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277화 (277/284)

#277

하회탈 리턴즈 (2)

상하이에 자리한 어느 빌딩의 최상층.

쩌저적—

언제나 따스함만이 감돌던 그곳에 서늘한 한기가 퍼지며 급속도로 사방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사물의 표면에 서리가 내리고, 대기는 숨쉬기 힘들 정도로 얼어붙었으며, 요란하게 발동하는 결계들의 흐름이 정체돼 삐거덕거렸다.

[그간 잘 지냈나 보군. 신수가 아주 훤해졌어.]

이 모든 게 단 한 존재가 나타나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어떻게?’

그러한 이상 현상 속.

집무실의 주인인 율령자는 혼란스러워지는 사고를 애써 수습하며 눈앞의 불청객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이곳을··· 아니,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하회탈이 흑마법의 대가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당연히 번천회도 오래전부터 그에 대한 대책을 철저히 준비해 왔고, 그와 활동 영역이 겹치는 동아시아 지부는 평소의 보안에 더해 흑마법에 특화된 은폐성까지 가지게 되었는데···.

‘그게 모조리 무용지물이 되었다. 상대의 역량을 과소평가한 건가?’

까득, 이를 악문 율령자가 이미 활성화되고 있는 온갖 결계와 설비들을 곁눈질하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예상치 못한 불시의 습격으로 은폐와 진입 저지 단계에서 문제가 생기긴 했으나, 이곳은 동아시아 전체를 책임지는 컨트롤 타워였다.

여기에 적용된 보안이 고작 그것뿐일 리가 없지 않은가?

우우웅—!

지잉—

이면 세계 형성, 공간 격리, 좌표 고정, 이능 제어, 흑마력 억제, 신성 제단 구축 등···.

하회탈이 진입하던 순간부터 하나둘 작동하던 설비들이 모두 발현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능의 카테고리를 가리지 않고 효율만을 추구한 시너지.

오직 번천회만이 가능한 다중 술법의 연계였다.

[호오—? 과연 대단하군.]

그에 나직이 감탄한 한스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걸 보니 어째서 그가 진작 율령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는지도 납득할 수 있었다.

이미 두 차례나 영체 상태의 그를 마주했음에도 그 종적을 쫓을 수 없어 의아하던 참이었는데, 이만한 방비 속에 있었다면 그럴 만도 하지 않겠나.

‘아깝네. 진입과 동시에 곧바로 놈을 생포했으면 일이 더 편해졌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여유를 부리며 폼 잡는 겉모습과는 달리, 한스의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율령자가 있는 곳으로 곧장 들이닥쳐 놈을 포획한다는 첫 계획은 외부에서 관측한 것과 다른 공간 왜곡 때문에 실패했다.

그나마 직전에 방향을 틀어 어떻게든 집무실 내부까진 도달할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발동하기 시작한 결계들 때문에 바로 행동에 나서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도 그리 나쁘진 않아.’

자신을 경계하며 뒤쪽으로 물러나는 율령자와 그를 지키려는 듯 빼곡하게 발동한 온갖 보안 술법들.

한스는 이미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는 그 번천회 특유의 복합 술식을 「심연의 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거 참···.’

그리고 그것을 통해 빨려든 정보는 즉시 「마도의 길」과 「금단의 지식」, 「부정한 현자」를 통해 낱낱이 해체되었고.

‘진수성찬이군.’

그렇게 분석된 내용은 고스란히 「마도의 길」의 자양분이 되었다.

‘애초에 이 스킬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번천회 덕분이었으니까.’

과거— 훌륭한 연구 자료와 더불어, 율령자의 눈과 다리를 희생한 헌신적인 개인 과외 끝에 개화한 능력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번에도 이렇게 방대한 교보재를 준비해 주다니.

[갸륵하구나. 또한 어리석다. 고작 이런 걸로 나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하회탈로 가려진 눈가에서 시커먼 안광이 새어 나왔다.

그와 함께 몸에서 폭사되는 에너지에 결계가 뒤흔들리며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너희의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죽음이니—.]

쾅!

우르르르—

그때, 집무실 문을 박차고 다수의 각성자들이 들이닥쳤다.

전원 최소 극의급에 개중 한 명은 완연한 초월에 이른 강자였다.

그 혼자서는 하회탈을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것도 잘 알 텐데.

아마 결계의 도움이 있으면 다른 지점에서 지원이 올 때까진 버틸 수 있겠다 여긴 것이겠지.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으리라.]

