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재전(再戰) (1)
온갖 화려한 장식이 가득 찬 사무실.
“결국 추적은 실패인가?”
평소처럼 모니터를 보며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사내, 율령자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탄식을 토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기계 의안은 계속해서 ‘대형 병원 테러와 백색 갑옷의 성기사’에 대해 정리된 자료를 뇌리로 스캔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한국. 그것도 신성력이라···.’
-어느 세상의 신성력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음.
-따라서 그의 출신은 아직 밝혀지지 않거나, 극히 최근에 발견된 차원으로 추정됨.
그 마지막 내용까지 다시 한번 확인한 율령자가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주무르며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이번 사건은 한국 내에서 상당한 화제가 되고 있는 만큼, 당연히 번천회도 진행 상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새롭게 등장한 강자의 동향, 그것도 신성력이라는 특별한 힘을 사용하는 이는 그만큼 큰 변수가 될 소지가 다분했으니.
“하회탈과 하인즈라는 뱀파이어로도 모자라서, 거기다 이젠 교황급 성기사까지? 허! 이거 어이가 없군.”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는 율령자.
물론 강한 힘을 지닌 귀환자가 등장하는 건 세계적으로 보면 종종 있는 일이긴 했으나 문제는 그 기간과 장소에 있었다.
‘하회탈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지 고작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사이에 네임드급이 같은 지역에서 셋이나 연달아 튀어나왔다고?’
이쯤 되면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보다는 그 작은 반도에 뭔가 있다고 가정하는 게 합리적이겠지.
‘또 이번에도 그 행적을 추적하는 데 실패했고.’
더군다나 그 행동 패턴도 앞선 다른 놈들과 상당히 흡사했다.
아무리 번천회 한국 지부가 현장에서 물러나 숨죽이고 있는 상황이라지만, 그 정보력만큼은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는데···.
‘설마 오라클이 한국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했던 게 이것 때문인가.’
쯧, 혀를 찬 율령자가 옆쪽에 놓인 마도구를 조작해 지부장에게만 허락된 연락망을 가동했다.
그 성기사의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았으니, 될 수 있으면 미리 손을 써 둘 필요가 있었다.
‘판테온 한국 지부가 그자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고 했지.’
조직의 특성상 결속력이 약한 판테온은 기본적으로 강한 신성력을 가진 이를 우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모시는 신이 다른 그들 사이의 우열은 오직 유일한 공통점인 ‘신앙’에 근거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런 상황에서 어쩌면 세계 최고 수준일지도 모를 성직자가 갑자기 한국에 등장한 것이다.
‘그래, 일단 한편으로 끌어들이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긴 하겠지. 얼굴마담이든 실질적인 영향력 확대든.’
그리고 그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한 인재라면 어떻게든 목줄을 채우고 써먹는 게 베스트일 터.
자신의 관할에서 일어난 일에 다른 곳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긴 했으나, 이미 몇 차례의 실패를 경험한 그는 개인의 위신보다는 실리를 택하기로 했다.
“판을 좀 더 키워볼까.”
그는 가동한 마도구를 통해 메시지를 전송했다.
발신, 번천회 동아시아 지부장 율령자(律令者).
수신, 번천회 북아메리카 지부장 서기관(Scribe).
그의 연락을 받은 이가 머무는 장소는.
이세계 종교 연합 판테온의 총본부가 있는 곳이었다.
***
‘생각 이상으로 과열됐는데. 언제 한번 확실하게 알리바이를 만들 필요가 있겠군.’
외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슬쩍 흘러가는 여론을 살피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자신이 현장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 강박증 있는 누군가가 전수조사라도 하려 들면 귀찮아질지 모를 일이었지만···.
‘그런 건 나한테 아무 의미 없지. 설령 24시간 감시당한다 해도 새 능력을 이용하면 가뿐하게 무시할 수 있을 테니.’
휴고를 강환계로 보내기 전 연달아 했던 고유스킬 강화.
130만짜리로 생긴 능력은 훗날이 기대되는 「개체 투영」의 추가 효과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140만 포인트를 들인 강화로 습득한 것이 바로—.
아바타를 원격에서 소환할 수 있는 기능이었다.
그동안 본체의 주변에서만 가능했던 분신의 호출이 이제는 무려 반경 30킬로미터라는 넓은 영역에서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정밀한 소환을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그 장소를 인지해야 한다는 제약은 있었으나, 단순히 그것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 순식간에 분신을 파견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메리트였다.
서울의 외곽 지역에 거주하는 지금, 사실상 서울시 전역은 물론 인천과 수원 일대까지 사정거리에 두게 된 셈이었으니.
