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수배자들(3)
태천 바이오로직스에서 여러 분야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지만 결과물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즉 당분간은 외국 기술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
그때 채무령이 외출했다가 들어왔다.
온 가족들이 몰려 있자 채무령은 잠시 놀란 표정을 하면서 거실 벽에 걸린 벽시계를 본다.
오후 다섯 시.
모두가 회사에 있어야 할 시간이다.
채무령은 일층 안방을 향해 사라졌다.
“아버지, 이대로 지켜볼 거예요?”
셋째 딸 유오주가 물었다.
유장풍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방송은 막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넷째 아들 유국태가 눈을 빛낸다.
그때 안으로 들어갔던 채무령이 옷을 갈아입고 걸어 나왔다.
“한참 회사에서 일할 시간에 무슨 일들이냐?”
“어머니는 모르세요?”
넷째 유국태가 묻는다.
“뭘 말이냐?”
말을 해도 되나 싶은 듯 슬쩍 가족들 표정을 한 번 살피던 유국태가 입을 열었다.
“태수 놈 사건을 방송하나 봅니다.”
“태수 사건?”
“총살 직전 사라져버린 것이 고도로 치밀하게 계획된 살려주기 아니냐는 거죠.”
“누가 그래?”
“오늘 밤 방송된다고 합니다.”
채무령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어디에서도 아직 생활반응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낙담한다거나 유태수가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않고 있다.
남편 유장풍은 유태수에게 맞아 죽은 유기태를 가장 아끼고 미래 후계자로 점찍었지만 자신이 보는 눈은 조금 다르다.
유태수야말로 놀라운 재능을 지닌 아이다.
여태 가족들 몰래 경찰을 통해 변사체가 발견되었다고 하면 직접 달려가 확인을 해왔다.
다행히도 유태수의 주검은 아직 없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없을 것이다.
“방송이 되면 무엇이 나쁘고 어떤 면이 좋은 것이냐?”
슬쩍 소파에 앉아 있는 유장풍을 스치듯 바라본 뒤 묻는다.
“무조건 마이너스지.”
둘째 딸 유상주가 말했다.
“생각해봐. 당시 사건이 나고 얼마나 우리 집안이 모욕을 당했어. 돈밖에 모르는 짐승 같은 집안이다, 아귀지옥이 따로 없다, 어떻게 동생이 형을 죽이고 작은아버지를 두들겨
패느냐면서.”
“방송이 되면 좋고 나쁜 점을 물었다.”
채무령이 말을 잘랐다.
“보나 마나…….”
“됐다!”
유장풍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들 돌아가라.”
그 한마디를 남기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거실을 감돌았고 가장 먼저 큰아들 유종태가 일어났다.
“가보겠습니다.”
유종태가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 하나 둘 거실에서 사라져갔다.
넓은 거실에 채무령 혼자 남았다.
가슴이 뛴다.
어떤 식으로 보도가 이뤄질까.
살았을까.
아니면…….
- 제가 무슨 재주가 있어 인간의 생사를 점칠 수 있겠습니까만.
유태수가 죽었냐고 물었다.
자신이 아는 대공스님의 불력이 깊다.
하늘의 조화, 즉 천기까지 살필 줄 안다고 들었다.
- 근래 들어 요광(搖光)이 더욱 빛이 나는데.
- 요광?
- 서양에서는 두베(Dubhe)라고 부른다더군요. 칠성의 머리가 되는 첫 번째 별.
우리의 민화에는 사람의 탄생이 북두칠성의 점지라고 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관 밑에 까는 것을 칠성판이라고 한다.
최소한 중국을 포함한 우리 문화에서는 북두칠성이야말로 생과 사를 주관하는 별인 것이다.
- 요광은 생명의 별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경이적일 만큼 빛을 발하고 있더군요.
채무령은 혹시나 하며 눈을 빛냈다.
- 태수가 태어날 때도 요광이 타오르듯 빛을 발했었는데.
