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승부는 맷집이다(1)
‘친구들 인터뷰를 보면 아직까지 유태수가 술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잖아.’
불과 3년여 전 패륜이라는 단어로 낙인찍힌 유태수에 대한 여론의 반응이 조금씩 방향을 바꿔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흘 후 유태수의 실종보다 더 충격적인 뉴스가 뉴스타도를 타고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라크 태천건설 납치된 노동자는 매해 부사 하라이의 소행이 아니다.」
「그들은 태천건설에서 보낸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국 쪽에서 죽인 것이다.」
그러면서 납치되어 사망했던 두 명 중 한 명인 윤기철의 목소리가 뉴스타도를 통해 흘러나왔다.
더욱 놀라운 건 윤기철의 자녀들이 아빠가 맞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윤기철은 자신임을 확실하게 하려는 듯 아들과 딸 두 자녀의 이름과 생년월일, 다니는 학교, 아내에 대해서는 처가 사람들의 성함과 특히 장인어른이 작년에 희수연을
지냈다는 것까지 얘기했다.
기자가 만난 양가 가족들 모두 윤기철의 말이 사실이라면서 법적 증거가 될만한 서류와 여러 자료들을 증거로 내밀었다.
어마어마한 충격이다.
테러범들이 아닌 회사 측에서 사주한 사람들에 의해 죽었다는 소식은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버렸다.
사건은 곧바로 국회를 강타했다.
야당은 당장 국정조사를 요구했고 여당은 좀 더 지켜보자는 쪽으로 나갔다.
또한 주식시장에서 태천그룹 전 종목이 제방 무너지듯 급락했으며 그중에서도 건설주는 서킷 브레이커까지 발동되는 사태를 맞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태천건설을 필두로 모든 상장계열사가 그야말로 추풍낙엽이었다.
침묵이다.
태천그룹으로부터는 어떤 반응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기자들이 서초동 사옥을 찾아갔지만 보안요원들로 인해 아무도 들어서지 못했다.
길가에서 하루 종일 진을 치고 있지만 회사 고위관계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얼씬거리지도 않는다.
보름이 지나고 나서야 태천그룹에서 공식 반응이 나왔다.
「뭔가 치명적인 오해가 있다. 우린 결코 그런 적이 없으며 뉴스타도에게 민형사상 모든 책임을 묻겠다.」
그러면서 태천그룹 법무팀장 오만철이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기자들의 질문에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현재로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태천그룹은 결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악의적인 가짜뉴스다.”
“뉴스타도 같은 작은 독립언론이 태천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을 상대로 가짜뉴스라는 덤터기를 씌우는 이유가 뭘까요?”
“그건 내가 모르죠.”
“태천그룹에서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죠?”
“하늘에 맹세코. 이만합시다.”
법무팀장 오만철은 재빨리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
씰룩!
씨이이이일룩!
두툼한 볼살이 가는 경련을 일으킨다.
“왜 다들 꿀 먹은 벙어리야. 뭐라고 말들 좀 해봐.”
회의실에는 중요 간부 십여 명이 앉아 있었다.
시가를 잘근잘근 씹는 유장풍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고 눈에서는 살기가 뻗어 나온다.
오랫동안 유장풍 곁에서 일을 했지만 이번처럼 혹독한 폭력성을 드러내는 건 처음 본다.
“빌어먹을!”
유장풍이 투덜거리는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꼭 빼닮은 머리 희끗한 사내.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이 되는 친동생 유동풍이다.
“뭔 소리야?”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니까요. 아니, 죽은 놈 목소리가 어떻게 방송에서 나올 수가 있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쨌든 죽은 놈들 목소리가 분명하다잖아.”
“그러니까 윤기철인지 뭔지 하는 놈 목소리가 어떻게 녹음되어 흘러나오냔 말이야? 죽은 놈 아냐? 벽제 화장터에서 시뻘건 불길에 완전히 잿더미가 된 것 맞아?”
그러면서 당시 회사를 대표해 화장터까지 같이 갔던 미래전략실 총무팀장 채경수를 돌아보았다.
“봤지? 불 속에 타는 것 봤냐고?”
