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시작되는 쩐의 전쟁(1)
350만 달러다.
한화로 계산하면 대략 50억이 조금 못 된다.
꿀꺽!
비로소 자신이 엄청난 거금을 벌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사람을 현상금을 내건 주인, 즉 CIA에 넘겨줄 때까지는 긴장해야 한다.
코헨이 차를 몰고 왔다.
머리에 빙 둘러 압박붕대를 감았고 지혈제를 뿌렸다는데도 어깨에서는 핏물이 조금씩 흐른다.
더운 날씨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붕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상처 회복에 좋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상처가 훨씬 크고 깊다.
“이 인간 맞나.”
그런 몸으로도 차에서 내린 코헨은 라피끄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찍어!”
손바닥만 한 핸드폰 비슷한 기계를 내밀고 오른손 검지를 찍으라고 했다.
라피끄가 머뭇거리자 기계로 머리를 찍는다.
빡!
“찍으라니까.”
간이 지문 조회기라고 했다.
CIA에서 확보한 지문이 저장되어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80퍼센트 이상의 적중률이라고 했다.
콱!
라피끄의 손가락을 꺾듯 잡아당겨 지문 조회기에 댄다.
반짝!
반짝!
빨간불이 깜빡거렸다.
“흐흐! 자식, 반갑다.”
코헨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는데 그건 정확하다는 뜻이다.
코헨은 포드 익스플로러 트렁크에 코헨을 싣더니 수갑과 족쇄까지 채웠다.
총상까지 입은 환자인데 그러기까지 해야겠냐고 한마디 하려다 유태수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살고자 생면부지의 여인에게 총구를 들이댄 사내다.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한 투쟁도 아니고 오직 자신들의 종교적 이상향을 위해 피비린내를 풍기는 구제 불능의 집단일 뿐이다.
***
대추야자 나무 몇 그루와 아카시아 나무가 썰렁하게 서 있는 압불루 공원이다.
전쟁 이전에는 상당히 가꿔진 공원이었지만 IS의 학살이 벌어지면서 돌아온 사람들은 공원에 불을 질렀다.
죽은 자의 안식을 위한 기도 의식이었다.
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랭글리 놈들답군.”
라피끄를 잡았다고 전화를 했더니 하고 많은 장소 놔두고 썰렁한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정보원들의 생존술의 한 모습이다.
실내는 바로 지척에서 누군가 변장하여 대화를 엿들을 수도 있고 아니면 테러가 가해졌을 때 대피가 곤란하여 피해가 커진다.
반면 툭 터진 이런 곳에서는 대화가 옮겨질 이유도 없고 테러가 가해진다고 해도 즉각 응전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 있다.
끼익!
차가 멈추고 유태수와 코헨이 내렸다.
차가 일으킨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나는 가운데 사이먼과 폴이 손을 내밀었다.
앞서가는 코헨과 악수를 하지만 둘 모두 시선은 유태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역시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어.”
척!
유태수의 손을 잡으며 사이먼이 한마디 건넸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단 말이오?”
“동양에서는 관상을 보면 그 사람의 운명을 읽을 수 있다는데 인디언 속담에 ‘독수리는 절대 풀을 먹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지.”
유태수가 이 바닥에 발을 딛을 줄 알았다는 말이다.
“운명은 과학이지.”
“배석대 씨.”
폴이 다가오더니 말보로 레드를 꺼내 한 개비 건넨다.
씨익!
유태수는 담배를 받으며 웃었다.
이미 자신의 흡연 취향까지 파악하고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자신과 거리를 좁히고 싶다는 접근의 의지다.
딸칵!
라이터 불까지 붙여준다.
“그날 이후 우린 한 번도 당신이 납치당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소. 미안한 얘기지만 우린 누구보다도 태천그룹의 유장풍 회장을 잘 알죠.”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유태수는 살짝 눈을 치켜떴다.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 지구상에서 가장 감각이 발달해 있는 사람들이 몰려 있다고 불린다.
그들의 눈과 귀는 지구촌을 24시간 지켜본다.
