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왕의 신전
얼마나 다쳤기에 119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됐단 말인가.
급히 쫓아간다고 해서 자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백설공주들과 좀 더 놀고 싶었으나 좌석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등골이 오싹해진다.
차가운 얼음물 한 방울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나 먼저 가볼게.”
유상주는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 사장이 가버리면 무슨 재미냐고 백설공주들이 잡았지만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양해를 구하고 빠져나갔다.
고작 비서 한 명 119로 실려 간 일에 지나치게 호들갑인 자신의 행동이 쪽팔리기도 했다.
병원비 몇 푼 나오면 지원해주고, 회사 그만두면 퇴직금 계산해 던져주면 그만이다.
- 직원에게 정을 주는 것보다 멍청한 짓은 없다.
아버지 유장풍은 결코 아랫사람에게 절대 사람의 정을 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어떤 동물보다 교활한 게 인간이다.
정을 두면 올라타려고 한다는 것이다.
“짜증 나!”
경호원이 운전대를 잡았고 뒤에 탄 유상주는 계속 인상을 썼다.
손가락 네 개가 부러졌다는 말에 유상주는 소스라쳤다.
그것도 누군가 일부러 부러뜨렸다는 것이다.
“양 과장!”
비서지만 과장급이다.
일단 부기가 가라앉은 뒤에 깁스를 해야 한다면서 의사는 응급실을 나갔다.
“말해봐, 누가?”
양성국의 인상이 굳어졌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나자 맥없이 당했다는 것이 부끄러우면서 화가 치민 것이다.
“칠성그룹 김 과장과…….”
안면이 있는 비서들과 맞은편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던 일부터 자세히 설명했다.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양성국은 어금니를 물며 눈을 감아 버렸다.
사내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분질렀다.
“서…… 설마!”
바로 그때 유상주가 소스라쳤다.
“사장님!”
누워 있는 양성국이 놀라 바라봤다.
부르르!
춥지도 않은데 유상주가 온몸을 떤다.
***
회사에서 퇴근하여 방문을 열고 들어온 유상주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화장대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백을 침대에 던져 놓고 화장대로 다가선 유상주의 눈이 커졌다.
립스틱이 모두 부러져 있었다.
발색이 진해 시각 효과가 있고 여성의 메이크업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립스틱.
프레젠테이션이나 무대를 오르기 전 가수나 연주자들이 립스틱을 바르면 관객의 시선이 확실히 집중된다고 한다.
실제 실험에도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여성과 바른 여성이 길거리를 걸어갔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7초 정도 더 바른 여인에게 머문다고 알려졌다.
형형색색 고가의 립스틱 이십여 개 중 단 하나도 온전한 것이 없다.
모조리 부러뜨려 놓은 것이다.
벌컹!
문을 박차고 나온 유상주는 아래층을 향해 소리쳤다.
- 유태수, 유태수! 너 안 나와!
다다닥!
계단을 달려 내려가 유태수가 자는 방을 향해 갔다.
- 뭔 일이니?
안방 문이 열리고 어머니 채무령이 나왔다.
- 얘, 시간이 몇 시인데 자는 아이를 깨우고 그러니?
- 가만 안 둬.
유태수의 방문을 열어젖히자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이는 베개를 끌어안은 채 엎드려 자고 있었다.
- 너 안 일어나?
꼼짝 않는다.
여섯 시에 퇴근하자마자 곧장 집으로 달려와 유태수와 공을 차기로 사전 약속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만나자고 하여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것에 앙심을 품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립스틱을 모조리 부러뜨려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
“태수야. 태수라고.”
“누가요? 사장님!”
후우우우!
유상주는 진정하기 위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태수야. 양 과장을 이렇게 만든 사람.”
“네에에?”
양성국의 눈이 커졌다.
“얼굴이 아니던데요.”
“걔는 좀체 화를 내지 않지만 한번 났다 하면 인정사정 가리지 않는 녀석이야. 경고야. 내가 특임대에 귀띔한 걸 알아 버린 것이 분명해.”
그제서야 양성국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당사자인 유상주가 아닌 비서인 자신을 상대로 경고를 했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유능한 복서는 한 방에 보내지 않는다.
