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살 놈은 산다(2)
누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린 유태수는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아무리 어둠 속을 노려보았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만 가까워졌다.
벌름!
시력으로 해결이 안 된다면 냄새로 다가오는 사람의 정체를 파악한다.
부지런히 코를 이용해 공기를 들이마셨지만 냄새가 없다.
뚝!
발자국 소리가 멈췄는데 지척이다.
“몸 좀 어때?”
화악!
어둠 속에서 환한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네오였다.
“많이 아프지?”
“지금은 전혀.”
사실이다.
총에 맞아 죽음 직전까지 갔었다.
온몸이 아파져 왔고 과다 출혈로 의식이 혼미해졌다.
더욱 자신을 분노케 한 건 내 목숨을 타인이 쥐락펴락했다는 것이다.
내 목숨의 주인은 나다.
그런 만큼 내 목숨은 내 뜻대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유태수의 의지다.
그런데 실컷 도와주고 뒤통수를 맞았다.
몸이 아닌 마음이 아픈 것이다.
- 세상에서 제일 등신이 뒤 빵 맞는 놈이다.
가훈이라고 여길 만큼 아버지 유장풍이 강조하던 말이다.
“숨을 크게 쉬어 봐.”
유태수는 네오가 시키는 대로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흐흐흡!
후우우!
“한 번 더.”
유태수는 또다시 같은 방법으로 길게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좋아. 완전히 회복되었어. 형은 이제 아주 강해졌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신체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야.”
“내가? 그대론데.”
네오가 밝게 웃었다.
“형이란 사람 참 바보다. 사람 너무 믿지 마.”
피식!
유태수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도마(刀魔)라고 알아?”
도마라는 말에 유태수는 어머니가 부엌에서 파를 썰고 무언가를 자르고 다질 때 밑에 받치는 나무판자를 떠올렸다.
“그것 말고, 칼의 귀신이라는 사람.”
알 리 없다.
“언젠가 삼촌 집에 놀러 갔는데 못 보던 꼽추 노인이 마당을 쓸고 있지 뭐야. 삼촌 집에서 일하는 녀석들은 생전 가장 많은 죄를 짓고 온 독종들이거든, 누구지? 걔도 있어. 독일의
유명한 콧수염 기름 말이야. 아무튼 난 단번에 누구냐고 물었지?”
노인은 대답을 못 했다.
움찔하며 몸을 떨더니 안쪽을 바라보았는데 그곳에는 네오의 삼촌이 기거하는 구전(九殿)이 있다.
“그자는 말을 못 한다. 삼촌이 혀를 잘라 버렸다. 도마라는 친군데 칼에 관한 당할 자가 없는 놈이다.”
멀리서 삼촌의 음성이 들렸다.
“요리에 사용하는 그런 칼은 아닐 테고, 사람 죽이는 칼?”
꼽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나 좀 가르쳐 줘. 그럼 내가 삼촌에게 잘 말해서 너 소원 하나 들어줄 테니까.”
도마의 소원은 밥 좀 배불리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도마에게 배운 칼법.
“형, 내 말 잘 들어. 형의 머릿속에는 도마가 휘두르는 칼법이 기억되어 있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잖아. 칼을 잘 휘두르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 있대.”
그러면서 네오는 몇 가지 방법을 일러 주었다.
가장 먼저 눈이 빨라야 한다(一眼).
두 번째로 발이다(二足).
비록 두 번째이지만 발이 얼마만큼 빠르냐가 강약을 결정한다.
세 번째 배짱(三膽)이 있어야 한다.
죽여야 할 놈은 확실하게 없애야지, 어쭙잖게 칼에 사정을 담으면 곧바로 화(禍)가 되어 돌아온다.
마지막으로 죽을힘을 다해라(死力: 또는 四力).
“행운을 빌어, 형.”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더니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잠시 어둠 속에 누워있던 유태수는 여기가 어딘지 무척 궁금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걸 봐서는 죽었을 수도 있지만, 네오의 도움을 받았으니 저승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려울 것 없어. 그냥 하면 되는 거야, 형.”
