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276화 (276/284)

#276

하회탈 리턴즈 (1)

심연의 깊은 곳.

그 존재는 갑자기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생명체를 유심히 관찰했다.

아무리 그것에게 시간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하다고 해도 무료함이라는 감정마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등장한 이레귤러에 흥미가 가는 건 당연한 일.

“설마, 신인가? 이런 곳에 처박혀 있는 신이라니. 흐음, 그렇다면···.”

일단 이 공간 속에서 자기 형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합격이다.

육신은 물론 존재가 지닌 격 또한 더할 나위 없었고.

그것은 조금씩 치솟는 호기심에 살짝 장난을 쳐 보았다.

꾸우웅—

꿀렁거리는 혼돈의 파도가 사방을 휩쓸었다.

그럼에도 그 생명체, 번천회주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주변 공간 자체를 뒤틀어 버린 듯 그저 자연스럽게 흘려버릴 뿐.

“···여긴 그런 세상인가? 귀찮게 됐군. 그냥 방임형이 편한데 말이지.”

그 와중에도 번천회주는 태연하게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뭐라 하건 관심이 없는 것은 이곳을 지배하는 존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필멸자의 인격과 자아 따위에 신경 쓰지 않은 지도 상당히 오래되었으니까.

그래서 이어지는 다음 행위에도 망설임 따위는 전혀 없었다.

-아아— 나의 주! 나의 신이시여—

자신의 소유물이자 노예, 그리고 장난감.

복제해서 저장해 두었던 혼 하나를 꺼내 상대의 몸속에 밀어 넣었다.

잘 돼서 저 육체 단말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얼마 전에 실패했던 일을 다시 시도하는 게 좀 더 빨라지지 않겠는가?

‘하여간 신이라는 놈들이 독선적인 건 어느 세상이나 마찬가지군.’

그에 눈을 가늘게 뜬 번천회주는.

“쯧, 쓸데없는 수작을.”

-끄아악—!

제 몸속에 들어온 이물질을 그대로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한쪽의 길이만 3미터가 넘는 한 쌍의 거대한 날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아앗—

그 즉시 사방을 뒤덮은 혼돈과 심연을 밀어내며 퍼지는 노을빛 광채.

이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신성력이었다.

꿈틀—

그에 불쾌한 듯 주변 공간이 꿈틀거렸다.

찢긴 노예의 혼이야 어차피 아직도 복제품이 많이 남아있었으니 큰 문제도 아니었다.

그것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저 거슬리는 기운이었다.

감히 자신의 영역에서 신성력이라니?

하지만 그렇게 분노함과 동시에 한편으론 호기심을 느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신성력.

저것은 이곳 아우테리카가 아닌 외신(外神)의 기운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저 생명체는 그걸 누군가에게서 빌려오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 품고 있다가 뿜어내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상대는 신성을 지닌 존재라는 뜻이었으니.

그래도 자신과 마주할 최소한의 자격은 갖췄다는 소리였다.

-끄아— 아아··· 신이시여···.

그 와중에도 복제된 영혼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부르짖다 부스러져 사라졌지만, 그것은 이미 그쪽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신이라··· 보아하니 그쪽은 그 자리에서 내쫓긴 처지인 것 같은데.”

꿀렁—

역린을 건드린 모양인지 공간이 요동치며 격렬하게 반응했다.

아무리 영락했다 해도 신은 신.

고작 감정을 표출하는 것만으로도 그 위압감에 공간이 뒤틀렸다.

하지만 그런 격랑 속에서도 번천회주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흥분하기 전에 잠깐 대화라도 하는 건 어떤가? 그렇게 나와 봐야 나는 그냥 이대로 돌아가 버리면 그만인데.”

그리고는 기묘한 빛이 서린 눈으로 이 깊은 곳에 가라앉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신이라는 족속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이곳에 처박혀 있는 저 존재는··· 과거라면 모를까 지금은 제대로 된 신이라 할 수 없었다.

이미 신좌에서 쫓겨나 봉인된 지 오래된 것 같기도 했고.

또한 그 뜻은 곧—.

‘놈도 아쉬운 게 있다는 소리지. 이거 이용해 먹을 수 있겠어.’

그렇게 한다면 이곳에서 일을 마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건 분명했다.

물론 진입한 장소가 하필이면 이 차원의 감옥이자 쓰레기통과 같은 곳이라는 게 문제긴 했지만.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오래 걸릴 것 같군. 그런데···.’

가만히 주변을 살피던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사방을 휩쓰는 무질서한 에너지의 격류 속에 깃든 기운이 미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흐음. 기분 탓인가.’

하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애초에 세계의 찌꺼기라는 게 어디나 다 비슷비슷하기도 했고, 당장은 그런 거에 신경 쏟을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사방을 뒤덮는 심연 속에서.

두 세계의 흑막이 조우했다.

***

빠른 속도로 회원을 늘려가던 인터넷 사이트, 새벽의 서낭당.

