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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벌집 청소부-32화 (32/122)

32화 맞짱(2)

쭈욱!

마지막 한 모금까지 마신 배달부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어 말했다.

“누구도 최호민 씨의 핸드폰을 들여다보지 못할 것입니다. 마음 놓으시오.”

배달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 있는 표정이다.

“존함이?”

유태수로부터 자세한 설명이 없었다.

또한 쉬운 일이 아닌데 너무 간단하게 대답했으므로 정체에 대해 궁금증이 일어난다.

“배달부라고 하지 않았던가.”

“배 씨에 이름이 달부?”

“이름이야 어떻든 그게 무슨 의미인가. 중요한 것은 우리 서로 격의 없이 진심을 교류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소?”

“맞습니다만.”

최호민은 배달부를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에게는 고유의 기운이 있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듯 풍기는 기세 역시 각양각색인 것이다.

그런데 배달부는 조금 이상했다.

냉기.

입으로 말은 하고 가끔씩 웃기도 하지만 인간미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등골이 오싹하기도 하고, 아무튼 기이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꼭 시체와 앉아 있는 느낌이다.

***

모술 하트라 호텔로 한 사내가 들어섰다.

검은 머리에 약간 까무잡잡한 동양인으로 연한 블루 계열의 정장이다.

사내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1층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모술은 IS의 마지막 저항지이기도 하여 다른 어느 이라크 지역보다 파괴의 정도가 심하다.

당시 이곳 하트라 호텔은 세계에서 몰려든 언론사들의 총본부였기도 하여 호텔 곳곳에 당시의 흔적이 사진과 그림으로 남아 있다.

커피숍 안은 거의 현지인들이다.

가끔 백인들도 보이지만 이라크 재건을 위해 들어온 민간 기업들의 관계자들이다.

멈칫!

몇 번을 둘러본 끝에 찾았다.

처음에는 여기 현지인인 줄 알았다.

머리에 먼지를 얹은 것 같은 사막색 터번을 두르고 앉아 있는 사내.

머리에 두른 터번으로 인해 얼굴 확인을 분명하게 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기도 했지만 묘한 느낌이다.

헐렁한 검은색 바지에 쥐색 긴팔 재킷을 걸치고 군화를 신고 있었는데 누구보다도 한가롭게 창밖을 보여 홀로 커피를 마신다.

“미스터 배?”

사내는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버트 설?”

“그렇소.”

“어서 오시오.”

유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한국 이름 설태왕.

이민 3세로 올해 나이 서른일곱, 컬럼비아 대학 경영대학원을 졸업 했으며 투자의 살인자로 불리는 레이 달리오가 창업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에서 펀드 매니저로 활동 중이다.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헤지펀드로 운용자금이 1,500억 달러(한화 약 200조 원)로 알려진다.

사이먼에게 M&A나 펀드 분야의 전문가를 한 사람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지금 눈앞의 설태왕을 보낸 것이다.

커피를 마시는 설태왕을 보는 유태수의 눈이 좁혀졌다.

사이먼 개인이 보낸 인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사와 CIA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설태왕은 레이 달리오의 측근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뭘 그렇게 측량하듯 보는 것이오?”

유태수의 시선이 조금은 불편한 모양이었다.

유태수는 웃음을 지었다.

“무조건 의심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탓에 말이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지금 무조건 의심하라고 했소? 누가 그렇게 가르쳤단 말이오?”

유태수에게 그런 비정한 방법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 유장풍뿐이다.

그런데 설태왕이 놀라는 모습으로 묻는 건 또 한 사람이 그런 말을 귀가 아프게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의심하게. 누구든 일단 의심하면서 만나고 헤어지면 절대 손해는 없지.

입사하고 레이 달리오와의 면담에서 그가 가장 많이 꺼냈고 강조했던 말이었다.

의심하라.

상대든 나든 누군가에게 의심을 받고 의심을 한다는 건 즐거운 일일 수는 없었다.

가족이든 친구든 만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심한다는 건 어쩌면 병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펀드 매니저 레이 달리오 입에서 나온 말인 이상 병은 아니다.

투자가의 말은 본인의 경험에서 나온다.