대공스님은 유태수가 죽었다 살았다는 결정을 지어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듣는 채무령의 귀에는 죽지 않았다는 말로 해석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태수는 용서할 수 없는 자식이었다.
형을 죽였다는 것, 그리고 숙부를 주먹으로 때리는 건 절대 용서될 수 없는 패륜이었다.
그런데 요즘 흘러가는 기류가 묘하다.
가정 문제 연구소에서 보내온 소식에 의하면 모 대학 호텔식음료과의 협조를 얻어 그날 유태수가 마셨던 발렌타인과 똑같은 술을 구해 몇 차례에 걸쳐 실험을 했다.
술을 마실 줄 아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실험을 했는데 참가자 스물한 명 중 열아홉 명이 두 병을 모두 마시고도 필름이 끊긴, 이른바 블랙 아웃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물며 유태수는 격렬한 스포츠 중 하나인 복싱을 함으로써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폐활량도 좋고 건강한 신체를 지녔다.
결국 이성을 잃고 그런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분명한 건 그날 아무도 모르는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채무령은 확신했다.
***
제시간에 방송이 시작되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백 퍼센트 여러분의 후원과 도움으로 운영되는 독립 언론 뉴스타도의 김옥창입니다. 이미 알려드린 바와 같이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 재벌가의 살인 사건을 다루고자 합니다.”
담당 PD는 오래전 있었던 유태수 살인 사건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도윤 기자.”
같이 나와 앉아 있던 이도윤에게 카메라가 맞춰졌다.
“이번 사건을 직접 취재했죠?”
“그렇습니다.”
“우선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유태수 씨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현재 육군교도소에는 수감되어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총기 관리 부실로 징역 3년을 살고 최근 출소한 이 모 병장의 말에 의하면 올봄, 정확히 3월 초에 사형집행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까?”
“이 모 병장뿐만이 아니라 몇몇 사형수 가족에게 면회를 부탁하여 알아보았는데 그날 새벽 유태수 병장과 박낙진 상병 두 명이 육군 사형장으로 이송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 모두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형장에 끌려간 죄수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집행이 되었다는 뜻인데 유태수 씨가 죽지 않았다는 건 또 무슨 얘깁니까?”
이도윤은 본격적으로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 시간 한 대의 차량이 골목으로 들어섰다.
주차 자리를 찾는 듯 서서히 움직이더니 골목 끝쯤 자리 하나가 비어 있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꺾어 나갔다가 후진으로 들어오는데 주차실력이 대단했다.
탁!
운전석 문을 닫고 한 사내가 내렸다.
슥!
키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 나오는데 갑자기 낯선 그림자 하나가 앞을 막아선다.
차에서 내린 박준태는 멈칫했다.
지금 퇴근하는 길이다.
상대는 허름한 회색 점퍼에 검정 신사복 바지를 걸쳤는데 흰색의 운동화를 신고 있다.
“뭐요?”
배달부는 품속에서 핸드폰 한 개를 꺼냈다.
“박 하사님, 이것 받고 최호민 씨 핸드폰 가져오세요.”
흠칫!
박준태가 놀란다.
유태수는 아니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고 으스름한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얼굴 모습이 변장한 것 같지는 않았다.
꿀꺽!
온몸이 굳어온다.
자신은 현역 군사경찰 특임대원이다.
어느 군인들보다 훈련이 잘되어 있고 더욱이 사람을 죽이고 쫓는 것이 직업이다.
태권도 유단자이고 무성무기 사용법을 제대로 배웠다.
그런데 몸에서 투기가 전혀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옭아매듯 조여온다.
“생각 잘해야 할 것이오. 내일 아침에 출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휘익!
박준태는 상의 양복 재킷을 벗어 차 보닛 위로 던져 올려놓았다.
육군 군사경찰 특임대원이 몇 번의 이빨 맷돌질에 순순히 응할 수는 없다.
슉!
박준태의 오른발이 재빨리 배달부의 왼쪽 옆구리를 찍어갔다.
스윽!