개설 초기부터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던 그 사이트도 요즘엔 성장세가 한풀 꺾이는 추세였다.

가입할 만한 이들은 이미 전부 가입했다는 것도 한몫했지만, 그들의 중심이 되었던 이의 오랜 잠적도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뭐, 팬 사이트니까 어쩔 수 없지.’

모두 ‘하회탈’이라는 다크 히어로의 활약에 감명받아 한데 뭉친 이들인데, 정작 그 당사자가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췄으니 오죽할까.

덕분에 꾸준히 그의 복귀를 기원하던 이들의 사이에서도 서서히 동요가 번져가고 있었다.

<일본에서 하회탈 죽었다는 얘기 나오는데?>

-(링크) 인증이라고 피 묻은 부서진 하회탈 가면이랑 로브 같은 것도 올라옴. 이거 진짜임?

-ㄴㄴㄴ주작주작주작

-하회탈 잠수탄 지 얼마나 됐냐? 일주일은 넘은 것 같은데. 이 주 정도 되지 않았음? 설마 진짜로...

-아니, 한 달도 아니고. 그거 잠깐 쉬는 거 가지고 지랄들 하네;;

└솔직히 일본 다 정리하고 잠수 탔으면 좀 쉬려나 보다 할 텐데, 다 끝내지도 않고 도중에 멈췄다는 거에서 킹리적 갓심이 들지 않냐?

└ㅜㅜ 심지어 한국에서도 목격 정보 없음. 죽진 않았어도 진짜 어디 다친 거 아님?

└아 살아있으면 생존 신고라도 하라고ㅋㅋㅋ 쉬는 건 봐 줄 테니까 제바류ㅠㅠ

용서 없는 범죄자의 심판과 그로 인해 향상된 국내 치안, 거기에 더불어 해외에서까지 활약하며 매스컴을 탄 덕분인지 그를 응원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더 많았다.

굳이 그 팬 사이트뿐만 아니라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그를 추종하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최근 슬슬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하인즈 2세, ‘팬텀’과 연관 짓는 이들도 늘기 시작했다.

물론 단순히 둘의 관계성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카피캣 빠는 놈들 짜증 나네>

-지금 한국이 이렇게 평화로워진 게 누구 덕분인데? 하회탈 따라 하는 그 오페라 유령 가면 쓰는 놈이 활개 친다고 귀신같이 태세 전환하는 거 보면 환멸이 남;;

지나치게 과몰입해서 아예 서로 경쟁 관계인 것처럼 인식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하회탈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든가 어떤 식으로든 그 수혜를 입었던 이들.

하지만 그런 반응에 호응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좀 그렇긴 하지. 걔들 이때다 싶어서 하회탈 깎아내리더라.

-아니, 근데 하회탈이 뭐 특허라도 냄? 누가 됐든 덕분에 좀 더 안전해졌으면 된 거지 별걸 가지고 다 ㅈㄹ

└ㄹㅇ 누렁소든 검은소든 일만 잘하면 된 거 아니냐?

-그간 노력해 준 건 고맙긴 한데, 솔직히 전 흑마법사는 조금 찝찝해서..ㅎㅎ;

└아, 나도. 혹시 어디서 흑마력 폭주해서 잠수탄 거 아님? 이러다 회까닥 해서 갑자기 빌런으로 튀어나올지도.

└와.. 진짜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하 놈들 언플하는 거 역겹네 진짜

애초에 하회탈이 이렇게까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치안에 대한 공적 덕분이었던 데다가, 최근에 개설되어 성장하기 시작한 팬텀의 팬 사이트인 ‘오페라 하우스’도 그에 적극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음, 생각 이상으로 하인즈 팬덤의 성장이 빠른데. 역시 처음부터 카메라 같은 걸 신경 쓰지 않고 활동한 덕분인가.’

한스처럼 눈 깜짝할 새에 순간이동 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하인즈의 활동 범위도 그리 좁은 편은 아니었다.

서울 내로 한정한다면 그곳이 어디든 몇 분도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는 기동력을 가졌으니까.

거기다 그는 많은 이들이 찝찝하게 여기는 흑마력과도 연관이 없었고, 흡혈귀로 의심받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존재부정」으로 철저하게 감출 수 있는 데다, 무엇보다도···.

<서울 다크 히어로 팬텀 레전드 사진>

<1일 1팬텀 용안 영접 기도 5일 차>

<미친ㅋㅋㅋ 이거 봐 개잘생김ㅋㅋ>

한스와는 달리 무척이나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던 것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계기는 어쩌다 찍힌 심판 직후의 사진 한 장이었는데.

거기에 담긴 그의 미모가 오페라 반가면 따위론 전부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게 문제였다.

‘그건 확실히··· 내가 봐도 대단했지.’

