에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슈리하트겐이 절벽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온갖 결계로 감싸인 섬 안에서도 유독 빽빽하게 마법진이 설치된 곳에 그가 있었다.
그에게 찾아온 깜짝 선물과도 같은 존재.
골드 일족의 해츨링 호루스가.
우우웅—
마법진 내부, 수련장 일대의 기운이 공명한다.
이내 압도적인 친화력에 이끌린 다양한 기운들이 빛무리의 형태로 현현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불, 물, 바람, 대지 등의 속성력을 비롯해 다른 방식으로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마나까지 몰려들며 그 중심에 있는 이를 감싸고 휘몰아쳤다.
“응약!”
진지하게 눈을 감은 채, 혀 짧은 기묘한 기합을 내지르는 대여섯 살짜리 꼬마에게로.
“···대단하군.”
그리고 절벽 위에서 호루스의 수련 장면을 바라보던 슈리하트겐은 이미 몇 번이나 내뱉었던 감탄을 재차 토해냈다.
용언을 비롯한 언령의 기본은 세상에 자신의 의지를 투영해 현상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주변 기운을 통제할 수 있는 지배력과 의지를 표출할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신비였는데···.
‘선천적인 재능인가? 상정했던 것보다 성장 속도가 훨씬 빠르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비정상적일 정도야.’
호루스는 고작 유아기인 해츨링(Hatchling)의 몸으로 이미 그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니, 그 수준만 따지자면 벌써 한참 전에 아동기의 차일드(Child)급을 넘어섰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제대로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 정도라니···.’
수천 년을 살아온 노룡인 슈리하트겐조차 이해할 수 없는 성장 속도였다.
이대로 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청소년기인 쥬브나일(Juvenile)의 수준까지 다다를지도.
“아아— 감사합니다, 드라카리온이시여.”
역시 이건 용신의 가호가 함께한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멸종해 가는 드래곤의 처지를 안타까이 여기신 그분께서 친히 일족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위대한 재능을 내려주신 것일 터.
‘저 아이가 짊어진 짐을 덜어줄 수 있도록, 내 죽기 전까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리라.’
그렇게 재차 다짐한 직후, 다시 대륙이 있는 방향을 일별한 그는 절벽에서 훌쩍 뛰어내려 수련장 쪽으로 다가갔다.
어쩐지 조금 전부터 수련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호루스에게 조언이라도 해 주기 위해서.
‘아직 어리니 그럴 수도 있지. 물론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 이 수련은 정신을 한데 모으는 게 중요하니까.’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지금 호루스가 미묘하게 딴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진 원인이.
그가 조금 전까지 신경 쓰던··· 바다 너머에서 발생한 사건에 있다는 것을.
***
한창 영웅들과 거인의 싸움이 진행되었을 때.
심연의 경계에서 소환을 해제한 직후, 곧바로 불사성으로 귀환했던 한스는 계속해서 기회를 노리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는다면 곧바로 개입해서 놈을 족치기 위해서.
그의 존재가 바로 하인리히가 떠올렸던, 만일을 대비한 ‘최후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겠지.’
그런 의미에서 그가 개입하기 전에 혁명가를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썩 만족스러운 전개였다.
덕분에 또 한 차례 상당한 악명을 떨쳤을뿐더러, 이렇게 다음 시나리오를 위한 밑밥까지 깔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인정하마. 빛의 기사, 하인리히. 넌 그동안 굉장히 잘해 주었다. 이 몸의 예상을 아득히 웃돌 정도로.]
심연의 경계로 떠나면서 미리 준비시킨 덕분에, 이미 한참 전부터 만전의 상태였던 불사의 군대를 뒤에 거느린 채.
그들을 이끄는 왕이 오만하게 선언했다.
[설마 그 ‘예언’이 이렇게까지 거슬릴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내게 주신의 뜻이 함께하는 한, 네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을 거다. 불사왕.”