그건, 그들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

콰아앙—!

재차 폭음이 일며 공간이 들썩였다.

‘결계가 몇 겹이나 중첩되어 있는데도 이만한 여파라니.’

하지만 율령자는 뒤에서 전해지는 충격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갔다.

싸움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

애초부터 그의 역할은 전투원이 아닌 관리자였으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물론 그의 고유스킬인 「심상투영」은 육신의 무력과 무관하게 정신세계를 파괴해 버릴 수도 있는 훌륭한 능력이었지만, 이미 하회탈에겐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비싼 대가를 치러서 말이지.’

그는 슬쩍 눈을 내려 열심히 움직이는, 오른팔과 마찬가지로 행동 보조 마도구가 달린 두 다리를 바라보았다.

‘상하이 지부는 당분간 폐쇄다. 아무리 공안에 미리 손을 써두었다지만 이미 너무 주의를 끌었어. 괜한 관심이 쏠려서 좋을 것 없지.’

중국은 땅도 넓고 인구도 많은 만큼 다수의 지부가 분포되어 있었다.

그중 어디로든 넘어간다면 업무를 처리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 없을 것이다.

어차피 지부장으로서 일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야 전부 머릿속에 있었으니까.

‘문제는··· 하회탈의 난동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건데.’

재차 그 기괴한 가면의 습격자를 떠올린 율령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중국의 천(天)급 초월자들은 대부분 대륙 곳곳에 흩어져 배치되어 있었다.

그만한 강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어 봐야 쓸데없이 효율만 떨어지니 당연한 일.

문제는 그만큼 그들을 한데 모으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라는 점이었다.

‘하필 회주께서 자리를 비우신 이때···!’

불과 하루 전.

하회탈의 재등장을 고려한 회주가 지구에 남아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러다 더는 이대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막 떠나간 참이거늘.

이 어찌나 절묘한 타이밍이란 말인가?

그렇게 몇 차례 이를 갈던 율령자는 이내 억지로 심호흡하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흥분해 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가 왼쪽 의안의 시야 한 편에 떠 있는 알림창을 흘깃 바라봤다.

<스캔 정보>

-코드 네임 : 하회탈

-에너지 타입 : 흑마력 + 죽음(?)

-주요 능력 : 흑마법, 언데드, 공간이동, 결계 전반 등 다수

-출신 차원 : 불명

-고유스킬 : 불명

-······

하회탈을 마주한 직후에 출력되었던 내용들.

스캔이라 하지만 그 내용은 의안이 직접 분석한 것 보다 그의 뇌리에 남은 정보들을 정리한 것이 대다수였다.

아무리 최첨단 마도 공학의 산물이라지만 하회탈처럼 격이 높은 이를 파악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으니.

그러나 그 하단에는 당장 참고할 만한 사항이 몇 줄 있었다.

-측정된 에너지 : 93,853,126

-위험도 : S+

-기가급 함선 원자로 이상의 에너지 반응 감지. 속히 이탈할 것을 권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측정되며 변동하고 있는 수치였다.

이 의안은 마도 공학이 극도로 발달해 우주까지 진출한 캘리카스 차원의 물건.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함선도 천체를 항해하는 초대형 우주 함선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S+라고? 이 의안을 얻고 확인한 천급의 대다수가 A 선이었건만···.’

물론 에너지양과 전투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서로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부어 가며 싸우는 우주 전쟁에서라면 모를까, 극한의 효율성으로 그것을 통제하는 달인끼리의 승부에선 일정 선만 넘는다면 그리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

정면으로 날아드는 주포를 완전히 상쇄하는 건 힘들어도, 슬쩍 방향을 틀어 흘려버리는 건 간단히 해내는 존재가 바로 초월자들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아예 단위가 다른 수치는 보는 이에게 커다란 압박감을 주었다.

특히 율령자처럼 객관적인 자료와 계산 등을 통해 세상을 예단하는 부류에게는 더더욱.

‘일단 이곳부터 벗어나야 한다. 천위밍도 A+의 천급이니 결계와 지(地)급들의 도움이 있다면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터.’

사실 가장 빠르게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최상층에 마련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하회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침입자가 어디로 침투하건 공간 왜곡으로 최하층으로 보내지게 돼 있어, 여유롭게 그것에 대응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을 때 최상층의 전송진으로 빠져나갔을 텐데.

‘젠장, 그것 때문에 빨리 이동할 수 있는 다른 수단들도 전부 막혀 버렸고···.’

