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수배자들(1)
카드의 숫자와 동일한 52장을 이용해 후세인과 가족, 친구, 최측근 등 52명의 사진을 실은 것이다.
물론 카드에도 높고 낮음이 있듯 수배자들에게도 등급을 매겼다.
물론 등급이 높을수록 목에 붙은 현상금은 컸다.
사담 후세인은 가장 강력한 카드 무늬인 스페이드 에이스를 차지했다.
장남 우다이 후세인은 스페이드 킹을, 둘째 쿠사이 후세인은 스페이드 퀸으로 나누는 식이다.
이 카드의 효과는 컸다.
미군뿐만 아니라 후세인 치하에서 박해받던 쿠르드족과 시아파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배포하여 큰 효과를 보았다.
스으으윽!
유태수가 건넨 카드를 살피던 나와프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더 부탁할 일은 없는가?”
유태수는 웃음을 지었다.
이제 이 지역 쿠르드족은 자신의 완벽한 정보원들이 되었다고 해도 된다.
“충분합니다.”
유태수는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
코헨의 눈이 커졌다.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50만 달러를 건네주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가끔 현금을 지급한다.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을 굴려보고 훑어도 1만 달러 이상 건넨 기억은 없다.
돌아가는 이득이 클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라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50만 달러는 너무 크다.
“제발 50만 달러 가치를 했으면 좋겠군.”
약간은 비아냥거리는 말투다.
마치 돈 많이 준다고 풍요로운 수확이 있는 줄 아느냐.
어린애 같은 생각이다.
- 투자한 만큼 나온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회사 투자 얘기만 나오면 아버지 유장풍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적은 투자로 최대한의 이익을 올리는 것이 장사꾼이며 진정한 기업가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투자해도 망하는 회사가 부지기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고기가 있는 곳이라면 주저 않고 미끼를 쏟아 넣어야죠. 그런데 고기도 없는 곳에 미끼를 던져 놓고서는 고기가 있니 없니 하며 핏대를 올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나와프 쪽에 앞으로도 많은 미끼를 던질 생각이란 말인가?”
“못 할 것도 없죠. 광부가 금맥을 보고서 어찌 지나친단 말이오? 후후.”
유태수는 웃으면서 거실 한쪽 벽을 밀었다.
그그긍!
그러자 벽이 밀리면서 작은 방 하나가 나타났다.
놀랍다.
방이라기보다는 군부대의 병기 창고를 방불케 한다.
수많은 총기류들이 사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유태수는 권총 한 자루와 MP5 기관단총을 집어 들었다.
독일의 헤클러 운트 코흐에서 개발한 기관단총이다.
1980년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구출작전에서 데뷔를 했는데 그 놀라운 위력에 전 세계 국방 관계자들이 충격을 받았다.
이후 지구상 대부분의 대테러부대들이 앞다퉈 사들였고 '테러리스트의 피를 마시고 자란 총' 취급을 받았다.
이 총의 가장 큰 특징은 개머리판을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해 700밀리 전후의 짧은 길이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옷 속에 숨겨버리면 감쪽같다.
그러다 보니 고위 인물들의 경호원들이 즐겨 사용하고 총열이 짧은데도 불구하고 명중률이 탁월하다.
“사람 한 명 살펴봐야겠습니다.”
쿵!
소리를 내며 벽이 다시 닫혔다.
“누군데?”
“다에이.”
멈칫!
코헨이 눈을 찌푸리더니 더듬거렸다.
“설마 그 다에이?”
“아마도!”
지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인물이 맞을 것이라는 뜻이다.
“모술 경찰서장을 왜?”
“살펴보라고 하니까 살펴봐야죠.”
히죽!
웃으면서 커피 머신을 향해 걸어갔다.
주르륵!
내려진 커피를 컵에 따르더니 소파에 앉았다.
“나자프에게서 나온 정보인가?”
“빙고.”
후루룩!
유태수는 커피를 마셨다.
나와프를 만나고 돌아서는데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배!
