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12화 (12/122)

12화 백 어택 (back attack)

“저요?”

멈칫!

생각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 나타나자 채무령은 당황했다.

“미, 미안합니다. 아는 사람을 닮아서 실례했습니다.”

유태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어떻게 저리도 닮을 수가 있단 말인가.’

걸어가는 모습과 떡 벌어진 어깨에서 뻗어 나오는 기세는 닳고 닳도록 봐왔던 유씨 가문의 막내아들이다.

채무령은 세상에는 닮은꼴이 많다는 걸 떠올리며 다시 유기태가 잠들어 있는 안치단을 향해 걸어갔다.

“후유유!”

한숨이다.

사람 쫓는 전문가들인 국정원까지 나섰다니 머잖아 죽을 것이다.

- 형을 죽일 사주는 절대 아닙니다.

주지 대공 스님의 말이었다.

공부가 깊어 불력이 심후한 대공 스님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유태수가 유기태를 때려 사망케 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대공 스님은 절대 그럴 사주가 아니라고 했다.

- 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지요.

- 스님!

-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겠지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듯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공 스님의 말이 더욱 선명해진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평소 유태수는 공부를 조금 등한시해서 그렇지, 생활 태도는 나무랄 곳이 없었다.

부모의 가슴을 수시로 찔러댄다는 사춘기에도, 또한 뛰어난 학생복서가 되었어도 누구와 싸우거나 다른 재벌집 아이들처럼 말썽 따위는 일으킨 일이 없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형을 죽이고 숙부를 두들겨 팼다는 뉴스에 집안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콩가루 집안.

재벌집 자식들이 다 그렇지 뭐.

늙은 아버지 두 눈 빤히 뜨고 있는데도 회사에서 쫓아내 버리는 족속들 아냐.

인터넷을 통해 쏟아지는 비아냥과 폭언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또 오마. 내 아들.”

채무령은 사진을 한 번 만지고 돌아섰다.

***

바깥으로 나온 채무령은 벤츠에 올랐다.

부우웅!

벤츠가 떠나자 납골당 관리인들의 허리가 일제히 폴더처럼 접혔다.

“남 과장!”

뒷좌석에 앉아 있던 채무령이 입을 열었다.

“예, 사모님!”

남정욱은 룸미러를 이용해 채무령을 바라보았다.

“주량이 어느 정도 돼?”

갑작스러운 질문에 남정욱의 눈이 커졌다.

“저요? 그냥 두 병, 아직까지는 마음먹고 마시면 소주 대여섯 병까지는 소화합니다만?”

“그날 마신 술이 뭐였지? 사건 일어나던 날.”

“발렌타인 30년산입니다.”

“독한가?”

“소주보다는 세죠. 40도 정도 됩니다.”

“먹어봤어요?”

“네! 마셔봤습니다. 손위 처남이 출장 갔다 오면서 공항면세점을 통해 두 병을 사 왔더군요. 처남은 오로지 소주파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날 두 병을 모두 마셨습니다.”

남정욱은 히죽 웃었다.

“자네는 처남 안 때렸나?”

움찔!

남정욱은 순간 흠칫했다.

그제야 채무령이 무엇을 묻기 위해 발렌타인이라는 술 얘기를 꺼냈는지 짐작한 것이다.

“사, 사모님!”

“마음에 두지 말게. 하도 답답해서 해본 소리야.”

채무령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갔을까.

군사경찰이고 국정원이고 유태수에 대한 흔적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채무령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공항이다.

아침 6시 비행기이다.

캐리어를 끌고 가던 유태수는 멈칫했다.

입사 동기, 같이 이라크로 파견 가는 동료들이 모였는데 생각보다 단출한 배웅이다.

유태수는 다른 네 동기의 집안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아직도 옷이 날개라고 믿는다면 부모님들의 행색이 결코 화려하지는 못했다.

그건 경제적 궁핍을 증명한 것이다.

동기 이승수의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울상이다.

혼자서 아들을 키웠다는 걸 지금 알았는데 몹시 긴장되고 불안한 듯 가만 있지를 못하고 서성거린다.

“엄마, 괜찮다니까?”

그런 어머니를 향해 이승수가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 그래.”

어머니는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짓는다.

“무조건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해.”

“함부로 바깥에 나다니면 큰일 난대. 회사 일 끝나면 그냥 숙소에서 꼼짝하지 마.”

차만오의 부친이 다부지게 말했다.

“알았어요.”

대답하는 차만오는 약간 짜증스럽다.

“어! 석대야!”

혼자 걸어오는 태수를 발견하고 동기들이 아는 체를 했다.

“왜 혼자야? 부모님은?”

그러면서 동기들은 주위를 살핀다.

유태수는 빙긋 웃었다.

“바쁘셔서, 나중에 귀국할 때 나오시라고 했어.”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아들이 입사하자마자 해외파견 근무를 나가는데…….”

유태수는 밝게 웃었다.

“제가 나오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이도 아닌 다 큰 아들인데 쪽팔리다고.”

그러면서 씨익 웃었다.

“엄마, 이제 그만 들어가.”

“아빠도 들어가세요. 이제 우리끼리 할 일도 있고.”

