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 사내(2)
덜컹!
안에서 문이 열렸다.
“오랜만에 봅니다.”
훤칠한 키의 미녀가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요즘 유장풍이 푹 빠져 있는 영화배우 진미류다.
“뭔 일인데 여기까지 왔어?”
유장풍이 가벼운 복장으로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말씀 나누세요.”
진미류는 조용히 이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회사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는 성품 때문에 유장풍이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스윽!
오도석은 곧바로 품에 넣고 온 편지를 건네주었다.
“뭐야!”
편지지를 받아 내용을 살핀 유장풍의 눈이 가늘어진다.
“무슨 뜻이야?”
“이라크 프로젝트에 대한 언급 아니겠습니까?”
팍!
찻잔을 들어 올리던 유장풍이 얼마나 놀랐는지 잔을 떨어뜨리자 산산이 깨졌다.
오도석이 재빨리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가 행주를 가져와 닦았다.
그때 2층 계단을 빠르게 내려온 진미류가 깜짝 놀라며 내려왔다.
“다치지 않으셨어요?”
진미류는 쓰레기통을 가져와 깨진 찻잔 조각을 주워 담았다.
“정말, 다친 곳 없어요?”
“됐다!”
진미류는 다시 한번 유장풍의 손과 발을 손으로 만지며 살피더니 잠시 후 다른 잔에 홍차를 담아왔다.
그리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어떤 놈이야? 배덕용? 자네 알아?”
“전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뭐 하는 곳이야?”
“제가 오면서 알아봤는데 참꼬막이 유명한 남도 끝자락에 있는 조그만 읍입니다.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만큼 한때는 거칠기로 유명했더군요.”
“주먹 자랑?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군.”
유장풍은 편지지를 예리한 눈으로 쏘아보았는데 조금씩 표정이 싸늘해져 갔다.
“회사에서 근로자들을 죽였다고 들었습니다.”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리며 읽던 유장풍이 입을 열었다.
“자넨 무슨 뜻으로 보나?”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 사건을 어떻게 알아? 일급 보안 사항을 말이야.”
“저도!”
유장풍은 다시 한번 편지 내용을 보더니 단호히 말했다.
“당장 가봐!”
“예!”
“배덕용이란 놈이 누군지 알아봐. 무슨 뜻으로 이런 괴상한 편지를 보냈는지 말이야.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야.”
만약 이라크 쪽 사건이 발설되면 끝장이다.
국정원과 태천그룹 차원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었고 언론에는 납치범들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발표됐다.
회사는 깊은 유감을 표하면서 유족들에 대한 보상도 마무리했다.
꽈직!
유장풍은 편지지를 강하게 거머쥐었다.
진미류가 다가온다.
코끝으로 아카시아 향이 살짝 스치면서 젖은 목소리로 묻는다.
“왜요?”
진미류의 손이 유장풍의 왼손을 슬며시 잡아갔다.
유장풍의 오른손에는 여전히 오도석이 놓고 간 편지지가 구겨진 채 쥐어져 있었다.
“누가 회장님을 불편하게 하는 거죠?”
살며시 어깨에 뺨을 기댄다.
“장애물은 치워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근심거리를 없애 버리면 간단한 것을.”
팟팟!
유장풍의 눈이 빛난다.
맞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방식이다.
장애물은 치우면 간단한 것 아니던가.
“이제 보니 네가 나보다 낫구나. 헛헛헛!”
유장풍은 큰소리로 웃으며 진미류를 팔로 끌어안았다.
***
승용차 한 대가 벌교읍에 들어섰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 주소를 찍었기 때문에 벌교까지 오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는 계속 이어졌고 읍내를 벗어나자마자 오른쪽으로 고읍리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우회전하여 500여 미터 정도 들어가자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만그만한 단독 주택이 있고 한쪽으로 야트막한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딸칵!
오도석은 차를 길가에 세우고 내렸다.
운전석 문도 열렸고 서울서 운전을 해왔던 육동춘은 태천그룹 계열사 중 한 곳인 보안회사 태천 티원(T1) 소속의 직원이다.
올해 서른여섯으로 특수부대 출신이며 태천 티원에 스카우트되어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주소를 찾아가던 육동춘이 말했다.
“인사팀장님, 성당인데요?”
“어, 그렇네!”
오도석도 놀란 표정이다.
편지 봉투에 적힌 주소는 고읍리 성당이었다.
설마 성당일까 싶어 두 사람은 근처 골목 골목의 주소를 하나씩 훑었다.
하지만 편지 봉투에 쓰인 주소 고읍로2길 11은 성당이다.
두 사람은 다시 성당 입구로 돌아왔다.
시골 성당은 조용했다.
성당 입구 왼쪽으로 성모 마리아상이 있고 그 앞에는 누가 가져다 놓은 듯 장미꽃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유리 상자 안에는 촛불 몇 개가 켜져 있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간단한 차림에 손에 목장갑을 낀 쉰 중후반가량의 사내가 물었다.
노숙자.
사내는 서울역 지하도에서 네오의 명령을 받아 유태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배달부였다.
“여기 주소가 고읍로2길 11 맞습니까?”
“맞아요.”
순간 오도석의 눈이 빛났다.
성당 사제로 보이지는 않는다.
“난 이곳 성당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만 어디서 오셨습니까?”
“성함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배덕용이라고 합니다만?”
배덕용이라는 말에 오도석의 표정이 굳어진다.
“이것 당신이 보낸 것 맞죠?”
그러면서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뭡니까?”
편지 봉투를 받아 보던 배덕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소지와 내 이름은 맞습니다만 우린 누군가에게 할 말이 있으면 전화로 하는 편인데.”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인다.
