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51화 (51/122)

51화 뛰어난 복서는 잽(jab)이 좋다(1)

데이브 유에게서 유태수의 기세를 느꼈다는 말에 오도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앞에 있는 인물은 평범하지 않다.

전문가다.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서도 80% 이상을 정확하게 짚어 내는 정보원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인 것이다.

오하수의 눈을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나 유태수가 국외로 출국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 처음으로 오하수의 말을 불신하게 했다.

밀항을 이용한 국내 탈출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세계적인 용병이 되어 데이브 유라는 이름으로 나타날 만큼 많은 시간이 흘러간 것도 아니다.

데이브 유와 유태수의 시간적 변화가 너무 맞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합시다. 박 소장이 국내로 들어와 버리면 모든 건 돌이킬 수 없습니다.”

“물론입니다.”

오하수가 눈을 치켜떴다.

오도석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

오랜만에 바그다드에 나왔다.

바빌론 로타나 호텔에 유태수가 나타났다.

낡은 청바지에 미군 사막화, 그리고 소매를 걷어 올린 양복 재킷을 걸쳤는데 모술에서와 가장 비교된 부분은 수염이다.

완전한 현지인들처럼 구레나룻이 수북하다.

피부는 사막의 열기에 새까맣게 타서 언뜻 흑인 유전자가 섞인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오랜만입니다.”

두 명의 백인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설태왕은 유태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펀드 매니저들의 눈은 매섭다던데 그렇지도 않군.”

“아아!”

설태왕은 그제야 눈앞에 다가온 사내가 배석대라는 걸 알아보았다.

“오 마이 갓, 어떻게 이토록.”

설태왕은 맞은편에 앉은 유태수를 쉬지 않고 위아래로 훑는다.

“무어, 인사하지. 내가 말한 미스터 배.”

무어란 사내가 부드럽게 웃었다.

“얘기 들었습니다.”

“로버트가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군요?”

“허리케인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허리케인, 내가?”

유태수는 흥미로운 표정을 했다,

“정말입니다. 미스터 배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절대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뭘 말이오?”

“이미 일억 달러의 돈을 투자받았습니다. 불과 삼 개월이 채 못 된 사이에 말이죠.”

엄밀히 말하면 아직 일억 달러는 아니다.

코헨의 부동산까지 매각해 마련한 것이 정확히 팔천이백만 달러였다.

거기에 자신이 천백만 달러 정도를 보탰으니 구천삼백만 달러다.

일억 달러와 구천삼백만 달러는 단위부터가 다르고 받는 사람의 충격의 강도도 다르다.

설태왕은 뛰어난 변장과 자금 동원력에 놀랍다고 추켜세우지만 진짜 당황하는 사람은 유태수였다.

이달 말 뉴욕에서 데브그루 투자 펀드 조성을 위한 발표회가 있다.

투자의 성공은 그 회사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누구냐에 달려 있다.

헌데 놀랍게도 나흘 전 설태왕으로부터 충격적인 전화를 받았다.

- 레이 달리오가 참여합니다.

레이 달리오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헤지펀드사인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대표다.

그의 입에서 뱉어 나오는 건 말이 아닌 돈이다.

그가 농담으로 한 말도 시장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레이 달리오가 데브그루 투자자들을 위한 어떤 움직임이나 그들 앞에 얼굴을 보이는 건 아니다.

단지 투자설명 제안서에 그의 이름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명함이 곧 사실이다.

뉴욕 금융시장에서 달리오의 권위와 신뢰는 종교적 수준이다.

처음에는 사이먼, 즉 CIA가 개입한 줄 알았다.

달리오 같은 거물을 움직이는데 CIA 말고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이먼은 정색하고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로버트 당신도 진정 모른다는 것입니까?”

면전에서 다시 한번 묻는다.

아버지 유장풍을 닮아 지나친 의심병 환자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난 그에게 투자 설명회에 대한 자문을 얻고 싶어 찾아갔죠. 그런데 그는 데브그루 투자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유태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와 달리오는 닮은 점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돈에 대한 집념이다.

