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맨 헌터(3)
그는 2008년 미국에 불어닥칠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언했다.
미국발로 시작하여 전 세계를 흔들어버린 금융위기(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예상한 헤지펀드가 돈을 잃을 리는 없다.
이후 2010년 그가 세운 브릿지워터는 구글, 이베이, 야후, 아마존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린다.
전후(戰後) 시장이 훨씬 불안하다는 일반적 평가이고 보면 2008년 금융 사태 2년 후에 그런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인 그의 능력은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달리오에게 배우기 위해 그의 회사에 뛰어든다.
설태왕도 그 범주에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느 정도 능력은 인정받고 있지만 커다란 자국을 남기려면 뭔가 더 크고 분명한 기록을 만들어야 한다.
딩동!
달리오의 성향을 분석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리고 메시지를 확인하던 설태왕이 소스라친다.
“하나, 둘…… 550만 달러.”
불과 한 달이 채 안 됐는데 또다시 550만 달러라는 거액에 어금니를 물었다.
보고 또 봐도 550만 달러가 틀림없다.
이 정도면 돈을 버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딘가에 달러가 낙엽처럼 떨어져 있고 빗자루로 적당히 쓸어 담아 보낸 것이다.
한참 동안 송금된 액수를 바라보던 설태왕이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어, 상황이 어떤가? 하이 프리퀀시 트레이딩(High frequency trading) 말일세.”
하이 프리퀀시 트레이딩이란 초고속 온라인 거래를 말한다.
일명 섬광 주문(flash order) 또는 플래시 트레이딩이라고도 부른다.
흔히 인간이 눈을 깜빡이는 데 0.35초가 걸린다고 한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의 시간이다.
하지만 0.35초, 이 짧은 시간에 섬광 주문, 즉 초단타매매로 불리는 주식매매의 세계에서는 2,500여 건의 거래가 이뤄진다.
전문 용어로는 고빈도 매매, 극초단타 매매라고 하는데 고성능 컴퓨터 시스템이 실시간 데이터를 가지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사고파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식 매수 주문이 시장에 전달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0.3초이다.
그런데 이런 초단타매매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0.03초 안에 미리 파악할 수 있다.
한마디로 1/1000초 만에 매매 주문을 내고 3/100초 만에 주문을 냈다가 취소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매매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건 그만큼 다른 사람의 주문과 거래 방법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개인 컴퓨터를 이용해 매수 매도 주문을 내는 일반 투자자들이 돈을 따기란 이래서 어려운 것이다.
빨리 안다는 건 돈을 벌 수 있다는 절대적인 조건이다.
지금 설태왕은 배석대로부터 건네받은 250만 달러를 가지고 초단타매매를 반복하고 있다.
그와 같이 손을 잡고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섯.
하나같이 컬럼비아 경영대학원 동창들이다.
초단타매매의 단점 중 한 가지가 큰돈을 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작은 등락에 승부를 걸어 벌기 때문에 거액을 갖고 움직여도 확실한 뭉칫돈을 거두어들이기는 어렵다.
대신 잃지는 않는다는 점이 매력적인데 어떻게 시장에서 굴러가는 돈은 이미 500만 달러로 불어나 있었다.
다섯 명이 똘똘 뭉쳐 한 달 가까이 밤샘하며 매달린 결과다.
그런데 다시 550만 달러가 들어왔다.
800만 달러면 제법 큰 판으로 놀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궁금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 자리에서 50만 달러를 입금한 것도 그렇고 다음 날 250만 달러에 이어 오늘은 550만 달러를 보냈다.
한두 푼도 아닌 1,000만 달러 가까운 돈을 처음 만난 사람의 계좌에 넣었다.
자기 같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민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누구처럼 칠주야(七晝夜)를 뜬눈으로 새우지는 않았으나 이틀 밤 정도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똑똑하거나 아니면 등신.
둘 중 어느 쪽일까.
자신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으면 이런 무모한 거래는 이뤄질 수 없다.
누군가가 자신을 믿어 준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니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지이잉!
전화가 울린다.
「맨 헌터」
라는 글씨가 떴다.
배석대를 가리키는 닉네임이다.
“미스터 배.”
“도망 안 갔소?”
화악!
하마터면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자신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지 않고 있는 이상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결국 도망갔을 수도 있다고 의심하면서 이런 엄청난 거액을 또 보낸 것이다.
졌다.
컬럼비아대학을 나온 두뇌 가지고는 상대가 안 된다.
이런 사람은 절대 적(敵)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자살이란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는 것만이 아니다.
이런 사람과 대결하려는 것도 자살 행위다.
***
주렁주렁 대추야자가 열린 거대한 가로수 아래 유태수가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 있다.
박진태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당시 박진태가 연락처를 물었고 유태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가르쳐 주었다.
길가 노천카페인데 남자 직원이 커피 한 잔을 가져다주고 돌아간다.
유태수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 미소가 걸렸다.
박진태가 자신을 만나자고 한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망설이지 않고 연락처를 가르쳐준 것이 오늘 이 자리가 마련된 포인트다.
같은 한국인이라고 하여 무조건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 위험한 상황에서도 유태수는 비즈니스를 시도한 것이다.
박진태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귀한 손님 다에이를 끌고 갔으니 엄격히 말하면 유태수는 적인 셈이다.
그런 적에게 연락처를 물었다.
적에게 연락처를 가르쳐줄 병신은 없다.
그런데 유태수는 태연하게 명함을 주었다.
“미안합니다. 현장에서 작은 사건이 생겨 늦었습니다.”
박진태가 허겁지겁 다가와 앉았다.
“헤이, 라울. 커피!”