***
두 사람은 성당을 나와 근처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읍내에 땅거미가 몰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커피를 놓고 앉아 잔뜩 무거운 얼굴만 할 뿐 특별한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육동춘은 말로만 아메리카노라고 하면서 가져다 놓은 맛없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성당에서 일하는 직원이라고 보기에는…….”
배덕용은 성당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관리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을 향해 웃는 건지 비아냥거리는 건지 모를 모호한 미소를 가끔 지었다.
오도석은 잔을 들어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구출을 빙자해 회사에서 근로자들을 죽였다고 들었습니다.’
현지에서도 납치범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보도된 사건이 어떻게 한국에서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엄청난 사건이다.
잘못되면 발칵 뒤집힐 대형 악재다.
도저히 이대로 유야무야 넘어갈 일은 절대 아닌 것이다.
“다시 한번 가보자고.”
두 사람은 어둠을 이용해 성당을 재차 방문하기로 했다.
***
고읍성당 주임신부 오귀화 라우렌시오 신부는 사제관 벽에 걸려 있는 십자고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오늘 하루를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기도 중이다.
캄캄한 방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묵상하던 오귀화 신부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고요함 속에 뭔가 들려온다.
작은 소리는 밤바람이 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이 자신을 찾아오는 소리는 더욱 아니다.
시골 성당이라고 하여 도난 사고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도난 사고를 예방하겠다고 성당 문을 잠가 놓을 수도 없다.
하느님의 집은 누구든지, 언제 어느 때라도 들어올 수 있어야 한다.
성당은 신자든 아니든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려 하느님께 기도하며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은 미사 예식에 사용되는 제기들이다.
누군가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성체 성혈을 모시는 그릇이 금인 줄 알고 훔쳐 간다.
사제관을 나온 오귀화 신부가 뒷문을 통해 성당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흠칫했다.
뒷문을 자신보다 먼저 열고 나오는 이들이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가 성당 안을 뒤지고 후문으로 나오는 것이다.
너무 급작스런 만남에 양쪽 모두 서로를 마주 볼 뿐 누구냐고 묻지도 못했다.
탁!
오귀화 신부가 입구 벽에 붙은 스위치를 올렸다.
불이 켜지면서 서로의 얼굴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오귀화 신부는 상대가 좀도둑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옷차림에서 확인한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저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신부님!”
그때 성당 뒤쪽 골목을 따라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낮에 만났던 배덕용이었다.
“베드로 형제님!”
오귀화 신부가 눈을 치켜떴다.
가까이 다가온 배덕용이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오귀화 신부를 향해 말했다.
“신부님은 들어가시죠. 내 손님들입니다.”
오귀화 신부는 양쪽을 번갈아 살피듯 보더니 왔던 길을 돌아 사제관으로 사라졌다.
“뭘 알고 싶습니까?”
배덕용이 물었다.
“당신이 보낸 편지 맞소?”
오도석의 질문에 배덕용이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그 주소지에 사는 배덕용은 나 혼자뿐이오.”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자신이라는 뜻이다.
“구출을 빙자해 회사에서 근로자들을 죽였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알면서 그러시오.”
배덕용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더니 불을 붙였다.
그리고 성당 건물 옆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당신들, 세상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배덕용은 낡은 벤치에 주저앉았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오도석이 빛나는 눈으로 노려본다.
히죽!
배덕용이 오도석을 보며 웃었다.
“찾아온 걸 보니 켕기는 것이 있긴 한 모양이군요.”
“무슨 개소리야!”
침묵하고 있던 육동춘이 버럭 하며 다가섰다.
“당신 정체가 뭐야?”
부욱!
배덕용은 땅바닥에 담뱃불을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분께서는 지금 기회를 주는 것이오. 유장풍 회장님이 대한민국(Korea) 청소 대상자(cleaning target) 베스트(Best) 1위의 지위를 상실하도록 말이오. 좀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고 있단 말입니다.”
배덕용이 돌아서서 걸어간다.
“거기 서!”
“육 팀장!”
쫓아가는 육동춘을 오도석이 불러 세웠다.
그 사이 배덕용은 캄캄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차량 한 대가 고속도로 IC를 막 통과하고 있었다.
육동춘이 핸들을 잡은 벤츠는 차량 통행이 뜸한 남도의 고속도로를 총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뒷좌석의 오도석은 굳은 얼굴로 불빛 한 점 없는 창밖의 벌판을 바라보았다.
이따금씩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뱉는 것이 뭔가 고민이 깊은 모양이다.
심각한 일이다.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이번 사건을 도대체 시골 촌구석 성당 관리원이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 그분께서는 지금 기회를 주는 것이오. 유장풍 회장님이 대한민국(Korea) 청소 대상자(cleaning target) 베스트(Best) 1위의 지위를 상실하도록 말이오. 좀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고 있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
유장풍 회장이 청소 대상자라는 말속에 담긴 건 뭔가.
“으음!”
또다시 신음을 흘린다.
- 작은 구멍을 우습게 보지 마. 무시해도 될 것 같은 보잘것없는 구멍의 물이 나중에 보(堡)까지 터뜨리는 강물이 되는 거야. 그래서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말이 있는
것이고. 내 말 명심들 해.
유장풍의 말이다.
‘배덕용.’
성당 관리인이라고 보기에는 오도석과 육동춘을 대하는 행동과 말투가 너무 자연스럽다.
이른바 벤츠를 타고 온 정장의 낯선 사내들에 대한 약간의 흔들림이나 기가 꺾이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부우웅!
차는 어둠 속으로 빨리듯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