즉 믿지 않았기 때문에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라는 큰 펀드 회사를 차렸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소?”

유태수는 빙긋 웃을 뿐 누구라고 말해주지는 않았다.

“재밌군요. 가르침을 받았다는 걸 보면 부모거나 아니면 학교 선생님일 가능성이 큰데?”

유태수는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바꾼다.

“연봉이 얼마요? 회사에서 받는 돈 말이오. 보너스까지 포함해서.”

느닷없이 연봉을 묻자 설태왕의 눈이 좁혀졌다.

돈은 살아 있는 모든 이에게 가장 관심사인 종목이다.

돈은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잣대다.

연봉이 높거나 재산이 많으면 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후룩!

갑자기 소리를 내어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다시 한번 유태수를 빤히 보았는데 의도를 파악하려는 모양이었다.

상대의 연봉을 묻는다는 건 결례일 수 있다.

한마디로 당신 똑똑한지 멍청한지 좀 들어 보자고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120만 달러요.”

굉장한 액수다.

펀드 매니저라는 직군을 일반 대기업 사원들과 동일선상에서 놓고 봐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70, 80만 달러가 평균이라고 들었는데 120만 달러면 회사 내에서도 꽤 인정받는

모양이었다.

“세후?”

“빌어먹을!”

세금 얘기가 나오자 설태왕은 주저앉고 투덜거렸다.

“쳐죽일 놈들, 가만 놔두면 내 주머니 속 먼지까지 털어갈 거야.”

“절반은 안 되겠지만 대충 세후 70만 달러로 보면?”

침묵하는 것이 수령액이 세금 떼고 그 정도 된다는 뜻이다.

“그 정도 액수면 생활 수준이 어느 선에 머무릅니까?”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9억이 조금 넘는 돈이다.

한국의 9억도 크지만 미국의 70만 달러는 더 크다.

유태수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50만 달러를 주겠소.”

홱!

커피를 마시기 위해 숙였던 설태왕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지금?”

두 눈이 시뻘겋게 타오르는데 금광을 발견한 탐사가의 표정이다.

“당신과 일하는 대가로 내 연봉을 50만 달러 주겠다는 것이오?”

“당신과 나 모두 의심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니 실제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 말고는 긴말이 필요치 않겠지요. 미국 정부에 들키지 않고 쏠쏠하게 꺼내 쓸 수 있는 계좌번호

있으면 지금 보내시오.”

왜 없겠는가.

있다.

숨기지 않으면 죽어라 돈 벌어 IRS(Internal Revenue Service: 미 연방 세청) 놈들에게 바치고 말 것이다.

‘죽음과 세금은 피하지 못한다.’

미국인들이 자주 뱉는 자조 섞인 한탄이다.

갱스터를 잡아 마약 판매 혐의로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세금 탈루 혐의로 처넣는다.

설태왕의 눈이 매서워진다.

사흘 전 출근하자마자 레이 달리오에게 불려갔다.

그는 대뜸 사무실로 들어서는 설태왕에게 당장 이라크로 가라면서 비행기표와 법인카드 한 장을 주었다.

회사에서 주는 법인카드지만 사용 한도액이 정해져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한 계산 없이 쓰다간 나중에 주머닛돈 쏟아져 나간다.

그런데 달리오는 카드를 주면서 사용 한도액이 없으므로 마음껏 써도 된다고 했다.

순간 설태왕은 급작스럽긴 했지만 이라크행이 결코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직감했다.

“흐흠!”

자신이 지닌 최대 자산이라면 지금 미국 연방 국세청도 모르는 비밀 계좌다.

발각될 경우 영혼까지 털리면서 인생 막장으로 날아갈 텐데 과연 무얼 믿고 그 중요한 걸 말해야 하는가.

의심을 해야 한다면서도 자꾸 말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뭔가.

슥!

- 의심 속에서 거짓이 아닌 걸 판별해 낼 때 그때 돈은 내 주머니 속에 모인다.

레이 달리오의 가장 큰 가르침은 의심과 진심을 구별해 내는 능력이다.

과연 눈앞의 배석대는 믿으려 할까.

어떤 조건을 내밀지 알 수는 없지만 오십만 달러는 거금이다.

