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대탈출(1)
“형, 운전할 줄 알지?”
유태수는 키가 꽂혀 있는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천천히 구급차를 몰고 사형장을 빠져나왔다.
저 멀리 위병소가 보인다.
오늘 사형집행이 있고 구급차로 시신을 실어 나갈 것이라는 지시를 받은 듯 위병들은 차를 세우지 않았다.
대신 잘 가라는 듯 거수경례를 했다.
“추웅서어엉!”
부대를 빠져나온 구급차는 한참을 달려 근처 시내로 들어섰다.
그리고 차량 통행이 뜸한 도로가에 구급차를 세우고 내렸다.
지금쯤 구급차 수배령이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차를 버려야 한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한 마디도 않는다.
이름만 네오라고 밝혔지 아무것도 알려준 건 없다.
총살당하기 직전 살려 데리고 나왔으니 지금쯤 질문이 우박처럼 쏟아져야 하는데 유태수는 입을 꼬옥 다물고 있었다.
조용한 골목, 유태수는 이미 군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마셔!”
네오가 자판기 커피 한 잔을 가져와 내민다.
유태수는 말없이 커피를 받아 후루룩 마셨다.
“역시 삼촌 말이 맞았어.”
유태수가 무슨 말을 했느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그는 절대 너에게 묻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네오 네가 자청해서 알려주게 될 것이다.
네오는 눈을 반짝였다.
“형, 정말 궁금하지 않아?”
“죽을 놈 살려놨는데.”
궁금하다는 뜻이다.
“그럼 왜 안 물어보는데?”
“세상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면서?”
“설마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단 말이야?”
엄청난 비밀이 탄로 난 것처럼 네오의 눈이 커졌다.
“날 구해줬으니 목적이 있겠구나?”
“그럼 그럼, 삼촌이 말은 잘 통할 것이라고 했는데 역시 눈치 백 단이네.”
그러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참 동안 뭔가 찾는지 고개를 돌리던 네오가 성큼성큼 걸어가서 뭔가 주워 들고 왔다.
그 손에는 청소할 때 사용하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빗자루가 들려 있었다.
“형, 이게 뭔지 알아?”
“빗자루 아니냐?”
“맞아, 더러운 것을 쓸 때 사용하는 비야. 혀엉, 청소 좀 해줘.”
“청소?”
유태수는 눈을 치켜떴다.
설마 자신을 청소부로 쓰기 위해 살렸단 말인가.
“삼촌께서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대. 나쁜 놈들이 너무 많다는 거야. 혹시 3대7 비율을 알아?”
“조금?”
“호오! 말해봐. 이것까지 알면 형 진짜 존경할게.”
네오의 눈이 커졌다.
“세상의 모든 동물은 5대5일 때 팽팽한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유일하게 인간만 그 비율은 통하지 않는다. 선한 영향력이 악한 이의 영향력보다 크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 일곱, 착한
사람이 셋이어도 충분히 그 사회는 선악의 균형추가 맞으며 활기차게 돌아간다?”
유태수는 맞느냐는 듯 네오를 바라봤다.
짝짝짝!
네오는 펄쩍 뛰면서까지 박수를 쳤고 지나가던 행인 한 사람이 흘긋 쳐다본다.
“브라보, 최고야.”
유태수는 피식 웃는다.
“맞아. 5대5의 균형추가 무너진 것이 1945년, 6대4가 무너진 것이 2010년, 5대5가 무너지고 6대4까지 기우는 데 65년 걸렸어. 그런데 7대3이 2029년에
무너졌지.”
8대2가 되면 절대 회복할 수 없다.
그건 이미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밝혀졌고 누군가는 이미 밑바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했다.
삶의 밑바닥.
그건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신세계(神世界)를 의미했다.
유태수의 눈이 빛난다.
뭔가 가슴을 뚫는 메시지가 오고 있다.
“날 살려낸 이유가 악의 정벌?”
“정말이야. 지옥에 더 이상 자리가 없어.”
“그래서 현지에서 그냥 정리한다?”
“분명한 건 형이 아니면 누구도 해내지 못한다는 거지. 형은 우리 삼촌에게 선택된 케이퍼블(capable:능력자)인 거지. 해볼래? 우리 삼촌 말 들으면 절대 손해 나는 일
없어.”
“삼촌?”
“궁금해할 것 없어. 분명한 사실은 삼촌은 선의로 날 형에게 보냈다는 거야.”
“어쨌든 거래군.”
유태수의 눈이 빛난다.
일단은 흥미롭다.
***
그 시각 검정 벤츠 한 대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벤츠가 수월하게 도로에 진입할 수 있도록 정장 차림의 보안요원들이 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일부를 막는다.
부우웅!
벤츠는 그렇게 도움을 받으며 차량들 틈으로 스며들었다.
벤츠 뒷좌석에는 일흔 가까운 반백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조금 진한 블루 계열의 정장과 붉은 넥타이, 그리고 가느다란 금테 안경을 끼었다.