돌연 박준태는 깜짝 놀랐다.
대부분 강한 돌려차기가 들어가면 막거나 피한다.
그런데 배달부는 전광석화와 같이 파고들었고 자신의 발이 제대로 타격하기도 전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밤이어서 캄캄한 것이 아니다.
쿵!
강력한 주먹을 턱에 맞고 한 바퀴 빙 돌며 바닥에 엎어졌다.
“으응!”
신음을 흘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어지럽다.
땅이 빙빙 돈다.
주르르르!
배달부는 쓰러진 박준태의 발목을 잡고 그의 차로 끌고 가더니 뒷자리에 실었다.
부릉!
그의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시동을 걸더니 골목을 빠져나갔다.
***
저 멀리 육군 군사경찰단 건물이 위압적으로 서 있고 입구에는 무장 군사경찰 두 명이 지키고 있다.
박준태는 이미 자세를 바로잡고 있었지만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허튼짓하면 모두가 죽네.”
딸칵!
배달부는 차에서 내렸다.
잠시 움직이지 않고 있던 차가 천천히 군사경찰단 건물을 향해 속도를 냈다.
박준태의 차량이다.
핸들을 잡은 박준태는 표정이 굳어 있었다.
아내는 물론 아이들과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 그리고 결혼하여 부산에서 살고 있는 누님과 매형, 조카들의 나이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
즉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이 닥칠 것이라고 했다.
이 상황에서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이란 죽음 말고 무엇이 또 있겠는가.
자신만 위협한다면 죽어도 좋다.
가족과 부모님, 출가한 누님까지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고 혹독한 악몽이다.
차가 멈추고 유리를 내렸다.
“충성!”
위병을 서던 군사경찰이 거수경례를 한 뒤 곧장 차단기가 올라갔다.
부우웅!
박준태의 차는 부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0여 분 정도 지나고 다시 나타났고 그의 손에는 배달부가 건네준 핸드폰이 아닌 오늘 낮에까지 포렌식으로 정밀 조사를 하고 있던 최호민의 것이 들려 있다.
사흘만 지나면 모든 것이 밝혀진다.
끼이익!
길가에 차를 세우고 조수석 쪽 유리를 내렸다.
“여깄소.”
허리를 숙이고 건네준 핸드폰을 받아 든 배달부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 박 하사, 아니 진급했으니 이제 박 중사군. 당신에게는 어떤 피해도 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배달부가 건네준 전화기에는 최호민의 것과 동일한 모델이고 번호도 일치한다.
전화기 안에 들어있는 내용도 최호민의 것이다.
다만 유태수와의 통화와 문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배달부 자신의 능력으로는 핸드폰을 바꿔치기하는 기술은 어려웠다.
그래서 급히 네오에게 부탁했고 오늘 아침에 완전히 또 하나의 최호민의 핸드폰이 만들어진 것이다.
타탁!
차 문을 두어 번 두드리고 배달부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배달부가 사라졌지만 박준태는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신이 혼미해질 뿐이다.
딸칵!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뉴스였다.
그런데 방송은 물론 어느 신문사도 어젯밤 뉴스타도에서 보도한 내용을 전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민들은 모르지 않았다.
오래전 유장풍의 성매매 사건도 뉴스타도가 보도했고 다른 언론은 침묵했으나 세상은 모든 걸 알게 되었다.
‘그럼 유태수는 어디로 간 거야?’
‘군사경찰은 물론 경찰 검찰 국정원까지 모두 동원되어 추적하고 있다는데 여태 잡히지 않고 있단 말이야?’
‘제2의 진창원이 되는 것 아냐?’
대중은 사건의 심각성보다 드라마적 성향의 시선으로 본다.
그건 불구경, 싸움 구경처럼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흐름 하나는 보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러게 말이야. 어젯밤 보도 내용을 쭈욱 살피면 유태수의 행동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더라고. 다른 건 몰라도 술 두 병 먹고 복싱으로 단련된 건장한 청년이 맛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