네오가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
탁탁!
그때 누군가 뺨을 가볍게 때렸다.
유태수는 깨어나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갑작스런 빛에 이마를 찡그리며 조심스럽게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소독약 냄새.’
가장 먼저 천장에 걸린 형광등을 봤고 두 번째로 코끝을 파고드는 소독약 냄새를 맡는다.
“정신이 듭니까?”
처음 듣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흠칫!
유태수는 깜짝 놀랐다.
한 사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인 사내.
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렸고 구레나룻이 얼굴을 덮었다.
그런데 사내의 눈동자가 특이했다.
빨갛다.
아니, 차라리 핏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붉었다.
‘혈안(血眼)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야말로 핏빛 눈동자를 갖고 있는 백인 사내.
유태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누워 다시 한번 좌우로 고개를 돌렸는데 자신은 분명하게 병실에 누워 있었다.
‘조금 전 네오와 있었던 일은?’
유태수는 입술을 물었다.
네오와의 일은 자신이 깨어나지 못한 상태, 즉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 벌어졌고 지금은 정신을 차려 깨어난 것이다.
“맥박, 혈압, 모두 정상입니다.”
의사로 보이는 사내가 가볍게 한 번 웃더니 병실을 나갔다.
유태수는 팔로 침대를 짚으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손에 링거 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모술의 어느 병원으로 보인다.
“미스터?”
“배석대.”
“배석대 씨 편인가 봅니다.”
유태수가 무슨 말이냐는 듯 백인 사내를 바라보았다.
“난 운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하늘이 찍었느냐 외면했느냐. 배석대 씨처럼 극적으로 구출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이라고 하죠. 하지만 절대 운이 아닙니다. 하늘이 배석대 씨를
살려 주기 위해 나를 그 시간에 그 장소에 보낸 것입니다.”
유태수는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자화자찬하는 건가, 아니면 자신의 생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건가.
어쨌든 사내의 말처럼 대부분, 그중에서도 한국인들은 지금과 같은 이런 극적 반전이 이뤄지면 천운이라는 표현을 쓴다.
운이 좋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운 좋은 놈한테는 안된다는 말도 있다.
그러면서 야구의 예를 든다.
제대로 맞아 나간 타구가 야수의 정면으로 날아가 잡힌다.
반면 빗맞은 타구가 수비수들 사이로 툭 떨어져 안타가 될 때가 있다.
후자의 경우를 실력이라 말할 수는 절대 없다.
그런 걸 운이라고 한다.
그런데 백인 사내는 그 모든 건 운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라고 해석했다.
불현듯 기독교 관계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인 사내의 이름은 코헨.
나이는 서른아홉이라고 했다.
국적은 미국.
보나 마나 CIA 쪽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사냥꾼이죠.”
사냥꾼이라는 말에 유태수는 곧장 사막의 치타를 떠올렸다.
요르단이나 바레인, UAE 등지에서 치타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부호들이 많다.
그들이 키우는 치타의 대부분이 아프리카 종이다.
하지만 이란을 중심으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산악지역에서 사는 아시아 치타는 부르는 게 값이다.
아프리카 종보다 훨씬 전염병에 강하고 자연환경이 같기 때문에 뛰어난 적응력을 보인다.
멸종 위기종으로 밀렵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데도 워낙 거액에 거래가 되다 보니 밀렵이 성행한다.
“한 마리 잡으면 얼마씩 받습니까?”
유태수는 호기심을 보였다.
“한 마리?”
코헨이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몸값이 천차만별이어서.”
그럴 것이다.
같은 치타라고 해도 어린 개체는 길들이기가 더 쉬울 테니 고가에 거래될 것이 뻔했다.
의사는 이삼일 더 병원에 머물면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유태수는 환자복을 벗고 아직 피가 묻어 있는 군복 바지에 회사 작업복을 걸쳤다.
툭!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시간 전쯤 나간 코헨이 들어섰다.