살인 청부라고 해도 오십만 달러짜리 목은 드물다.

마피아 두목급이거나 갱스터 우두머리가 아니고서는 그런 거액을 제공하지 않는다.

스윽!

판단은 빠를수록 좋다.

과감히 핸드폰을 꺼내 계좌 하나를 찍어 보내기 시작했다.

인생은 선택이라고 대학 시절 가르치던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푹!

보내기를 눌렀다.

지잉!

잠시 후 탁자에 올려져 있던 유태수의 핸드폰이 잠깐 반응을 보였다.

유태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곧바로 어딘가 번호를 누르고 핸드폰을 부지런히 작동했다.

5분쯤 지났을까.

찌징!

이번에는 설태왕의 핸드폰이 울린다.

확!

전광석화.

탁자 위에 있는 자신의 핸드폰을 번개처럼 낚아채더니 재빨리 오픈하여 살핀다.

화아악!

눈이 커졌다.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거의 찢어지기 직전일 정도로 크다.

꾸우울꺽!

침 삼키는 소리가 커피숍의 모든 소란을 짓누른다.

‘오십만 달러.’

단 한 푼의 세금도 없다는 의미다.

뭔 돈일까.

너무 큰 액수이기에 잠시 현기증을 느꼈고 최대한 이성을 회복하기 위해 애쓴다.

따악!

팔을 들어 손가락을 튕기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냉수!”

재빨리 사라진 종업원이 잠시 후 쟁반에 냉수 한 컵을 가져오자 십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내놓는다.

거액의 팁에 종업원의 눈이 파르르 떤다.

“푸훗!”

유태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온통 눈앞은 놀란 사람뿐이다.

벌컥!

단숨에 컵의 냉수를 모두 마신 설태왕이 입을 열었다.

“미…… 미스터 배.”

유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갑시다. 이 행복한 자리에 담배가 없으니 목이 콱 막히는군요.”

커피숍을 걸어 나간 유태수는 근처 가로수 아래에서 말보로 레드 한 개비를 피워 물더니 불을 붙였다.

“배!”

설태왕은 재빨리 뒤를 따라왔다.

“원하는 것이 뭐요? 죽을 수는 없지만 시늉은 하겠소.”

피식!

유태수는 미소를 지었다.

“오십만 달러에 죽는시늉을 한다. 헤드 펀드 매니저 로버트 설의 자존심이 너무 저렴한 것 아니오?”

설태왕은 히죽 웃었다.

“당신에게는 미련 없이 시늉까지는 하겠소.”

죽는 것과 죽는시늉은 다르다.

죽는 것은 그냥 숨이 끊어져 북망산천 가는 것이고, 시늉만 하는 건 어쨌든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죽는시늉을 하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다.

일반인의 죽는시늉은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왕이 엎드려 시체 시늉을 한다는 건 어떤 면에서는 죽는 것만 못하다.

첫 만남에 이런 거액을 베팅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뭘 망설이겠느냐.

난 오로지 당신을 존중하고 소중히 받들겠다는 아랫사람으로서의 결의였다.

“내일쯤 250만 달러가 더 입금될 것이오.”

“허억!”

윈스턴 한 개비를 피워 물던 설태왕이 그만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자신에게 보낸 50만 달러를 합하면 300만 달러다.

설혹 자기 돈이 아닐지라도 그런 거액을 통장에 받는다는 건 돈벼락이다.

“어려울 것 없소.”

딸칵!

떨어진 담배를 피워 물고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이는데 손이 떨린다.

후욱!

겨우 불을 붙여 깊숙이 빨더니 연기를 뱉었다.

“태천그룹, 코리아.”

파팟!

알고 있다.

한국 제일의 기업.

한때 애플과 휴대폰 시장을 놓고 맞붙었다.

지금은 비록 애플에게 완전히 밀렸지만 여전히 휴대폰 시장에서는 강력한 브랜드를 지녔다.

태천(Taecheon).

국제시장에서 티 에이치(TH)로 불린다.

전 세계 기업 시가총액 순위로 따지면 12위로 대략 미화 4,000억 달러가 넘는다.

사냥감치고 엄청난 덩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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