마른 얼굴에 가는 금테 안경을 낀 탓인지 노인의 인상은 매우 차가워 보였다.
“어디로 모실까요? 큰 집으로?”
그러면서 조수석에 앉은 수행비서 장민혁이 상체를 반쯤 돌려 노인을 보며 말했다.
노인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창밖을 보며 뭔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툭 던졌다.
“미류 집으로 가자.”
그러면서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는 것이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운전기사 또한 알았다는 듯 차선을 바꾸기 시작했다.
큰 집은 한남동 집을 말한다.
미류는 최근에 노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서른다섯 살의 젊은 여자다.
그동안 적지 않은 여자들이 노인의 사랑을 받았지만 미류처럼 이름만 꺼내도 웃으며 좋아하는 여자는 없었다.
지이잉!
장민혁이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 액정을 본다.
처음 보는 번호 하나가 찍혀 있었다.
슥!
단박에 끊어 버린다.
그런데 잠시 후 다시 같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고 이번에도 매정하게 끊었다.
세 번째 걸려 오자 약간 이마를 찡그렸다가 이번에도 끊었는데 더 이상 걸려 오지 않았다.
지이잉!
그러나 1분도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 왔다.
액정에 오채동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찍혔다.
오채동은 그룹 미래전략실장이다.
“여보세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춰 받는다.
[회장님과 같이 계시나?]
“예!”
[조금 전 7838 전화 왔지? 받아야 하네. 회장님과 통화를 하고 싶어 하네.]
“누군데?”
[그냥 회장님 바꿔드리게.]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군대만 계급보다 보직이 파워가 있는 건 아니다.
사회에서도 직책보다 보직이 때로는 우위에 있을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렇다.
계열사 사장보다 한 끗발 높은 그룹 미래전략실장이다.
하지만 회장과 통화하기 위해서는 누구든 수행비서라는 관문을 일차 거쳐야 한다.
수행비서는 회장님 주무신다, 아니면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여러 핑계를 대며 통화를 막아 버릴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미래전략실장이지만 부장급 비서에게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지이잉!
「7838」
또 걸려 왔다.
잠시 지켜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목소리를 좀 더 깔았다.
[안녕하십니까? 난 국방부 장관 조중공입니다.]
“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다.
[국방부 장관 예비역 육군 대장 조중공이라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조 장관?”
[허허! 맞습니다. 조중공입니다. 급히 회장님과 통화를 좀 하고 싶어 결례를 무릅썼습니다.]
“무슨 일로?”
[이……것 좀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잠깐 기다리시죠.”
이윽고 장민혁은 핸드폰 송화구를 한 손으로 막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노인.
바로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인 태천그룹 총수 유장풍이다.
태천(太天)그룹.
국내 GDP 대비 약 20여 퍼센트를 차지하는 막강한 기업집단이다.
우리나라 65개 대기업집단 중 태천그룹이 기록한 매출만 350조, 전체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 22퍼센트에 이른다.
웬만한 국가 일 년 GDP를 날려버리는 대그룹.
가볍게 코 고는 소리가 나는 걸 보면 자는 듯했다.
국방부 장관.
경제부처 장관이라면 지극히 정상적인 통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국방부 장관이 기업 총수에게 전화라니.
설마 탱크 사는데 돈 좀 지원해달라는 전화는 아닐 것이다.
“누구야. 이리 줘.”
어느새 깨어난 듯 손을 뻗는다.
“국방부 장관이라고 합니다.”
“국방부 장……관?”
순간적으로 유장풍의 눈빛이 흔들린다.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일이 있기 때문인데 그제서야 장민혁도 뭔가 기억한 듯 흠칫했다.
‘그러고 보니!’
거의 동시에 운전기사 채봉식도 고개를 돌렸다.
유태수.
유장풍 회장이 낳은 칠 남매 중 막내다.
그리고 오늘 육군 사형장에서 총살당하는 날이다.
총살(銃殺).
영화에서만 봤을 뿐 단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얘기도 듣지 못했다.
- 누구든 면회 가는 놈은 나와 밥 먹고 살 생각 하지 마.
지엄한 명령이었다.
몇 번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면회객의 면면이 수시로 유장풍에게 보고된다는 것을 알기에 끝내 가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이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아닌가.
‘아아!’
장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 장 대리님!
고등학교 때 유장풍을 한남동 집에 데려다주고 퇴근하려는데 갑자기 유태수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왔다.
대문 밖에 세워둔 자기 차에 올라 출발하려던 장민혁은 앞 유리를 내렸다.
- 태수, 무슨 일이야?
- 나 공부 열심히 할 테니까 운동 계속할 수 있도록 아빠에게 말 좀 잘해주세요.
당시 유태수의 성적은 그럭저럭하는 정도였다.
- 이렇게 공부해서 대학 갈 수 있겠냐? 당장 그만둬!
유태수는 SKY는 몰라도 서울에 있는 대학은 들어갈 테니까 운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매달렸다.