동료들은 배웅 나온 가족들을 돌려보냈다.

가족들은 비행기 떠나는 걸 보고 가겠다고 했지만 의논할 일이 있다는 말에 아쉬워하며 돌아갔다.

“커피 한잔해야지?”

S대를 나온 송만술이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커피숍은 3층에 있다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일행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

어제까지의 긴장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동료들 모두 웃고 떠들며 나름대로 이라크 생활을 우아하게 상상하는 듯했다.

“사막도 나름 괜찮다던데, 특히 끝없는 회색의 사막 저편으로 떨어지는 석양은 죽인다더만.”

역시 S대 출신 이승수가 약간 몽롱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그쪽 여자들 죽인다던데.”

K대를 나온 고주식이 마른침을 삼켰다.

“여자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처벌된다는 걸 몰라? 너 껄떡대다 눈구멍 뽑힌다.”

“핫하하하!”

모두가 큰 소리로 웃었다.

유태수는 화장실을 핑계로 잠시 자리를 빠져나왔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와 한참을 걸어가더니 청사 바깥까지 걸어 나와 흡연실로 향했다.

슥!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흡연실에는 백인 여자 두 명과 한국인 남자 한 명이 전부다.

말없이 말보로 레드를 피우던 유태수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정장 차림의 한국인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인 듯 아빠가 우리 수빈이 좋아하는 뽀로로 인형 사 온다고 약속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부욱!

담배를 재떨이에 꽁초를 찍어 누르듯 끈 유태수는 근처 공중전화기로 다가갔다.

그때 귀청을 뚫는 것 같은 소리에 고개를 쳐들자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여객기가 활주로를 이륙하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청사 안으로 들어간 유태수는 공중전화를 찾아 다가갔다.

“흐흠!”

수화기를 들고 카드를 집어넣었지만 번호를 누르지 않는다.

망설이는 듯하더니 수화기를 놓고 밀려 나온 카드를 뽑아 들었다.

툭 튀어나온 카드를 한참 바라보던 유태수는 다시 검지로 밀어 넣고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꿀꺽!

긴장하는 듯 마른침을 삼켰다.

신호가 갔지만 상대는 쉽게 받지 않았다.

끊었다가 한 번 더 걸지만 소용이 없다.

한참 동안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던 유태수는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세 번째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지만 여전히 받지 않는다.

사형수가 되면서 인연, 운명이란 따위의 단어에 관심이 많았다.

갇히면 마음이 약해진다.

더욱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형수들이기에 가장 집착하는 말들이었다.

지금 통화가 되지 않는 것 역시 운명이라 생각하고 끊으려는데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유태수는 귀에 전화기를 대었다.

[여보세요.]

꿈엔들 잊을까.

하루하루 죽음이 가까워져 오면서 모든 걸 비우며 털어내고 잊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 사람만큼은 지워지지 않았다.

상대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너…… 너 태수지? 태수야.]

뜨거운 기운이 훅 올라온다.

갑자기 엄마 하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눌렀다.

[엄마 옆에 아무도 없다. 여기 미술관이다. 어디니?]

타악!

유태수는 수화기를 힘있게 내려놓았다.

꾸울꺽!

그리고 목구멍까지 끓어오르는 열기를 기어이 집어삼켰다.

슥!

전화카드를 뽑아 든 유태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청사를 걸어갔다.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사세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왜 자꾸 가슴은 더 뜨거워지고 눈시울은 붉어지는가.

카악!

감정을 씻기 위해 의도적으로 크게 헛기침을 했지만 마음은 더욱 녹아내린다.

***

“관장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큐레이터 신미경이 소스라쳤다.

소파에 앉아 있던 관장 채무령이 한겨울 나뭇가지처럼 떨고 있었다.

“관장님, 왜 그러세요!”

“아냐…… 아냐!”

신미경은 재빨리 자기 핸드폰으로 119를 눌렀다.

“하지 마! 난 괜찮아.”

채무령은 손을 뻗어 신미경의 119 신고를 제지했다.

“무, 물이나 한 잔 가져다줘요.”

신미경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뛰듯 걸어 나갔다.

잠시 후 신미경은 머그컵에 시원한 냉수를 담아 들어와 건넸다.

부들부들!

채무령은 금방이라도 물컵을 떨어뜨릴 듯 손을 떨었다.

벌컥!

벌컥!

머그컵의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신 채무령이 길게 숨을 쉬었다.

“김 박사님을 부를까요?”

“쓸데없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듯 손 떨림도 잦아들었고 창백하던 얼굴도 조금씩 혈색을 찾았다.

“병원에 안 가봐도 괜찮으시겠어요?”

“신 큐레이터, 그만 나가봐요.”

신미경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선뜻 나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러다 채무령이 다시 쳐다보자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관세음보살!”

땅이 꺼져라 중얼거린다.

아들이다.

단 한마디로 나누지 않았지만 아들 유태수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아들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능력을 지녔다.

핸드폰 단축 번호 하나를 길게 누르자 액정에 남정욱이란 이름이 떴다.

“예, 사모님!”

“남 과장, 지금 어디야? 당장 사무실로 좀 와요.”

채무령은 전화를 끊고 오른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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