- 말씀하세요. 나와프.
- 다에이는 아는가?
모른다.
유태수가 눈을 깜빡거리자 나와프가 말했다.
- 이 지역 치안 총책임자지. 우린 그에게 한 달에 얼마씩 돈을 바치고 있네. 우리가 그들과 나란히 살아가고 있지만 그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모술에서의 우리 쿠르드인의 삶은
달라지지.
뒷돈을 준다는 것이었다.
- 내가 보는 그는 자네에게 금고일 가능성이 높네.
놀라운 정보였다.
모술경찰서장 다에이.
그를 털면 무수한 일거리가 쏟아질 것이라는 뜻이었다.
“완전히 돈 놓고 돈 먹자는 판이로군.”
그 대가로 또 나와프에게 돈을 주었느냐는 코헨의 얘기였다.
“태수, 자네는 나 같은 전장의 킬러가 돈 몇 푼에 너무 연연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우리 직업이라는 것이 항상 곡예사의 외줄 타기야. 한 번만 삐끗하면 가는 거지. 나 말고도
이 바닥에는 많은 달러 사냥꾼들이 있지. 어느 날 연락이 안 되거나 소식이 없어 알아보면 죽었다는 소식이 온다네. 그런데 그들이 죽은 이유 대부분이 정보원들의 배신에 당한
것이라네.”
유태수에게 나와프는 정보원으로 규정할 수 있다.
“내가 쉬운 길 놔두고 굳이 어려운 방법으로 놈들을 쫓는 건 돈 몇 푼 아까워서가 아니라는 걸세.”
유태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귀담아들을 만한 말이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 말 평생을 내 가슴에 담고 살죠. 약속합니다.”
유태수의 진정한 표정에 마음이 놓인 것일까.
“대단하군. 자네의 지금 이런 모습이 미래를 굳건하게 책임질걸세.”
지금의 이런 모습, 그건 상대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다는 것이며 그 열린 귀가 미래의 위험을 차단할 것이라는 뜻이다.
두 사람은 무장을 갖추고 집을 나섰다.
***
오늘따라 회의가 길다.
한번 회의가 시작되면 기저귀를 차고 들어가야 할 만큼 오랜 시간 앉아 있어야 할 때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 되었다.
물론 출입을 막는 건 아니다.
단지 회의 중 자꾸 문을 열고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사람이 생기면 집중이 안 된다는 것이다.
오전 11시에 시작된 중역 회의는 점심까지 배달시키면서 오후 4시에 끝난 것이다.
회의 중일 때는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는다.
- 마누라가 죽어도 회의는 계속되어야 해.
중역들을 놓고 벌이는 토론.
어쩌면 유장풍이 대한민국 최고 재벌기업을 일으킨 배경에는 회의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듣는다.
물론 최종결정은 자신이 하지만 쉬지 않고 듣는 그의 모습은 마치 대입 수학능력 시험을 앞두고 강사의 말을 듣는 학생과 다를 바 없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해봐.”
회의가 끝났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고 유장풍은 잠시 자리에 앉아 있었다.
툭!
회의실 탁자에 놓인 시가 케이스를 열어 한 개비를 뽑는다.
딸칵!
라이터로 시가에 불을 붙인 유장풍은 진득하게 입안 가득히 밀려드는 시가 향기를 맛을 보듯 느끼며 푸른 연기를 뱉었다.
- 담배 끊으십시오.
- 시가 몇 개 피운 걸 가지고.
- 시가도 담배입니다. 오히려 정제되어 나오는 담배보다 더 해로울 수 있습니다.
- 시가쟁이 처칠이 몇 살까지 살았지?
주치의에게 그렇게 쏘아붙이면 어색하게 웃는다.
시가를 피우면 세상을 향한 자신의 승부욕이 조금은 안정을 찾는다.
지나친 승부욕은 잘못된 판단을 가져온다.
“회장님!”
인터폰이 울린다.
“오도석 팀장님이 급히 뵙기를 청합니다.”
인재팀장 오도석.