잽과 스트레이트를 이용해 서서히 데미지를 주면서 상대를 무너뜨려 간다.
이른바 잘근잘근 씹는 것이다.
그러다 때가 왔다 싶으면 한 방에 보내버린다.
다음에는 양성국을 죽이겠다는 의미도 있었다.
비서이니 유상주의 배신을 가장 강하게 지지하거나 도왔을 것은 뻔했다.
유태수는 그 문제를 따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꿀꺽!
양성국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자신이 많은 의견을 내놓은 것은 맞지만 결정은 유상주가 한 것이다.
유태수는 사형수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내다.
꾸울꺽!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목을 만졌다.
“오빠, 나야. 태수가 왔다 갔어.”
유상주는 큰 오빠인 유종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
거울 앞에 섰다.
조금은 익숙해질 때가 되었는데 여전히 낯설다.
성형으로 바꿔버린 얼굴, 눈빛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유태수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스윽!
와이셔츠 깃을 세우고 넥타이를 맸다.
세운 깃을 원래대로 젖힌 뒤 걸어 놓은 양복 윗도리를 걸치고 다시 한번 거울을 본다.
건장한 체격의 정장 사내.
이름 배석대. 나이는 해가 바뀌어 스물일곱이다.
오늘 날짜는 3월 3일 목요일, 바깥 날씨는 아직까지 춥다.
유태수는 다시 한번 복장을 확인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보증금 2,000만 원에 월세 70만 원의 원룸이다.
자동으로 된 현관문을 나가자 곧바로 왕복 2차선 도로가 나타났다.
버스를 타고 다섯 정거장을 가면 지하철역이 나온다.
비록 경기도 외곽이지만 불편하다거나 다른 문제 거리는 전혀 없다.
최호민의 아버지 최만종은 병원비 일체를 받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최호민은 방을 얻는데 모자란 보증금을 빌려주기까지 했다.
부우웅!
버스가 왔고 유태수는 차에 올랐다.
***
2월 초 필기시험에 합격했고 오늘 면접시험이다.
필기 합격했다고 안심했다가는 뒤통수 맞는다.
언젠가부터 모든 기업들이 면접에 비중을 두었다.
자신감은 곧 말에서부터 시작된다.
면접관의 질문에 얼마만큼 분명한 자신의 소신을 갖고 있는지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실력이다.
인터넷에는 대기업 면접만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지도하는 마케터들이 활발히 활동한다.
최호민은 자신의 면접 경험을 얘기해주고 실력 있는 마케터까지 소개해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태천그룹을 들어가는 방법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태수는 훤히 알고 있다.
면접시험은 서초동 태천그룹 사옥에서 진행된다.
고시보다 더 어렵다는 태천그룹 입사 시험.
신입사원 연봉이 칠천을 훌쩍 넘으면서 국내 65개 대기업 집단 중 연봉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태천전자와 태천증권이 가장 센데 팔천만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수학능력 시험 때보다 태천그룹 신입사원 시험 때 차가 더 막힌다는 말을 실감이라도 하듯 서초동 일대는 완전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굳이 이런 복잡한 절차를 치르는 이유가 뭘까.
태천그룹 정도 되면 서울 외곽은 물론 전국적으로 수많은 연수원과 업무용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런 곳으로 시험장을 정하면 출근길 시민들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서로가 편할 것이다.
면접이 있는 날이면 하루 종일 강남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면서도 꿋꿋하게 연례행사를 치르는 이유를 유태수는 알고 있다.
과시다.
입사 시험만으로도 태천그룹은 서울의 교통을 마비시킬 수 있다.
3년 전 모 언론사에서 태천그룹 사원들이 인근 식당에 지출하는 하루 점심 식사비만 10억여 원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하루에 10억.
네 번의 토요일 일요일을 뺀 22일을 계산하면 한 달에 220억을 쏟아붓는 것이다.
거기에 퇴근 후 접대 회식 술자리까지 계산하면 액수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거기에 국내 GDP 대비 20퍼센트를 태천그룹이 차지한다.
‘감히.’
마음만 먹으면 강남 일대의 요식업과 유흥업소를 문 닫게 할 수도 있고, 국가 경제까지 뒤집어 버릴 수 있다.
