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유럽 진출 (3)
날이 밝았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프랑스의 중심 파리에서는 평소와 같은 분주한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학업과 노동, 가사 등을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시민들.
하지만 그런 일상적인 겉모습과는 달리, 밤새도록 깨어있던 도시의 이면은 결코 평화롭지 못했으니.
지난밤에 일어난 이변 때문에 잠들지 못한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현 상황은?”
“약 세 시간 전에 있었던 낭테르를 마지막으로 더는 정보가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로써 처음 보고되었던 베르사유를 포함해 총 다섯 곳의 테르미도르 지부가 괴멸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허어— 다섯이라? 고작 하룻밤 만에 다섯 곳의 지부가 무너졌다고?”
프랑스의 각성자 관련 문제를 총괄하는 이능안보총국.
부하의 보고에 수도 파리와 인근 지역을 담당하는 청장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테르미도르가 대체 어떤 곳이던가?
프랑스의 암흑가라 할 수 있는 밀리유(Milieu)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과 다름없는 강대한 조직이 아니냔 말이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 나라의 모든 범죄 조직에는 그들의 손길이 닿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막강한 영향력에 공권력조차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어 골머리만 썩이던 위험한 집단.
그리고 일개 범죄 조직을 그 정도 위치까지 끌어올린 것이 바로···.
“폭군이 가만히 있지 않겠군.”
테르미도르의 주인이자 밀리유의 지배자, 폭군(tyran)이었다.
“놈이 작정하고 날뛰기 시작하면 골치 아픈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다. 설마 이쪽이 계획한 작전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명색이 국가 기관씩이나 되어서 범죄 조직에 대응하기는커녕 걱정부터 하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생각을 조금만 달리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건 생명체가 아니라 일종의 비대칭 전력이나 다름없으니까.’
같은 지구인이 맞나 의심이 갈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지닌 극소수의 절대 강자들.
그나마 맞상대라도 할 수 있는 타입이라면 나을 텐데, 진짜 문제는 흡혈귀인 ‘폭군’과 같이 정면에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존재였다.
‘몸을 숨긴 놈이 작정하고 국가수반을 비롯한 고위층들만 암살하고 다니면 나라가 통째로 마비되어 버릴 수 있다.’
놈이 대놓고 싸움을 피하며 암습을 거듭한다면, 이쪽이 대등한 수준의 초월자를 섭외해 대응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설령 놈을 처치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 끝에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할 터.
그것이 정부 측에서 테르미도르를 함부로 건들지 못하고 암묵적인 선을 넘은 경우에만 제재하는 이유였다.
당장 자기 목숨이 아까운 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아마 빌런의 세력이 큰 대부분의 나라가 이와 비슷한 사정이리라.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저쪽도 확실한 정황이 파악되기 전까지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요.”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 그자의 정체는 파악했나? 단신으로 그만한 일을 벌였다면 분명 그 내력이 범상치 않은 자일 텐데.”
빌런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는 게 존재의의인 입장에서 이런 걸로 안도한다는 데에 자괴감이 들었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일을 벌인 이의 정체였다.
일단 그가 누군지는 알아야 뭘 하든 방침을 정할 수 있지 않겠나.
“유창한 프랑스어, 180센티미터 이상의 장신, 귀족적이고 위압적인 분위기, 하얀색 오페라 반가면을 쓴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의 미남자···.”
간밤에 부지런히 움직이며 생존자와 목격자들의 증언을 확보한 덕분에 대상자의 인상착의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상대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혹시 몰라 대외안보총국(DGSE)에 협조를 구한 덕분에 가장 유력한 후보자를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생각 이상으로 수월하게 거의 확실시되는 대상 하나를 꼽을 수 있었다.
이미 국외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힘을 쏟고 있던 프랑스의 첩보 기관이 협조를 청하기 무섭게 답변을 보내왔던 것이다.
“통칭 팬텀.”
“···팬텀? 그 가면도 그렇고. 역시 오페라의 유령인가?”
“예. 또한 추정하기로, 그는 이미 한국의 암흑가를 집어삼킨 뱀파이어 클랜의 수장입니다.”
“허! 그자도 뱀파이어라? 그만한 거물이 여기까진 대체 어쩐 일이지?”
이윽고 회의실의 영사기를 통해 여러 장의 사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CCTV 영상을 캡처한 듯한 조악한 화질부터 시작해 전문가가 찍은 듯한 화보 같은 사진까지.