재빨리 다가오는 남자 직원에게 커피를 시킨다.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바쁩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다 보니 공기(工期)가 자꾸 늘어나고, 회사에서는 절대 넘기지 말라고 하고.”
국내 건설도 아닌 해외 건설에서 공기가 하루만 늘어나도 엄청난 이익이 사라진다.
지금 박진태의 경우 야간작업의 강행군을 이어간다고 해도 20일에서 한 달은 늘어날 것으로 보는데 서울 본사에서는 무조건 제날짜에 맞추라고 못을 박고 있다.
“솔직히 더 이상 어떤 사고만 생기지 않는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공기를 맞춰볼 각오도 되어 있는데.”
그때 종업원이 커피를 놓고 돌아갔다.
뜨거운 커피인데도 박진태는 후루룩 한 모금 마신다.
“이놈의 나라가 다른 건 몰라도 커피 맛 하나는 죽인다니까.”
투덜거리듯 말하며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아무래도 내 모가지가 성치 않을 듯싶소.”
순간 유태수의 눈이 가늘어진다.
뭔가 분명한 그림 하나가 그려졌다.
그날 다에이와 만나 저녁을 한 건 공사장 안전 문제 때문일 것이다.
다른 기업들과 달리 유장풍 회장은 PMC(Private Military Company) 즉, 민간 군사 기업에 맡기지 않고 있다.
물론 돈이 아까워서다.
유장풍이 대한민국 재계서열 1위 기업으로 올라선 데에는 수많은 기술개발과 사업가로서의 선견지명보다는 절약했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그를 수전노로 비유한다.
철저히 책임 중심제인 태천건설에서 공기가 늦어지면 당연히 현장소장 책임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회사를 위해 노력했어도 유장풍의 성격에 비춰 박진태의 모가지는 지금 바람 앞의 등불이다.
그래서 다에이를 만나 공사장 안전 문제를 의논하고 돈 봉투를 건넸을 것이 뻔했다.
어쨌든 그 와중에 그런 사고가 생겼고 유태수를 발견하고 박진태는 한 가지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더욱 흥분되는 건 유태수가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거기서 찾아낸 희망의 끈을 가지고 지금 이렇게 달려 나왔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유태수는 넙죽 절을 하듯 고개를 상하로 끄덕였다.
“뭐 하는 분입니까? 혹시 용병 아닙니까?”
이라크에만 열다섯 개 회사 25,000여 명의 용병이 들어와 활동한다.
주로 부호들과 가족들의 신변경호, 복구사업에 뛰어든 민간 기업들의 공사 현장을 경비한다.
“내가 알기로 십여 명 정도의 한국인이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계속 말씀하시죠.”
“그날 식당 사건에서 봤던 미국인도 굉장히 거친 것을 보아 용병 같던데 같이 일을 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 것입니까?”
말하지도 않았는데 유태수를 용병이라고 규정해 버린다.
쫓기는 사람의 다급함이 보인다.
아마 서울 본사로부터 공기를 맞추지 못하면 신상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마흔이 넘어가면 그때부터 쫓아낼 궁리를 하는 아버지 유장풍이다.
- 하는 일 없이 돈만 처먹는 놈들이야.
하는 일에 비해 쓸데없이 연봉만 높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유장풍에게 박진태를 쫓아낼 수 있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특별한 역량을 보여 임원으로 올라서지 못하면 스스로 나가게 하거나 무슨 건수를 잡아서라도 옷을 벗긴다.
“2억 드리죠.”
아마 연봉을 말하는 것이리라.
직장인에게 연봉 2억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다.
문득 한두 푼도 아니고 2억이라는 돈이 어디에서 나올까 궁금했다.
자기 연봉에서 줄 리는 절대 없다.
국내도 아닌 굵직한 해외 건설 현장에서의 자금회전은 원활해야 한다.
즉 자재비 형태로 몇억 정도는 현장소장의 직권으로 언제든지 지출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다에이 경찰서장에 대한 로비는 순전히 이곳 상황을 잘 아는 현장소장의 권한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그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돈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사전이든 사후든 회사에 보고는 하겠지만 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을 원하십니까?”
“아닙니다. 중요한 일인데 며칠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물론 저는 아주 긍정적이고 좋은 결정을 내리리라 믿습니다만.”
그러면서 살짝 웃는다.
여전히 유태수는 침묵했다.
머릿속 정리가 되지 않을 때는 침묵이야말로 가장 그럴싸한 비즈니스다.
***
사이먼이 맥주를 마시다 말고 멈칫하며 입에서 병을 뗐다.
“지금?”
맥주병을 내리더니 정색하여 묻는다.
“박진태 소장으로부터 그런 제의가 왔단 말이오?”
그렇다는 듯 유태수 역시 맥주를 들어 한 모금 마신다.
“그렇군!”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유태수를 바라보았다.
“연락처를 묻는다고 주저 없이 가르쳐준 자넨 이미 오늘의 일을 예상한 것이 분명해. 내 말이 틀린 건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오. 사실 박진태 소장이 내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일은 없었겠죠.”
다에이는 박진태의 이라크 생활의 성공과 실패를 쥐고 있다.
그런 중요한 인물을 데리고 가는 납치범에게 연락처를 묻는다.
아무리 한국인이라고 해도 유태수는 박진태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강력한 요소다.
연락처를 묻는 순간 유태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상황이 떠올랐다.
‘이건 친해질 목적이다.’
유태수는 감각에 맡기기로 했다.
그렇다고 백 퍼센트 감각에 의지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배달부가 자세히 전해 주었다.
누구보다도 아버지 유장풍에 대해 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