‘여기서 더 성장하면 한국을 넘어 세계 어디로든 순식간에 아바타를 보낼 수 있게 될지도. 개체수가 늘어나지 않은 건 아쉽지만 사실 지금도 충분한 상황이니 이것도 나쁘지 않아.’
내 아바타들은 지금도 각자의 위치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타라크에 뭉쳤던 이들은 다시 저들의 위치로 돌아갔고, 남쪽으로 피신했던 휴버트는 디아나와 함께 다시 상회로 복귀했으며, 하워드는 실전 사용기를 바탕으로 슈트의 신제품 제작에 들어갔다.
‘그래도 이계전송진의 쿨타임이 5일로 줄어서 편하네. 벌써 이틀··· 아니, 고작 하루 반 정도 남은 상황이니.’
물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없으면 없는 대로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역시 보험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마음가짐에는 차이가 있었다.
괜히 사건의 수습에 골머리 앓는 것보단 뭐든 확실한 게 좋지 않겠는가?
‘어차피 혁명가를 처리한 이상 이제 아우테리카에선 딱히 위험할 일이 없겠지만 말이지.’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오늘의 루틴인 상체를 조지기 위해 헬스장으로 향했다.
***
타라크에서 용사 파티와 불사왕간의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진 직후.
그 사건이 가진 중요성만큼, 관련 소식은 발 빠르게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세계 최강대국인 아제리온 제국의 황실로 전해진 전언은 당연하게도 후계자인 라일리에게까지 흘러 들어갔고.
그것을 접한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래서 당분간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그 정보를 헤스페론과 공유했다.
“그렇지 않아도 교황 성하의 조문이 시작되면 한 번 가야 했는데, 아무래도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그렇게 모일 기회가 흔하진 않잖아요?”
절차에 따라 한동안 대신전을 폐쇄하고 교인들끼리 치르던 교황의 장례.
때마침 외부인들에게 개방하여 조문받는 시기가 되었을 때 이번 일이 터져버렸다.
“그래서 이왕 그렇게 모인 김에 대책 회의까지 같이 진행할 것 같아요. 으음, 약식이지만 3차 정상 회의라고 봐도 되려나···.”
“그런 자리라면 꼭 가야지. 이제 명실상부 제국의 대표인 황태녀님이신데 말이야.”
“···그, 그렇죠.”
그 당연한 일정에 라일리가 저렇게 시무룩해진 이유는 이번 성지행에 헤스페론을 대동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하루에 한 번은 꼭 함께하는 자리를 가졌던 만큼, 갑작스럽게 장기간 떨어질 상황이 오니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던 것이다.
“역시 어떻게든 해서 같이 갈 수 있도록···.”
“응? 에이, 괜히 무리할 필요 없어. 한창 중요한 시기인데 괜히 구설수를 던져줄 순 없잖아? 거기 가면 스승님도 있을 테고.”
“으, 그건 그렇지만.”
이번 성지행의 목표는 교황의 장례와 대책 회의의 참가.
그녀는 대표자로서 사절단을 이끌어야 할 책무가 있었고, 그런 중요한 자리에 아무런 직책도 작위도 없는··· 황궁 사람들이 쉬쉬하는 소위 ‘애인’을 데리고 갈 순 없었다.
실제 그들의 사이가 어떻든 간에, 세간 사람들이 보기에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2차 정상 회의 때처럼 헤스페론이 용사 파티에 껴서 로셀리아 대신전에 갔을 때와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이세아의 제자라는 타이틀이 있으니 억지를 부리면 가능하기야 할 테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흠결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대마법사의 제자든 황녀의 은인이든 그게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절단에 포함될 당위성은 되지 못했으니.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그는 라일리를 달래기 위해 적당한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는 날 배웅해 줄게. 올 때도 마중 나가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잠깐 동행하는 것 정도야 별문제 없겠지.”
“···으음, 그런 문제가···. 아니, 아니에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저야 고맙죠.”
그에 애매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정식으로 책봉되기 전이었으나 황태녀 자리가 내정되며 기본 경비 자체가 전보다 훨씬 삼엄해졌다.
이번 사절단에도 헤스페론보다 강자인 마스터급 기사와 대마법사가 함께할 예정이었지만, 그는 이미 몇 차례나 그녀를 위기로부터 구한 전력이 있는 만큼 정신적인 안정을 취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
지구에서 병원 테러와 하인리히의 화려한 데뷔가 끝난 직후.
라일리가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
제국의 수도 외곽에 위치한 제론 대신전.
“그럼 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황녀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음.”
그곳의 입구까지 따라온 헤스페론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라일리를 배웅했다.
그에 사절단의 대표인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담담하게 수십 명의 일행을 이끌고 대신전 안으로 발을 옮겼다.