빈 라덴도 일찍 제거할 수 있었으나 정치적 이유와, 조직 내 알력으로 계속 밀려났고 결국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 정리가 됐다.
그들의 표적이 되면 결코 누구도 살아나지 못한다.
다만 CIA의 표적이면서도 아직까지 살아 있는 상대들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북한의 김정일이다.
“유장풍 회장은 뛰어난 장사꾼이오.”
“진심입니까?”
유태수가 눈을 좁혔다.
“뛰어나다는 표현을 잔인함으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니오?”
흠칫!
폴은 물론 사이먼까지 놀란 표정을 했다.
맞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유장풍 파일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잔인한 장사꾼 Top 10에 들어가 있다.
그에게 상도(商道)란 없다.
“우린 태천건설 노동자 사망 사건도 자작극으로 판단하고 있소.”
후우!
유태수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더니 차로 걸어갔다.
덜컹!
트렁크 문을 연 유태수가 뭔가를 끌어당겼다.
쿵!
하는 소리가 들렸고 먼지가 피어난다.
사이먼과 폴이 다가와 땅바닥에 구부리고 있는 라피끄를 내려다보았다.
퍼억!
폴이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새우처럼 구부리고 있던 라피끄가 하늘을 보고 누웠다.
찰칵!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고 잠시 후 화면에 그래프 하나가 떴다.
0퍼센트에서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100을 채운다.
“백 퍼센트 일치합니다.”
폴이 사이먼을 보고 말했다.
“내 계좌에 150만 달러, 미스터 배에게 나머지 350만 달러를 주시오.”
코헨이 말했다.
사이먼은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더니 유태수를 바라보았다.
“배석대 씨, 내가 잘 아는 양고기 전문 식당이 있소. 오늘 저녁을 같이하고 싶습니다.”
“통장에 돈은 언제 들어오는 거요?”
이미 코헨을 통해 뱅크 오브 아메리카 계좌를 건네주었다.
“확인해 보시오.”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코헨이 핸드폰을 보며 웃었다.
“이 맛이야. 랭글리가 한 가지 잘하는 게 있어. 일이 끝나면 칼같이 돈을 보내준단 말이야. 군소리 없이.”
유태수도 핸드폰을 보고 눈을 크게 뜬다.
350만 달러가 들어왔다.
보낸 이는 워싱턴에 본사를 둔 ‘로저스’라는 자동차 배터리 제조 회사다.
CIA 자금이 민간회사 이름으로 입금된다는 건 정보기관의 자금 흐름을 노출하지 않으려는 편법일 것이다.
“몇 시에 볼까요?”
한순간 억대 부자가 되었는데 못 만날 이유가 없다.
***
맛있다.
한국에서 맛보던 양고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기름을 거의 태우다시피 한 바비큐였는데 말 그대로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간다.
불현듯 소주 한잔이 생각났지만 맥주 말고는 없다.
아쉬운 마음에 맥주를 한 모금 했지만 소주만큼 쏘는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배석대 씨.”
사이먼이 정색했다.
“우리 파트너십을 한 번 맺어 보는 것이 어떻겠소?”
뚝!
고기 한 점을 입속에 넣으려던 유태수의 동작이 멈췄다.
***
뜨거운 커피가 목구멍을 태울 듯 타고 넘어간다.
사이먼 일행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유태수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커피가 그다지 쓰지 않은 걸 보면 기름기 많은 양고기를 먹고 난 뒤임은 분명해 보인다.
CIA와 파트너십.
전혀 생각도 못 한 제안이었다.
무소불위.
전지전능.
미국 대통령도 마음먹은 대로 요리한다는 정보기관에서 일을 하자고 제안해 왔다.
코헨은 말한 대로 CIA 레드 요원이다.
오래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지금 가장 시급한 건 자금과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막강한 힘이다.
그런 면에서 CIA는 후자, 즉 충분한 힘이 된다.
- 조건이 있소.
유태수는 사이먼을 향해 분명하게 말했다.