단지 아버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모으는 데 반해 달리오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 돈을 버는데도 규칙이 있다.

라는 것이 달리오의 주장이다.

반면 아버지의 생각은 다르다.

- 돈에는 눈이 없다. 챙겨 오는 놈이 임자다.

두 사람 모두 돈 버는 데는 전문가지만 방법과 전략은 전혀 다른 것이다.

달리오는 제도 안에서 돈을 벌어들인다.

그러나 아버지는 돈이 있다면 제도와 상식 정도는 오히려 귀찮은 장애물들일 뿐이다.

장애물은 무조건 치워 버려야 한다.

돈을 버는 데 앞을 막아서거나 방해자가 나타나면 아버지는 단호하게 치우고 청소해 버린다.

중요한 건 쓸어내는 방법이다.

잔혹하고 무자비하다.

인간의 도리 따위는 끼어들 여지가 조금도 없을 만큼 우악스럽게 베어버린다.

달리오에 대한 닉네임은 많다.

금융시장의 교수, 총을 쏘지 않는 사냥꾼, 기부금의 천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물론 그 역시 여타 금융투자들처럼 악명이 없는 것도 아니다.

뉴욕의 암살자, 그가 뛰어들면 수많은 비명이 터진다고 하여 토네이도로 부르기도 한다.

그에 반해 아버지는 불명예스럽게도 황금충(黃金蟲)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벨제붑(성경 속 사탄), 도살자, 반인반수 등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닉네임뿐이다.

둘 사이에 도드라지는 또 하나 차이점은 공존(共存)과 독존(獨存)이다.

달리오는 설태왕의 출발이 성공적이길 바라며 그의 도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설태왕 같은 감각 좋은 펀드 매니저가 자기에게서 떨어져 나간다면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입장에는 결코 플러스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힘을 실어주고 인연을 강조한다는 건 같이 살아갈 줄 아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공존은 인간의 기본적 자세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로지 나(我)이다.

독존(獨存), 나보다 더 돈을 잘 버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손을 통해 나가는 돈만이 진정한 가치이다.

“아직 분명치는 않지만 현재 투자 의사를 갖고 있는 사람만 대략 백여 명으로 금액으로 환산하면 10억 달러 정도입니다.”

한화로 1조 3,000억이다.

“아, 그리고 크라운 대표의 메시지입니다.”

설태왕이 품속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 주었다.

봉투 앞뒤에는 어떤 글씨도 없었고 유태수는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꺼냈다.

촤락!

봉투에 들어 있는 편지지를 펼쳤다.

「어떤 말로도 내 마음이 백 퍼센트 전달될 수 없을 것입니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당신이 내 목숨을 살렸다는 것이죠. 빠른 시일 내에 만나 뵙기를 원합니다. 하대수.」

유태수는 다시 한번 내용을 읽더니 편지지를 접어 다시 봉투 속에 넣고 이번에는 자신의 품속에 담았다.

“태천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어떨 것 같습니까?”

유태수는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눈앞으로 아버지 유장풍의 핏발선 눈이 보인다.

거의 폭발했을 것이다.

***

연락도 없이 들이닥쳤다.

호텔에서 삼왕 자동차의 미국 펜실베이니아 공장 신축 문제로 부지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콰앙!

문이 떨어져 나갈 듯 열리는 소리에 삼왕그룹 이병악 회장은 고개를 들었다.

유장풍 회장이 비서 장민혁을 데리고 들어섰다.

“유 회장!”

“이 회장, 진짜 이렇게 나갈 것이오!”

유장풍은 성큼성큼 다가와 더욱 크게 외쳤다.

“이병악 회자아앙!”

“패트릭, 잠깐!”

그러면서 이병악은 뒤에 서 있는 비서에게 손짓을 했다.

“미스터 패트릭, 잠시만.”