[크크큭— 대단한 자신감이로구나. 그래, 그래서 준비했다.]
싸늘한 긴장감이 장내를 뒤덮는 가운데.
지옥에서 새어 나온 듯한, 소름이 절로 돋는 웃음을 흘린 그가 천천히 한 손을 옆으로 뻗었다.
[보너스 스테이지를.]
그리고는.
따아악—
흑마력이 가득 담긴 손가락을 튕기자.
그 울림을 타고 사방으로 기묘한 파동이 퍼져 나갔다.
파지직— 빠직!
그 여파로 그가 등장했던 공간의 균열이 깨져 나가며 크기를 더욱 부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케헤에엑!]
달그락— 달칵!
[끄워억—]
척— 척— 척—
그리고 그 안에서, 가지런히 정렬한 불사의 군대가 발을 맞춰 쏟아져 나왔다.
수십, 수백, 수천, 일만···.
그것은 만 단위에 도달하면서부터 증가세가 서서히 줄어들었으나.
크기도, 형태도, 성질도 제각각인 언데드들이 하나같이 짙은 죽음의 기운을 두른 채, 흑마력을 풀풀 풍기며 진열을 갖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어마어마한 압박감과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대부분의 공격을 방어하는 걸 넘어 오히려 침공하는 족족 궤멸시키기 일쑤. 거기다 그 예언을 적극 활용하며 각 나라의 군대를 움직여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대비하게까지 만드니.]
그렇게 불사의 군대가 대열을 갖춰 진군하는 와중에도 한스의 말은 태연하게 이어졌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금방 지루해지지 뭔가? 이쯤에서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애초에 내기를 받아주었던 것도 더한 재미를 위해서였는데 말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아아, 별거 아니다. 단지···.]
그 중심에서 서로를 노려보며 대화를 나누는 불사왕과 용사.
앞으로 나선 하인리히가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그의 뒤에 모인 이들은 서둘러 전투를 준비하며 이어질 싸움에 대비하고 있었다.
진형을 갖추고, 주문을 읊으며, 무기를 강하게 그러쥐었다.
[조금, 난이도를 올리려는 것뿐이니.]
점차 고조되는 분위기 속, 불사왕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간부 중 일부가 군세를 이끌고 서서히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두두두두—
그들에게 설정된 우선 목표인.
타라크 성을 향해서.
“뭣?! 놈들이 성으로 향한다!”
“그쪽 성벽은 이제 한계예요!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돌격! 놈들의 예봉을 꺾는다!”
그 위압적인 언데드의 물결에 당황한 이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불사왕을 앞에 둔 용사 파티는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다른 이들을 믿고 맡길 수밖에.
[크크큭, 물론 처음 했던 약속대로 로한 공국 방면을 통한 전면전은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지.]
“하!”
공격지 선정 또한 이전처럼 무작위.
그저 침공의 방식이 조금 바뀔 뿐이었다.
전 대륙에 걸친 산발적인 습격에서, 한 지점에 집중한 대대적인 웨이브 형식으로.
[아, 추가로. 시간이 지날수록 침공 규모는 계속해서 커질 것이다.]
그러니 더 막을 수 없게 되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을 거라고.
허공에 떠오른 불사왕이 용사 파티를 내려다보며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오늘은 기념비적인 첫날이기도 하니. 가볍게 인사나 하고 끝내도록 할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간적으로 증폭되는 어마어마한 흑마력.
그리고 이어서.
콰아앙—!
거인과의 격전지였던 곳에서 재차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시나리오의 페이스를 끌어올리기 위한 막바지 디펜스 게임이 시작되었다.
***
푸쉬익—! 콰카가각!
증기가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금속에 땅이 갈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으윽!”
“이런, 괜찮나?”
한동안 길게 이어지던 소음이 서서히 멎자, 이내 젊은 남녀의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예, 예에··· 괜찮아요. 상회주님.”