- 날 블루 배저(Blue Badger)로 채용하시죠. 난 레드 배저 따위는 관심이 없으니.
계약직(레드 요원)이 아닌 정규직을 요구한 것이다.
코헨을 통해 정보기관의 습성을 소상하게 전해 들었다.
- 그들이 지닌 가장 뛰어난 기술이 뭔지 아는가? 흐흐, 바로 버리는 거지.
CIA 정보원으로 활동하다 시체로 발견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을 돕다 반대 조직에게 죽은 것도 있지만 최소한 70, 80퍼센트는 CIA의 짓이라고 했다.
살인멸구(殺人滅口).
자신들의 정보원이 적에게 붙잡히거나 정체가 탄로 나면 미국 정부 보호 차원에서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 그래서 난 스스로 레드 배저를 원했지.
어차피 쓰고 버림당할 것이라면 처음부터 각오하고 시작하자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CIA 정식 요원이 아니므로 돈이다 싶으면 잔인할 정도로 달려들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웃어도 의심하고, 담배를 피워 물어도 저것이 혹시 자신을 죽이려는 어떤 신호나 암호 아닌가 경계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불안하지만 자신이 자처한 일이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이잉!
탁자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울린다.
흘끔!
유태수는 벽시계를 보았다.
현지 시간 밤 11시가 막 넘어가고 있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딱 두 명이다.
하나는 한국에 있는 배달부, 그리고 다른 한 곳은 오늘 저녁을 같이했던 CIA다.
확!
정확히 맞았다.
사이먼이다.
“배석대요.”
[우리도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유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말해 보시죠.”
[태천그룹에 총을 겨눌 수 있겠소?]
유태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외교와 첩보전에서 동맹 따위는 없다.
즉 CIA 같은 국가기관이라면 한국이란 나라를 배신할 수 있느냐고 물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민간 기업을 정조준하고 있다.
꿀꺽!
긴장과 흥분이 동시에 온몸을 휘감는다.
긴장은 도대체 세계 최대 정보기관이 왜 한국 최고의 재벌기업을 노리는 것인가였고, 흥분은 하필 그들의 표적이 아버지 유장풍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문득 고사성어 한 마디가 떠오른다.
이 또한 아버지 유장풍이 가끔씩 쓰는 말이다.
-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감히 청하지는 못하였으나 본래 바라고 있던 바라는 뜻이다.
사업 초창기에 때려죽이고 싶은 놈이 있는데 때마침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자신도 모르게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는 말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심성이 웬만큼 짐승에 가깝지 않고서는 아들 앞에서 뱉어낼 수 없는 말이었기에 아직도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했고 떠올릴 때마다 온몸에 한기가 돈다.
혹시 태천그룹이 방위산업에 대한 극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럽시다.”
[태천건설과 응어리가 있잖습니까. 흐흐흐.]
유태수는 슬쩍 웃었다.
응어리가 아니라 피 끓는 사연이 있다.
[내일 10시 모술 시청 앞에 보면 마르반이라는 커피숍이 있죠. 거기서 봅시다.]
유태수는 흔쾌히 응하면서 몇 마디 더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
딸칵!
그때 외출했던 코헨이 들어왔다.
“얘긴 잘됐나?”
“코헨, 당신은 한 가지 고약한 버릇이 있소.”
“고약한 버릇?”
“알면서 묻는 거요. 당신은 이미 내 입장이 어떻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얘기가 잘됐냐고 묻는 심보는 뭐요? 내가 선택할 길이라는 것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걸 알잖소.”
히죽!
코헨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직업병일세. 알면서 상대를 살짝 떠보는 것 말이야.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앞으로 자네도 그렇게 될걸세.”
상대를 떠보는 것만큼 당사자에게는 불쾌한 일이 없다.
그건 지독한 모욕인 것이다.
“난 블루 배저, 그쪽은 태천그룹에 대한 사냥을 원했소. 속 시원합니까?”
“푸훗! 그럴 줄 알았지.”
화아악!
그럴 줄 알았다는 코헨의 말에 유태수가 눈을 치켜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