하지 마라, 하겠다 하며 부자지간의 관계가 폭발 직전까지 달궈지고 있을 때였다.
결국 유태수는 최후의 돌파구로 수행비서인 자신의 도움을 받아보려는 것이었다.
장민혁은 유장풍이 기분 좋을 때를 노려 얘기했고 의외로 좋은 결과를 냈다.
- 허허! 어린놈이 제법이야.
화는커녕 칭찬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행비서야말로 유장풍의 심기를 가장 정확히 파악할 것이고 기분 좋을 때를 노려 목적을 달성한 유태수를 칭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장풍이오!”
전화를 받은 유장풍의 표정이 굳어 있다.
[회장님, 국방부 장관 조중공입니다. 얼마 전 신문 기사에서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요?]
“일개 국가의 국방을 책임지고 통솔하는 국방부 장관께서 나 같은 늙은이 건강을 염려해주다니 기쁘고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찾아봬야 하는데 이렇게 전화로 연락하는 걸 이해 바랍니다.]
“무슨 말씀이오. 조 장관의 마음은 충분히 압니다. 조 장관, 그럴 게 아니라 우리 내일 식사나 함께하는 것이 어떨까요? 난 할 일이 없는 늙은이여서 장관만 좋다면.”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원하시는 시간에 불러만 주십시오.]
“그럼 곧바로 우리 비서가 시간 정해 전달하겠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짐작하시겠지만 오늘 유 군을 군법에 따라 집행했습니다.]
유장풍이 살짝 눈을 감는다.
“버…… 법은 모두에게 평등해야 하오.”
[그런데.]
잠시 말을 끊은 조중공이 더듬거렸다.
[실패했습니다.]
“연기됐단 말이오?”
[그게 아니라 실은.]
조중공은 전후 사정을 소상하게 말해주었다.
꿈틀!
유장풍은 눈썹을 찡그렸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보시오, 조 장관. 그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란 말이오? 아니, 사형이 집행됐어야 할 놈이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지금 수도권 일원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었습니다.]
진돗개는 우리 군의 경보 단계 중 하나다.
평상시에는 진돗개 셋이다.
어떤 위험이 감지되거나 발생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면 진돗개 둘, 그리고 적의 움직임이 분명하게 드러나거나, 무장 탈영병이 발생했을 때는 진돗개 하나가 울린다.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면 경찰까지 비상에 돌입한다.
[서울 시내를 들어오는 모든 길목에 검문이 진행되고 있으며 발견 즉시 생포하되 반항할 경우 현장에서 사살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전화를 받는 유장풍이 연신 마른침을 삼킨다.
잠시 몇 마디 더 얘기를 나눈 유장풍이 핸드폰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지이잉!
굳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울린다.
핸드폰을 들어 액정을 보자 「유동풍」이란 이름이 찍혀 있었다.
슥!
통화 버튼을 누르고 묻는다.
“뭔가?”
[형님이 직접 받으십니까? 장 비서는?]
“말해.”
[지금 어디십니까? 한남동에 전화했더니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말하라니까?”
유장풍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모르시나 보군요. 태수 이놈이 사라졌답니다.]
“태수?”
[형님, 아무리 때려죽일 놈이라고 하지만 자식 이름까지 잊으셨습니까? 오늘이 그놈 총 맞는 날 아닙니까? 그런데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자네는 어디서 그 얘길 들었나?”
[형님이 그러셨잖아요. 국정원보다 한발 앞서는 정보력을 갖고 있는 우리 태천그룹이라고 말입니다.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수도 우리가 가장 빨랐습니다. 거꾸로 우리가 국정원에 귀띔을
하고 정확히 보름 뒤 트럼프가 아프간 미군 철수 발언을 했잖습니까?]
태천그룹의 손길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여러 나라에 정치인, 학생, 공무원, 일반시민,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에게까지 로비 자금을 뿌린다.
첩보원들처럼 위험을 감수하며 목표 세력에 침투할 필요가 없으면서 알짜배기 정보를 취득하는 것이다.
돈보다 더 뛰어난 첩보원은 없다.
유동풍의 지론이다.
“그런데 그 보고가 왜 나한테 먼저 오지 않고 자네에게 들어가느냐는 말이야?”
[누구에게 먼저 가면 좀 어떻습니까?]
유동풍은 유장풍의 둘째 동생이다.
공식 직함은 태천바이오로직스 사장.
전자와 함께 태천그룹에서 가장 독주하고 있는 계열사다.
탁!
장민혁은 유장풍이 건네주는 핸드폰을 받았다.
차는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남산 터널에 인접했을 때까지 침묵하던 유장풍이 입을 열었다.
“차 돌려라.”
어디로 돌리라는 말이 없었으므로 고가를 오르지 않고 일단 밑으로 빠졌다.
“집으로 가자!”
끼이익!
운전기사 채봉식은 곧바로 차를 유턴시켜 근처에 있는 유장풍의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