그러니 누구든 내 앞에서 까불면 죽는 수가 있다.
아버지 유장풍은 분명히 그렇게 말을 했다.
너무 커지다 못해 이제 스스로의 몸도 가누기 벅찬 이 거대 공룡이 오늘도 거센 파도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
사람이 있다.
그러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디에선가 땀 흘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 태천그룹의 면접은 합격과 탈락이 아니라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 하는 생과 사의 문제라고 했다.
대기실은 비장하면서도 곧 폭발할 것 같았다.
“들어오세요.”
정장의 사내가 앞문을 활짝 열었다.
기다리고 있던 세 사람은 일렬로 서서 면접장으로 들어섰다.
남자 둘, 여자 한 명.
두 명 중 짙은 푸른색 정장을 한 남자의 왼쪽 가슴에 달린 수험표에는 배석대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는데 성형수술로 얼굴을 바꿨으며 신분까지 완전하게 세탁된 유태수였다.
네오는 이미 오늘을 대비해 유태수의 또 하나의 신분을 완전하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돌아가셨지만 배석대에게는 부모님도 있다.
심사관은 모두 세 명이며 남자들이었다.
유태수는 찬찬히 훑어보았는데 알고 있다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사관 세 명은 세 사람이 제출한 자기소개서를 앞에 펼쳐 놓고 있었다.
“김원태 씨. 자기소개 한 번 들어볼까요?”
맨 왼쪽에 앉은 수험생이다.
“안녕하십니까. 전 건설기획업무에 지원한 김원태입니다.”
김원태는 자리에 앉아 자신이 건설 기획업무에 지원하게 된 동기와 나름 그에 관한 여러 공부와 자격증을 취득했음을 강조했다.
김원태의 대답이 끝나자 가운데 앉아 있는 고수미라는 여자에게도 똑같은 질문이 주어졌다.
여자 또한 지원한 부서에 대한 준비와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당당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유태수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그런데 유태수에게는 자기소개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배석대 씨에게 묻죠. 상사로부터 부당한 지시가 내려왔다. 어떻게 할 건가요?”
“합니다.”
순간 나머지 두 명의 심사관까지 놀라는 표정으로 유태수를 바라보았다.
“가정이든 이렇게 큰 대기업이든 상하 위계질서와 명령체계가 분명하게 갖춰져 있지 않으면 흔들리고 동력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상사는 사람을 죽이라고 한다거나 부실 공사를
지시하지는 않습니다.”
업무 안에서 이뤄지는 일이므로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까라면 깐다?”
맨 오른쪽 희끗한 머리의 면접관이 묻는다.
회사 임원 중 한 명인 조성웅이다.
“무조건은 안 깝니다.”
“조금 전 부당한 지시라도 상사의 뜻이라면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살인을 하라고 시킨다거나 부실 공사를 요구하면 거절한다고 했습니다. 그건 절대 무조건 이행해야 하는 일들이 아니죠.”
“가려서 깐다는 것입니까?”
가장 젊은 가운데 면접관이 물었는데 인사팀장 오도석이다.
“사람을 죽이라고 지시할 상사는 없을 겁니다.”
어쨌든 까기는 깐다는 뜻이다.
“자신의 단점을 말해보겠어요?”
“급합니다.”
“다혈질이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까요?”
“아니죠. 그건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갑자기 면접관들의 질문이 유태수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러자 나머지 두 지원자 역시 흘긋 고개를 돌려 유태수를 바라보았다.
대답의 모든 건 아버지 유장풍의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였을 것이다.
모처럼 일가족 모두가 모여 아침 식사를 하는데 회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유장풍은 전화를 받자마자 목소리를 높이더니 버럭 소릴 질렀다.
- 까라면 깔 일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까라면 까라는 말.
그 말은 완전 비수가 되어 유태수의 뇌리 속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그 말을 다시 들었던 건 나이가 들어 군대를 갔을 때였다.
그곳에서는 그 말이 유행하다 못해 넘쳐 범람하는 사회였다.
고참이 좆으로 밤송이를 까라고 하면 까야 한다는 말을 지겹게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