직급은 팀장이지만 그에 대한 대우는 이사급이다.
회의가 열리면 일체 외부와 접촉을 끊는데 이미 세 시간 전부터 오도석 팀장은 비서실에서 안절부절못하며 회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딸칵!
문이 열리고 오도석 팀장이 빠르게 걸어왔다.
“앉아!”
“그것보다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스윽!
시가를 손가락에 끼고서 고개를 돌렸다.
유장풍이 젊은 오도석을 팀장에 두고서 이사 대우를 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
‘놀라운 지략가다.’
수양대군으로부터 ‘나의 장량(유방의 막료로 그의 천하통일에 결정적 기여를 한 책사.)이로다.’라는 말을 들을 만큼 머리가 뛰어난 한명회 뺨치는 오도석이다.
태천그룹 오십 년 역사 중 전반부를 전 대위라는 군 출신 인물이 피를 묻혔다면 후반기 15년은 오도석이 청소부였다.
적이 될 대상은 애초에 잘라버리는 것이 오도석이다.
- 뭐든지 조금 빠르다 할 때 칼을 뽑아야 합니다.
오도석은 틈날 때마다 한발 먼저 쳐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오도석의 그런 방식은 항상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뉴스타도를 아십니까?”
“뭔데?”
“언론사입니다. 시민들의 후원으로 운용되는 독립언론이죠. 거기서 이번 주 목요일 날 사형수의 실종이란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방송할 예정인 모양입니다.”
“사형수의 실종!”
조금 전까지 느긋해 보이던 유장풍의 두 눈이 예리해졌다.
사형수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유태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태수 군 얘깁니다.”
툭!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두툼한 시가가 탁자로 떨어졌다.
“뭐?”
“태수 군 사건을 방송할 모양입니다. 여기저기 알아보았더니 90퍼센트 이상 취재는 끝난 듯 보입니다.”
“그놈들이 태수 사건을 어떻게 알고?”
“육군 군사경찰단도 초비상이 걸린 모양입니다.”
유장풍은 굳은 얼굴로 잠시 앉아 있더니 떨어뜨린 시가를 주워 들어 입에 물었다.
파르르!
입술이 떨린다.
“오 팀장!”
“예, 회장님!”
“어느 쪽 타격이 더 클 것 같나?”
“그야 타격이 큰 쪽은 군(軍)이죠. 하지만…….”
“왜 말을 하다 말아, 우리도 그에 못지않다는 것이군.”
“매를 먼저 맞는 쪽은 군이겠지만 회사의 이미지나 경제적 손실을 따진다면 우리가 몇 배 크다고 봐야죠.”
유장풍은 눈을 좁혔다.
가장 먼저 어느 분야에 타격이 올까.
아마 주식시장에서 변화가 올 것이다.
보도 내용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주가 하락은 피할 수 없다.
“진짜 우려되는 건.”
오도석이 어금니를 물었다.
“방송 내용을 우리가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방송 내용에 따라 파장의 크기가 결정될 것입니다. 어쨌든 사건이 났을 때는 태수 군이 나쁜 놈이었지만 방송이 보도되면 국민들이 어떤
반응을 나타낼지도 모르고요.”
“국방부 장관에게 전화 넣어.”
오도석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단축 키 하나를 눌렀다.
[국방부 장관 조중공이오.]
“잠깐 기다리시죠.”
오도석이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유장풍이오.”
[회장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송구하게 됐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아직.]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설마 국방부에서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허! 오 팀장이 설명해줘.”
전화기를 오도석에게 넘겨 버리고 시가를 뻑뻑 소리 나게 피운다.
오도석은 자세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몇 마디 더 나누더니 전화를 끊었는데 안색이 굳어 있었다.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에이!”
유장풍은 더욱 짜증스런 표정을 하면서 불쑥 물었다.
“말해봐.”
이미 오도석의 머릿속에는 몇 개의 대책이 세워졌을 것이다.
“먼저 말씀드리는데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말해보라니까?”
알았으니 해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