“배석대 씨?”
코헨의 표정이 다소 굳어 있었다.
스윽!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건네주었다.
코헨이 건네주는 신문을 받아 펼친 유태수는 깜짝 놀란다.
모술에서 발행되는 비카우란 신문인데 자신의 기사가 한쪽 귀퉁이에 조그맣지만 분명하게 나와 있었다.
「한국인 근로자 또다시 실종, 이번엔 북한 보위부 소행으로 판단」
유태수는 인상을 굳히며 기사를 읽었다.
내용은 제목 기사 그대로였다.
한국 대사관 직원으로 위장한 북한 보위부 요원 둘이 태천건설 근로자 배석대를 납치하여 데려갔다는 것이다.
“내가 북한 보위부에 끌려가? 하하하하하하하하!”
유태수는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군,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야. 우리 아버지, 흐흐흐흐.”
조금씩 웃음이 사라진다.
그리고 어느새 얼굴은 돌덩이가 되었다.
의식을 잃었던 지난 이틀이란 시간 동안 자신의 운명이 완전히 뒤틀려 버린 것이다.
***
코헨이 살고 있는 집을 보며 유태수는 깜짝 놀랐다.
집이라기보다는 저택이었는데 이층 대리석 건물이며 놀라운 건 멀리 티그리스강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강을 바라보는 집.
넓은 정원은 대추야자 나무를 비롯한 포플러와 소나무 등이 빼곡했고 마당은 관리 소홀로 잡초가 보였지만 잔디가 깔려 있었다.
코헨은 미국과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라크 집권당인 바트당 고위 간부가 살던 집이라고 했다.
코헨은 이 넓은 집에 혼자 살고 있었다.
1층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선 유태수가 멈칫했다.
하나의 물건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독수리 한 마리가 세 갈래로 갈라진 수평 삼지창에 걸터앉아 권총을 움켜쥐고 있는 황금빛 휘장.
‘설마, 씰 트라이던트?’
미국의 가장 강력한 특수부대 네이비 씰을 상징하는 휘장이 분명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전투복 차림으로 적과 교전하고 있는 코헨의 모습이 담긴 사진 여러 장이 벽에 걸려 있었다.
“아주 오래전 일들입니다.”
코헨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하면서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커피 머신을 돌려 원두를 갈고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유태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을 둘러보았다.
‘헤클러 운트 코흐(Hecker & Koch; HK) 416.’
한쪽 벽에 총 한 자루가 걸려 있었는데 영화 속에서만 봤던 HK-416이 분명했다.
“저것 진짭니까?”
유태수는 피식 웃었다.
왠지 모양새가 안 나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직접 보세요.”
유태수는 총이 걸려 있는 벽으로 걸어갔다.
탁!
걸린 총을 거머쥐고 살피는데 묵직했다.
진짜다.
“책상 서랍을 열면 탄창도 있습니다. 직접 쏴보시면 장난감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겠죠.”
스르륵!
밑에 있는 책상의 서랍을 열자 정말로 30발들이 박스 탄창이 있었는데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가득 들어 있다.
유태수는 탄창을 집어 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코헨은 커피 내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아무리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하지만 뭘 믿고 자신에게 이런 고성능 자동소총을 만지도록 허락하는 걸까.
설마 목숨을 구해줬으니 자신에게 절대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걸까.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기는 게 세상 인심이다.
철컥!
노리쇠를 당긴 후 탄창을 쳐올렸다.
타악!
뒤로 당겨진 노리쇠를 앞으로 민다.
퍽!
노리쇠가 전진하면서 약실에 한 발을 물고 들어갔을 것이다.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은 나간다.
유태수는 다시 한번 코헨을 바라보았다.
피식!
그러다 실소를 지었다.
자신은 잠깐이지만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갈등을 했는데 코헨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사람 완전 쪽팔리게 만드는군.’
유태수는 이내 탄창을 뺐고 노리쇠를 당겨 약실에 들어 있는 한 발의 실탄을 꺼내 탄창에 눌러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