“예, 봤습니다.”
“이건 조작이야. 조작이 아니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그렇다.
조작이 아니고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윤기철의 목소리는 진짜다.
그렇다면 그들이 납치되었을 때 누군가가 인터뷰를 했다는 뜻이다.
아니, 죽기 직전 누군가와 얘기를 나눴다.
테러범들에 의해 기획된 건 절대 아니다.
“한국 놈이야!”
쾅!
유장풍이 책상을 치며 일어났다.
“직원 중 어느 놈이 내게 칼을 겨누고 있어. 어느 놈이.”
“저도 그렇게 봅니다.”
오도석이 입을 열었다.
“내부자가 아니라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가 없죠.”
“내부자라면 노조 새끼들.”
유동풍이 이를 갈았다.
“그게 아냐. 노조원 놈들은 월급 올려달라고 떼쓸 줄은 알지만 이런 큰 건은 간덩이들이 작아 기획하지 못해. 불과 보름 만에 내 주머니에서 수십조 원이 떨어져 나갔어.”
지금은 폭락이 어느 정도 진정기에 접어들었지만 최소 30조 이상이 불과 보름 사이에 날아갔다는 것이 주식시장의 분위기다.
“오 팀장!”
유장풍이 오도석을 불렀다.
“찾아내!”
“알겠습니다.”
“그리고 뉴스타도 놈들 더 이상 내 눈에 보이지 않게 해. 한 번만 더 내 귀에 뉴스타도라는 방송이 있다는 얘기가 들려오면 모두들 옷 벗고 집으로 돌아갈 각오해.”
뉴스타도를 날리라는 뜻이다.
“돈 놔뒀다 어디 쓸 거야?”
뉴스타도 잡는 데 마음껏 써도 좋다는 뜻이다.
씨익!
유동풍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달라졌어.’
자기 형님이다.
어려서부터 같이 자랐고 창업을 하고서도 평생 곁을 떠나지 않았다.
유장풍의 장점은 냉철한 판단력이다.
아무리 화가 나도 당장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데도 어느 한순간 차갑게 식어 있다.
흔들리지 않는 냉철한 사고 판단이 오늘의 태천그룹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요즘 갈수록 서두른다.
미운 놈이 있으면 당장 때려주라고 하며, 싫은 놈이 있으면 지체없이 쫓아 버린다.
예전에는 미운 놈도, 싫은 놈도 모두가 고객이라고 했다.
- 징후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주치의 고무룡 박사와 저녁을 했다.
식사 겸 술이 몇 순배 돌면서 자연스럽게 유장풍의 건강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
- 징후가 시작되고 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병 있잖습니까?
-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병이라면 암?
- 얼마 전 미국에서 조사 하나가 있었습니다. 가장 걸리기 싫은 병에 대한 질문이었죠. 정답이 뭔 줄 아십니까?
- 글쎄, 암이 감기처럼 유행하는 시대니까.
- 치매였습니다.
- 설마 형님이?
- 지금은 아니고 조금씩 물들어 가는 듯 보입니다. 가을이 오면 하나둘 단풍이 들지 않습니까.
- 요즘 고 박사 용돈이 무척 궁한가 보군요.
주치의는 자기 환자의 몸 상태를 철저히 지켜 보호하는 데 그 가치가 있다.
특히 재벌총수의 건강은 시장에 미치는 파급력이 크기 때문에 철저한 비밀에 부쳐진다.
후계 구도가 완성되지 않은 지금 유장풍이 아프다는 것이 알려지면 유씨가문은 순식간에 피비린내로 덮일 것이다.
그래서 내쉬는 숨소리까지 건강하게 포장하는 데 앞장서야 할 주치의가 아무리 동생이라고 하지만 유동풍 앞에서 털어놓는다는 건 이미 포섭이 되었다는 뜻이다.
‘나도 한 번 그 자리에 앉아봐야 할 것 아닙니까, 형님.’
유동풍의 눈이 강렬하게 빛난다.
“제대로 하라고, 제대로!”
유장풍이 버럭 소릴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회장실을 빠져나간다.
그런데 단 한 명의 인물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태천자동차 사장 노기술이다.