설마 그 철저한 대비가 오히려 이렇게 탈출에 방해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는 다른 지점에 가게 된다면 꼭 이 점을 개선해 다시 설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

물론.

탈출할 수 있다면.

콰아앙—!

갑작스럽게 최상층에서 밀려온, 지금까지 있었던 것 이상의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크윽! 이건 무슨!”

그에 휘말린 율령자가 맥없이 상체를 휘청거렸지만, 다리의 보조 장치가 자동으로 자세를 제어해 준 덕에 바닥을 나뒹구는 꼴만은 면할 수 있었다.

다만···.

<고에너지 접근 경보!>

그에게 주어진 행운은 딱 거기까지였다.

-측정된 에너지 : 156,759,142

-위험도 : SS-

-테라급 함선 원자로에 준하는 에너지 반응 감지. 즉시 비상 탈출 시퀀스로 이행할 것.

수치가 바뀐 알림창이 다시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것과 함께.

[크흐— 또 만났구나. 제법 부지런히 걸은 것 같다만.]

불과 조금 전에 대면했던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스쳤다.

슬쩍 위험도 수치를 확인한 율령자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곤 힘겹게 다시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건 이를 바라보았다.

“···천위밍은.”

생각이 길어져 제법 오래 지난 것 같았으나, 실상 따져보면 몇 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빨리 뚫려 버리다니,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음? ···아아! 저 녀석 말이냐?]

하지만 하회탈의 뒤쪽을 본 율령자는 이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벅저벅—

스윽— 스윽—

다수가 걸어오는 소음에 섞여 들려오는, 뭔가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복도의 어둠을 헤치고 십여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그것을 본 율령자가 이를 악물었다.

먹물에라도 빠진 듯 전신에서 시커먼 기운을 뚝뚝 흘리는 언데드 부대.

그는 한눈에 그들의 수준을 알아볼 수 있었다.

‘천급 언데드···! 거기다 나머지도 전부 지급? 저런 것들이 어떻게 지구에!’

그것들은 그간 모아온 각성자의 시신으로 만든 ‘어비스 레버넌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엄선된 개체만을 선별한 정예 스쿼드.

이내 그 가장 선두에 선 언데드, 살마가 한 손에 잡고 질질 끌고 오던 뭔가를 천천히 치켜들었다.

“···천위밍.”

검은 손에 잡힌 머리채 아래에 보인 것은 율령자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가 바로 조금 전까지 시간을 벌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뒤에 남았던 천급의 고수였으니.

이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이미 그 얼굴에 생기라곤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일까.

[크흐흐— 덕분에 쓸 만한 소재를 구했구나. 이 녀석도 훌륭하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지. 이거 아주 만족스럽군.]

“······.”

등 뒤에 시체의 병사들을 거느린 죽음의 마왕이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 앞에 선, 위압감에 짓눌린 무력한 인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하지만 당연하게도, 한스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너도, 제법 좋아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있구나?]

심연이 담긴 한 쌍의 눈이 율령자의 몸을 훑었다.

그는 비전투형 정신계 각성자인 데다 경지도 초월에 이르지 못했으나, 그래도 나름대로 희소성이 있었으니 영 못 써먹을 몸뚱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에도 생각했지만. 저 눈, 굉장히 탐나는군.’

테두리엔 은은한 푸른빛의 원이, 그 안쪽의 홍채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가득 채워져 신비롭게 발광하는 기계 의안.

저만한 수준의 마도 공학 물품은 처음 보는지라 저도 모르게 눈이 갔다.

또 마침 드워프 아바타 하워드도 한창 마도 공학에 도전하는 중이지 않던가?

거기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분명 저번엔 휠체어를 타고 있었던 거 같은데 말이지. 그리고 저 오른팔도.’

아무 이상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저 팔다리를 보라!

그러면서 옷 아래로는 티도 나지 않는 자연스러움이라니.

‘말 그대로 궁극의 강화 외골격이군.’

저것도 한창 슈트 개량에 매진하고 있는 하워드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 터.

아직 다른 세계의 마도구를 이용하는 것에 제한이 있다는 문제가 남아있었으나, 그거야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적잖은 수확을 걷게 된 한스가 재차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율령자에게로 다가가 한 손을 뻗었다.

[어디 다시 한번 도망쳐 보려무나.]

“···하, 개 같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스의 손이 이마에 닿을 때까지, 그는 도망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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