그중 마지막에 가장 크게 떠오른 것은 인터넷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일명 ‘팬텀의 레전드 짤’이었다.
“···확실히 특출난 외모군. 가면으로 가려져 있는데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목격자들과도 이미 대조를 마쳤습니다. 여러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확정하지 않았을 뿐, 이미 내부적으로는 동일인이라고 판단을 끝마친 상황입니다.”
“진짜로 한국의 뱀파이어란 말이지? 거참, 갑자기 지구 반대편의 나라 이름이 불쑥 튀어나오니 당황스럽군. 세력 확장을 위해 해외 진출을 노린다기엔 여긴 너무 멀 텐데.”
사진을 들여다보던 청장이 거칠게 턱을 쓰다듬었다.
솔직히 그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교류와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며 몇 번 접한 게 전부인지라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뇌제와 하회탈 말곤 그리 주의할 만한 인물이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상황을 보아하니 이제 그것도 옛말이 된 듯했다.
그간 관할 지역에서 터지는 사고들을 수습하느라 해외 소식엔 다소 소홀했었는데, 앞으론 그쪽도 좀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이능안보총국에서 방관을 기본 방침으로 변수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해 가고 있을 때.
그와 같은 시각.
“···한국의 뱀파이어라. 저놈이 바로 그놈인가?”
파리 시내의 다른 곳에서도 그 팬텀의 사진을 보며 묘한 감상을 내뱉는 이가 있었다.
바깥은 맑은 햇볕이 내리쬐는 화창한 아침이건만, 모든 창문이 두꺼운 암막 커튼으로 뒤덮여 오직 모니터 불빛만이 아른거리는 어두운 방 안에서—.
“들었던 대로 정말로 여기까지 찾아왔군. 대체 무슨 배짱일까?”
전신이 그림자에 파묻혀 온통 시커멓게 보이는 존재가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잠깐 내보인 의문이었을 뿐, 그 이후에 한 대응은 미적지근했던 국가 기관과 전혀 달랐다.
‘그 목적이 무엇이건,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대체 놈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 정확히 알 순 없었으나, 이건 저쪽에서 대놓고 보내온 도발이었다.
그것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벌인.
벌써 몇 개나 되는 지부가 날아가고 많은 간부들이 유명을 달리했는데, 이만큼 일방적인 선공을 당해 놓고 그 상대를 확실하게 짓밟지 않는다면 그간 쌓아온 테르미도르의 위신 전체가 흔들려 버릴 터.
일이 더 귀찮아지기 전에 얼른 원흉을 제거하고 다시 입지를 공고히 다질 필요가 있었다.
‘제법 쓸 만한 놈인 것 같으니 저놈을 잡아다 휘하에 넣는 것도 썩 괜찮겠군. 그렇게만 한다면 이번에 입은 피해 정도야 가볍게 벌충할 수 있을 테고. ···그 루마니아 놈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짜증 나니까.’
그는 자신이 지배하는 영역에까지 은근슬쩍 간섭하려 들던 불쾌한 이웃을 떠올리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욕심 많은 놈은 동유럽 대다수의 음지를 잠식한 것에 그치지 않고 호시탐탐 영역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이번에 테르미도르가 무시 못 할 피해를 입어 버렸으니, 그것을 알게 된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뻔한 일이었다.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태세를 정비한다.’
그림자에 파묻혀 있던 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나른한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이듯이 읊조렸다.
[“찾아라.”]
기묘한 울림을 담은 단어가 울려 퍼지고.
꿈틀—
방 안에 가득 들어찬 그림자들이 그 말에 반응하듯 꿈틀거렸다.
[“그리고 내게 고해라.”]
놈이 어디에 있는지.
꿈틀꿈틀— 파아앗—!
그 나직한 한마디에 공간 전체를 채우고 일렁거리던 어둠들이 이내 산산이 흩어지며 사방의 그림자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창문 틈, 현관, 복도 등을 넘어 건물 외벽을 타고 도시 전역까지.
끝도 없이 퍼져나간 그것들은 파리 시내에 드리운 그림자들을 타고 넘나들더니, 마침내 위성도시에까지 뻗쳐 거미줄처럼 일대를 완전히 하나로 뒤덮어 버렸다.
내부를 샅샅이 훑는 섬세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그 유효 반경은 무려 20여 킬로미터.
자연현상인 그림자를 이용하기에 기척을 느끼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권능과도 같은 능력.
그것이 바로 그.
테르미도르의 폭군이 가진 고유스킬 「그림자의 군주」였다.