유장풍의 친구이며 창업 1세대 인물이다.
“자넨 뭐해? 가서 일 안 해?”
“유 회장!”
“어랏! 갑자기 무슨 얼어 죽을 회장이야. 그냥 장풍아 하고 불러.”
여럿이 모인 장소가 아닌 둘만 있을 땐 격의 없다.
“내가 보기엔 이만큼 큰 바람은 없었네. 정부와 언론이 모두 우리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진정될 것 같지 않네.”
“무슨 쥐새끼 불알 터지는 소릴 하는 거야?”
“살짝 옷깃 좀 펄럭이고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태풍이란 말일세. 태풍이 지나가면 어떤 흔적이 남던가. 집이 무너지고, 제방이 터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지.”
“시끄러워, 재수 없는 소리.”
“힘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라는 걸세.”
노기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아침에는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지 않길 바라지.”
탁!
문을 닫고 노기술이 사라졌다.
유장풍은 잠시 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웬만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 노기술이다.
부하직원의 어지간한 실수는 눈감아 준다.
하지만 참다 참다 안되면 바로 해고해버린다. 부드럽지만 냉정할 땐 한 없이 차갑다.
‘빌어먹을 인간 같으니.’
유장풍은 침을 튕기며 투덜거렸다.
***
유태수는 경찰서가 보이는 맞은편 차에 있었다.
스윽!
작은 거울로 얼굴을 살피면서 손으로 쓰다듬는다.
눈썹과 코가 약간 바뀌었다.
랭글리의 작품이다.
미국에서 변장 전문가가 왔다.
얼굴에서 가장 간단한 손질(?)로 얼굴 생김새를 다르게 바꿔 놓을 수 있는 부분이 코와 눈썹이라고 했다.
유태수는 그에게서부터 닷새 정도 교육을 받고 직접 자신의 얼굴을 수시로 고치기 시작했다.
‘원더풀.’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하는 유태수의 솜씨에 가르치던 변장 전문가도 깜짝 놀랐다.
중학교 다닐 때 미술에 관심을 가졌었는데 그것이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대단하군!”
운전대를 잡고 있던 코헨이 놀란다.
마술사처럼 손이 얼굴을 한번 스윽 훑어 버리면 다른 얼굴이 되어 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중국의 변검술(變瞼術)이라는 걸 보았다.
손이 한 번만 얼굴 앞을 지나가면 그 짧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가면을 쓰고 있는 검사(瞼士)의 능력이 경이로웠다.
그런데 지금 유태수가 그런 신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재밌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칠공(七孔: 귀(耳) 눈(目) 코(嗅) 입(口)을 포함해 눈썹에 잠깐의 변화를 주므로 원래 모습의 40퍼센트 정도가 사라진다.
그 정도면 위기의 순간에 얼마든지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것이다.
스윽!
변한다.
피부색까지 수시로 변하는 자신의 얼굴을 손거울로 보며 유태수는 웃었다.
히죽!
언뜻 학창 시절 읽었던 무협소설 속의 천면염라(千面閻邏)라는 캐릭터가 떠올랐다.
말 그대로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사내.
그런데 자신이야말로 21세기 천면염라였다.
스윽!
숙!
계속 바꾸고 또 바꾼다.
- 모든 건 연습이다. 끊임없는 연습만이 실력향상을 가져온다.
떠나면서 CIA 변장 전문가는 분명하게 말했다.
***
석양이 떨어지면서 도시는 밤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부우웅!
그때 모술 경찰서로부터 라이트를 켠 차량 한 대가 나오고 있었다.
워낙 오랫동안 살피고 미행을 한 탓에 불빛만 보고서도 사냥할 차량인지 아닌지 알아차린다.
“다에이 차 아닌가?”
운전석에 앉아 있던 코헨이 말했다.
나오는 차량 뒤에 한 대가 바짝 붙어 온다.
경호 차량이다.
모술 치안의 총책임자가 경호원들을 데리고 다닌다는 건 그만큼 그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오늘은 또 어딜 가시나?”
나와프가 보내준 정보에 의하면 다에이는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사람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