“흐음, 별로 괜찮은 것 같지 않군. 역시 아직 충격 흡수 장치가 미흡한가. 이쪽을 좀 더 보강할 필요가 있겠어.”
거인을 피해 타라크에서 도망쳤던 휴버트와 디아나.
그들은 특제 슈트의 힘을 빌려 빠르게 남하하다가 기체에 이상이 생겨 막 지상의 한 언덕에 불시착한 참이었다.
놈의 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너무 무리해서 운용한 탓인지 기어코 슈트가 퍼져 버렸던 것이다.
“으으··· 그보다 저, 토할 것 같아요···.”
“저쪽에서 하면 될 것 같군. 등을 두들겨 주는 게 좋겠나?”
“아, 아뇨··· 그냥, 제가 알아서 할 게요우웁!”
하던 말도 마치지 못한 디아나가 근처의 수풀로 허겁지겁 달려간 직후.
그 너머에서 아름답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가볍게 주변을 경계하던 휴버트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이런 비행은 난생처음이었을 테니까.’
거기다 디아나는 특별한 후각을 가졌을 뿐, 신체적으로는 그냥 평범한 소녀이지 않은가.
보호 마도구로 고속 비행의 충격을 어느 정도 상쇄했다고는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버텨준 것만 해도 대견한 일이지.’
만약 한창 날아가던 도중, 그의 품 안에 안긴 채 실례라도 했다면···.
‘으음, 정말 다행이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자신의 몸을 두른 슈트의 금속 파츠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급히 착지하면서 바닥에 두 줄의 깊은 고랑이 생긴 것과는 달리, 금속 부츠의 바닥 면에는 작은 손상도 없었다.
하지만 멀쩡한 것은 외형뿐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인가. 이건 재활용도 못 하겠군.”
휴버트는 자신의 「분석」에 비친 결과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기체의 잠재력을 한계까지 끌어낸 탓인지 하워드가 「장인의 혼」까지 사용해 내부에 심은 신비는 물론, 재료가 가진 고유 특성마저 완전히 고갈되어 있었으니까.
그 귀한 희귀 금속들이 몽땅 잡철이 되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성능은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다음 건 좀 더 신경 써 볼까.’
내심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가 이젠 고철이 된 슈트를 벗어 아공간에 정리하고 있자, 수풀 너머로 사라졌던 디아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뒤집어진 위장과 한바탕 악전고투를 치렀는지 한층 해쓱해진 얼굴로.
“···실례했습니다, 상회주님.”
“몸은 좀 괜찮나?”
“네, 이제 좀 나아졌어요···.”
전혀 괜찮지 않은 표정이었기에 휴버트는 굳이 말을 잇는 대신 조용히 포션을 건넸다.
고작 멀미에 쓰기엔 과하다 볼 수 있었지만 이정도야 그에겐 푼돈에 불과했다.
그에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결국 조용히 감사를 표하며 그것을 받고 그대로 들이켰다.
지금 상황에서 기력이 빠진 채로 있어봤자 짐 덩어리가 될 뿐이었으니.
“저희, 이제 어떻게 하죠?”
“으음.”
이후 안색이 조금 회복된 디아나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보이는 것이라곤 나무와 언덕뿐.
하늘을 날아 직선으로 이동했기에 마차가 다니는 길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근처의 도시로 이동하지. 음, 이 근방이면 리오나르 시가 있겠군.”
“와··· 벌써 거기까지 내려왔나요? 으으, 역시 그 속도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요오···.”
처음엔 만약을 대비해 최대한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너무 과했던 것 같기도 했다.
적당히 멈춰서 인근 도시에서 대기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그것도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지만. 어디 보자, 그럼 이쪽 방향으로···.’
그렇게 난데없는 하이킹을 즐기게 된 휴버트와 디아나.
그 시각.
그들이 떠나왔던 타라크 인근은 실시간으로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