그 거침없는 모습에선 과연 차기 황제다운 카리스마가 물씬 풍겨 나왔지만, 불과 어제 단둘이 있을 때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거리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는 그에겐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제국 사절단이 모두 안으로 사라지고.
“읏차— 이거 혼자는 오랜만인데. 아니, 그냥 처음 아닌가?”
헤스페론은 기지개를 켜며 대신전 입구에서 발길을 돌렸다.
‘불사성으로 진입하자마자 라일리와 함께했고, 그 후엔 용사 파티에 있었다가···. 다시 라일리랑 같이 황궁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파견된 개체이긴 했으나,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뭔가 미묘한 기분이었다.
하물며 최근엔 그저 황궁에서 라일리와 수다 떨거나 개인 수련하는 것 말고는 한 게 없지 않던가?
‘물론 카르마를 수확하는 것과 경지를 올리는 게 궁극적인 목표긴 한데.’
이곳은 아제리온 제국의 수도 제론.
명실상부 아우테리카를 대표하는 대륙 최대의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거라곤···.
‘어디 보자. 황궁 안에만 있던 거 빼고, 단순히 이동만 한 것도 빼면.’
극악무도한 불사왕이 쳐들어와서 모조리 때려 부순 것과.
2차 정상 회의에서 돌아오던 길에 라일리를 지킨다고 이리저리 구른 기억밖에 없었다.
‘거참, 삭막하게도 살았네.’
관광 정도는 해 볼 법도 한데.
물론 이제 와서 정말 도시를 구경하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이세계 경력은 고작 3년 차라지만 그가 겪은 시간의 밀도는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생경한 번화가를 보며 감탄할 시기는 이미 한참 지나버린 것이다.
“흠, 이만 돌아갈까. 해야 할 것도 있으니.”
오른쪽 눈을 덮은 안대를 만지작거리던 헤스페론이 어깨를 으쓱이곤 자신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던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앞으로 할 일들을 정리했다.
그간 성장의 비약을 꾸준히 복용하며 수련한 덕에 새로 얻은 능력들에도 제법 익숙해진 참이었다.
이젠 팔에 깃든 「갈망의 오른팔」을 중심으로 다른 능력들과 마도구의 도움까지 더하면 극의급에도 어찌 비빌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뭐, 당연히 진짜로 싸우면 지겠지만.’
저주를 이용하면 공격력은 충분할 것 같은데, 그에 비해서 방어력이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최근 그가 시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황실 소환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그 취약한 방어력을 보완해 줄 소환수를 찾는 것이었다.
그의 몸에 깃든 강대한 저주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을, 그런 부정적인 기운에 친숙한 놈으로.
‘돌고 돌아 다시 소환수네. 일단 추가로 생각해 둔 방법도 있긴 한데···. 그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고.’
그렇게 앞날을 설계하며 진로를 고민하던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닫혀있는 마차의 창문에 손을 뻗었다.
굳이 관광까지 할 생각은 없어도 바깥 풍경 정도는 구경할 심산이었는데···.
덜컹—
창문이 열리지 않았다.
“음?”
덜컹— 덜컹—
혹시 어디가 걸린 건가 싶어 몇 차례 더 시도해 봤지만 마찬가지.
「괴력」이 깃든 그의 근력을 막는다는 건 단순한 물리력이 아닌 마법 등의 신비까지 동원됐다는 뜻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순간적으로 사고가 싸늘하게 식으며 감각이 곤두섰다.
두두두두—!
그리고 그때를 맞춰, 적당한 속도로 달리던 마차가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고급 마차의 충격 흡수 장치로도 제대로 해소되지 않은 흔들림에 내부가 지진이라도 난 듯 거칠게 흔들렸다.
이제 더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파라라락—!
그는 곧장 자신의 오른팔을 감싸고 있던 붕대의 봉인을 해제했고—.
콰아앙—!
곧바로 마차의 옆면을 부수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고는 오른손에서 뿜어진 무수한 검은 실을 이용해 충격을 최소화하며 무사히 바닥에 착지했다.
안쪽을 가두던 마법진을 한 방에 찢어버릴 정도의 무시무시한 파괴력과 예술적인 컨트롤이 연계된 멋들어진 활약이었지만, 정작 그것을 행한 그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제법이구나. 도구를 이용한 잔재주가 전부는 아니었나 보지?”
어느새 주변 빈민가를 둘러싼 일단의 복면 무리들.
하지만 유일하게 복면을 쓰지 않고 그에게 말을 건 이는 아무리 봐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 또냐···. 이젠 트라우마 걸릴 것 같네···.’
역시 자신은 이 도시와 영 맞지 않는 것 같다.
헤스페론은 그 익숙한 얼굴.
자신이 눈을 잃고 팔에 저주가 깃든 계기인, 황녀 시해 미수범 스타브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