단 한 장으로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된 사진.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서 멋들어진 고급 양복에 하얀 반가면을 쓴 채, 촬영자 쪽을 돌아보는 하인즈 2세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찍는 것을 막지 않았다고 해도 따로 포즈를 잡아준 것도 아니건만, 마침 사진을 찍은 이가 업계 종사자였는지 상당한 거리에서 줌을 당겨 찍었음에도 마치 화보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거기다 사진 너머로 「미혹」도 살짝 담긴 것 같고.’

아무래도 하인즈의 격이 상승하면서 강해진 효과가 자연스럽게 사진에까지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알파를 처리한 직후에 얻어놓고도 딱히 쓸 일이 없어서 그간 잊다시피 했었는데.

그 때문인지 주변에 널브러진 범죄자들이 그의 위험한 듯하면서도 치명적인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소품의 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확실히 음침하게 꽁꽁 둘러 싸맨 흑마법사 하회탈과는 여러모로 비교될 수밖에 없겠군.’

아마 마성의 남자 하인즈 2세의 인기가 여성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한 것도 그게 원인이겠지.

외모지상주의가 판치는 세태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뭐, 둘 다 나니까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이참에 아예 대놓고 가면 비밀 조직을 결성해서 활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이름은 대충··· 가면무도회(Masquerade) 정도가 어떨까.

기왕 이렇게 된 거 하인리히를 포함해 다른 아바타들까지 몽땅 끌어모아서···.

‘아니,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그는 딴 곳으로 새려는 생각을 다시 수습해 정리하며 앞으로 있을 일정에 집중했다.

지금은 중요한 계획이 막 코앞에 다가온 상황이었으니까.

쉬이이익—

고요함 속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맹렬하게 주변을 스쳤다.

달빛조차 숨을 죽인 밤.

아래쪽에서 흐릿하게 비치던 바다의 물결이 이내 화려한 번화가의 야경으로 바뀌었다.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환상의 도시로.

‘어디 보자. 위치가···.’

그렇게 바다를 건너 도착한 도시, 상하이 상공의 어느 한 지점에서.

[···찾았다.]

「심연의 눈」을 사용해 목표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한스가 서늘하게 읊조렸다.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놓칠 수밖에 없었을 수준의 어마어마한 보안 속.

그 안에서 익숙한 기척이 포착되었다.

‘번천회 동아시아 지부장, 율령자.’

이제 와서 더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아마 놈들의 수준이라면 이미 자신이 상하이에 등장했다는 것쯤은 파악했을 터.

지금부터는 속전속결이었다.

지금까지 비행했던 것 이상으로 빠르게 하강하는 한스의 몸.

그리고 마침내.

콰아아앙—!

앞을 막아서는 결계가 박살 나며 요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하회탈 부활의 신호를 알리는 화려한 축포였다.

***

화려한 장식과 야경이 비치는 집무실.

“후우.”

북아메리카 지부장 서기관과의 협의를 마친 율령자가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 그 방향을 창가 쪽으로 돌리고는 오른손을 옆으로 뻗어 찻잔을 손에 쥐었다.

후룩—

멋진 야경과 함께하는 여유로운 휴식 시간.

그렇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문득 자신의 오른팔로 향하자, 자연스럽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의 다섯 손가락 끝에는 뒷목부터 이어진 가느다란 금속 와이어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길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하회탈의 정신세계에서 팔을 잃은 그를 위해 닥터가 만들어 준, 의사에 따라 강제로 몸을 움직여 주는 최첨단 마도구였다.

‘하회탈···.’

그것을 보며 천천히 손가락을 까딱이던 그가 상념에 잠겼다.

일본에서 모습을 감춘 이후 제법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등장하지 않는 회(會)의 대적.

이쯤 되면 놈도 그때의 일로 어딘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이쪽의 일방적인 출혈은 아니었다는 소리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찌푸려졌던 그의 인상이 살짝 펴졌다.

‘놈에 대한 대책도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이번에 서기관과의 공조가 제대로 마무리되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그러나.

옛말에 그런 속담이 있지 않던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고작 호랑이도 그럴진대, 하물며 그것이 한 세계의 마왕이라면···.

삐잉—! 삐잉—! 삐잉—!

생각만으로 튀어나온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율령자님! 큰일입니다! 지금 상하이 영공에···!

근거지에 설치된 경보 장치가 요란하게 울리고.

보안실의 부하에게서 긴급 통신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고에너지 접근 경보!>

<고에너지 접근 경보!>

<고에너지 접근 경보!>

<······>

그의 왼쪽 의안에 핏빛의 붉은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쨍그랑—!

손에서 떨어진 찻잔이 요란하게 깨졌지만, 보조 장치의 도움을 받아 벌떡 일어선 그는 그쪽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줄 수 없었다.

콰아아앙—!

곧 이어진 건물이 뒤흔들리는 듯한 거친 충격과 함께.

[크크큭— 이거 참, 정말 오랜만이구나.]

조금 전까지 떠올리기만 하던.

무저갱에서 흘러나온 음성이 공간을 얼려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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