패트릭이라는 펜실베이니아 부지사는 비서와 함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털썩!

패트릭의 자리에 유장풍이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와 약속한 것 잊었소?”

“무슨 약속?”

“흐흐! 이럴 줄 알았다니까. 역시 배신의 달인 이병악다운 시치미로군.”

“유장풍이.”

이병악 회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유장풍의 눈이 활활 타오른다.

“칠 년 전 대한중공업 인수를 놓고 태천과 삼왕이 박 터지게 싸울 때 갑자기 내 집까지 찾아와 뭐라고 했습니까? 태천과 삼왕이 붙어봤자 대한중공업 몸값만 올라갈 뿐이니 이번 한

번만 물러나달라고 했지요. 그래서 난 신사답게 인수 경쟁에서 발을 뺐어요. 그러자 이 회장 당신 우리 집 현관문을 나서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난 그때 했던 말을 분명히

기억합니다.”

- 꼭 갚아드리겠습니다. 내 힘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십시오.

이병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 한 적 있지.”

“그래서 나 또한 그 말을 믿고 크라운의 유동성 위기에 일체 개입하지 말아 달라고 했소. 현재의 기업 규모는 크라운이 과거 대한중공업에 비해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미래를 본다면

수십 배 큰 건수라면서 열흘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요?”

“계속하세요.”

“열흘 뒤 내게 전화하여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삼왕은 개의치 않을 터이니 체하지 않게 잘 드시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맞아요. 그렇게 말했습니다.”

콰아앙!

유장풍이 탁자를 후려쳤다.

그 바람에 커피잔이 굴러 바닥으로 떨어지며 깨진다.

“그런데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이오. 똑똑히 보시오.”

그러면서 쥐고 있던 신문을 탁자 위에 놓았다.

이병악은 이마를 찡그리며 구겨지듯 접힌 신문을 내려다보더니 손을 뻗어 펼쳐 든다.

「크라운 부도 위기 넘겨.」

시선을 가득 채우는 기사 제목을 보더니 이병악이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핫!”

고개를 쳐들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던 이병악이 말했다.

“난 또. 유 회장, 정말 이러실 겁니까? 흔들리는 알짜배기 기업들 자금난에 빠뜨려 제삼자의 이름으로 인수하는 건 유 회장 주특기잖습니까? 할리우드 진출하셔도 되겠습니다.”

“할리우드?”

“보나 마나 시장에서는 데브그루란 투자회사 뒤에 유 회장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실 것이 뻔하니까 이렇게 요란 법석을 떠는 것 아닙니까? 선수들끼리 왜 이러세요. 내가 유 회장을

알고, 유 회장이 내 뱃속을 들여다보는데.”

이병악은 껄껄거리면서 신문 기사를 읽었다.

***

검정 벤츠가 도로 위를 달린다.

유장풍은 어금니를 물고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이 회장 말이 사실일까요?”

조수석에 앉은 장민혁이 상체를 틀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장에서는 제 버릇 남 못 준다면서 크라운이 태천그룹에 눈물의 투항을 했다는 소문이 사실인 양 퍼지고 있습니다. 워낙 앞에서 웃고 뒤로 칼을 날리는 이 회장인데.”

이병악의 말을 믿어도 되겠냐는 뜻이다.

“삼왕은 아니다.”

“네?”

운전기사 채봉식까지 놀라며 룸미러로 바라본다.

“이번 일에 삼왕은 전혀 관련이 없다.”

“이 회장이 약속을 뒤집고 우릴 괴롭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해도 이번은 아니다.”

“그럼 누가?”

유장풍은 딱딱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

메일을 통해 사직서는 보냈다.

아직 회사의 답변은 오지 않았지만 더 이상 태천건설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현장을 떠나 마누라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출퇴근하다 정년을 맞고 싶었다.

꿈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적당히 불의와 타협하고 노동자보다는 회사 쪽에 붙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

웬만한 사건 사고는 철저히 가렸고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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