그리고 벌어들인 대부분의 카르마를 고유스킬 강화에 투자한 그의 상징과도 같은 능력은.
“···찾았다.”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
파리 남서부, 베르사유 인근의 산림 공원.
깊은 산지에 가만히 서 있던 하인즈 2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왔나.”
주변에 아무 인기척이 없는 상태에서 내뱉은 그 말은 그저 혼잣말처럼 보였지만—.
“호오,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역시 기다리고 있었나?”
“뭐, 대충 이쯤이면 올 거라고 짐작했지.”
“생각보다 감이 좋군.”
그에 답하듯 아무런 기척도 없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인간 형상의 새카만 그림자가 태연하게 응수했다.
계속해서 한껏 곤두세우고 있던 감각과 「통찰」의 시너지 덕분에 간신히 그 기척을 파악할 수 있었던 하인즈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유스킬만을 갈고닦아 경지에 오른 유형인가. 9레벨인 건 틀림없지만 흡혈인자의 양은 터무니없이 적다.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었군.’
하인즈 2세가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처음으로 지구에서 만난 다른 세계의 흡혈귀, 혈맹 강경파의 감마에게 현대 흡혈귀의 수준을 구분하는 레벨 체계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지구라는 특이점이 발생하며 한 장소에 모이게 된 여러 차원의 흡혈귀들.
그들은 ‘피’를 필요로 한다는 결정적인 공통점 때문에 같은 카테고리에 묶여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같은 종족이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
같은 유인원이라 해도 침팬지와 오랑우탄이 서로 같지 않듯이.
‘그래서 나온 방법이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된 특성, 흡혈인자를 측정해 세부적으로 나눈 레벨 체계라고 했지.’
아무 기준이 없던 상태에서 그것은 확실히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흡혈인자의 농도가 짙고 양이 많을수록 흡혈귀로서 낼 수 있는 힘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대략적인 수준을 제시할 수 있을지언정, 강함을 나타내는 절대적인 척도가 될 순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
하인즈야 동족 포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흡혈귀로서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유형이라 하나, 애초에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무력이란 것이 흡혈인자에 의존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각성자에게는 누구나 각자의 고유스킬이 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수단을 통해 경지에 오를 수도 있었다.
고작 잔혈급 뱀파이어가 각고의 노력 끝에 대마법사가 될 수도 있으며, 역으로 모종의 이유 때문에 소드 마스터가 말단 흡혈귀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인즈는 그것을 눈앞에 있는 상대, 폭군을 대면하며 새삼 체감할 수 있었다.
놈이 가진 흡혈인자의 양은 진혈 수준에도 간당간당한 정도였지만, 그 질은 환골탈태라도 거친 듯 경지에 합당한 격을 뿜어내고 있다는 것을.
‘하긴, 나처럼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으면 순수하게 뱀파이어로서 초월에 이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그 일례가 바로 강제적으로 흡혈인자의 농도를 끌어올리다 미쳐버린 알파였다.
그리고 지금 하인즈가 느끼는 감상을 그림자 괴인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냐···? 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혈마력이···.”
정확히 반대되는 의미로.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지? 흡혈인자를 그 정도 수준으로 정제하려면 고작 몇십 년으론 어림도 없을 텐데···!”
처음 마주한 직후에 몇 마디 나눈 후로 조용히 서로를 탐색하던 그가 결국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역시 저만한 격을 지닌 상대에겐 이런 지근거리에서의 「존재부정」도 완벽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긴말이 필요한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탐색과 동시에 타이밍을 재던 하인즈는.
놈이 당황한 틈을 타 곧바로 손을 휘두르며 이곳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결계를 즉시 발동시켰다.
우우우웅—!
그가 가진 「급가속」의 인과에 따라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순식간에 구축된 「피의 신비」의 결계.
그에 위협을 느낀 모양인지, 동시에 폭군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그림자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갈 길도 먼데 빨리 끝내도록 하지.”
“허, 잔재주 조금 익혔다고 눈에 뵈는 게 없구나.”
“글쎄···.”
하인즈는 「혈통의 갈망」의 갈증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한 손엔 기다란 피의 칼날을, 다른 손엔 휘몰아치는 붉은 폭풍을 거머쥐었다.
“과연 잔재주일까?”
참고로 동족 포식과 「혼혈진화」를 통해 피를 강탈당한 희생자들의 업을 발판 삼아 성장한 그는.
단순히 최대 에너지양만 큰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