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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벌집 청소부-52화 (52/122)

52화 뛰어난 복서는 잽(jab)이 좋다(2)

그 정도 더러움을 밟지 않고 어떻게 출세를 한단 말인가.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정도는 모든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행하는 일들이라고 생각했다.

평범하고 단순한 그 꿈이 자신에게는 과욕이었을까.

책상을 깨끗이 정리하고 감회가 깊은 시선으로 사무실을 둘러본다.

부소장 전통수를 비롯한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다.

박진태는 직원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고생 많았어요. 김용석 대리.”

김용석 대리는 착잡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꼭 이렇게 가십니까? 한 번 더 재고하시죠.”

박진태는 자신을 위로하듯 말하는 김용석 대리를 향해 웃어 보이고 정민출 과장에게로 향했다.

슥!

박진태가 손을 내밀었다.

“소장님!”

정민출이 더듬거린다.

하지만 다음 말을 하지 못하도록 박진태가 가로채듯 말했다.

“우리 정 과장은 나 같은 사람 되지 말아요. 성실하고 능력이 좋으니 이사님 소리는 들어야죠.”

탁!

어깨를 한번 토닥여 주었다.

이어 송만술을 포함해 배석대와 같이 이라크에 왔던 사내들과 차례대로 악수하며 격려했다.

“입사하자마자 이런 곳으로 발령 났다는 건 유장풍 회장님의 기대가 크다는 뜻입니다. 열심히들 하세요.”

송만술의 눈이 좁아졌다.

격려와 칭찬이라기보다는 왠지 비아냥처럼 들린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 같은 꼴 당하지 말고 일찍 태천을 떠나라는 조언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박진태는 악수를 하고, 때로는 제 감정에 함몰되는 듯 직원을 끌어안기도 했다.

이어 마지막으로 텅 빈 책상 앞에 섰다.

경비팀장 데이브 유라는 명패가 있다.

스윽!

명패를 들어 올렸다.

싫다는 걸 자신이 직접 만들어 선물한 것이다.

유태수는 지금 바그다드에서 이곳으로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

‘배석대를 닮았다고.’

직원들은 물론이려니와 한국인 근로자들까지 이구동성으로 배석대를 떠올릴 만큼 여러 면에서 흡사했다.

자신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들었던 명패를 다시 제자리에 놔두고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갑니다.”

직원들이 따라 나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어느새 먼저 나온 김용석 대리가 차에 시동을 걸어 놓고 있었다.

김용석 대리는 박진태의 캐리어를 받아 재빨리 트렁크에 실었다.

박진태는 전통수 부소장과 다시 한번 악수를 한 뒤 판도라 SUV 뒷좌석에 올라탔다.

탁!

김용석 대리가 문을 닫아주고 재빨리 운전석으로 올라갔다.

부우웅!

차는 사무실을 떠나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손을 흔들었고 박진태를 태운 판도라 SUV는 경비실을 지나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본사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신임 소장을 보낸답니까?”

정민출이 부소장 전통수를 향해 물었다.

“모르지!”

전통수는 곧바로 몸을 돌려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정민출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딸칵!

라이터로 불을 붙여 힘껏 한 모금을 빨아들이더니 토해내듯 연기를 내뿜었다.

후우우!

한참을 서서 담배를 피우더니 정민출이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지금 택시로 떠났습니다.”

간단한 한마디를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

툭!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신고 있던 작업화로 짓이겨 버린다.

***

멀리 석양이 떨어지고 있었다.

선홍빛 이글거리는 석양 속에서 갑자기 까만 점 하나가 나타났다가 까만 점에서 뭉게구름이 피어나더니 석양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차량이다.

달리는 차량이 만들어낸 엄청난 모래 먼지가 석양을 덮어 버린 것이다.

흰색의 포드 익스플로러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렸는데 유태수가 핸들을 잡고 있었다.

원래는 비행기로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어젯밤 모술 공항에 십여 발의 박격포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포드 익스플로러를 렌트하여 달려오는 것이다.

츄하항!

모래 위를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

“지금 출발했습니까?”

유리를 올린 유태수는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른손에 핸드폰을 쥐었는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넉넉잡고 두 시간이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가급적이면 저녁도 룸서비스를 이용하시죠. 외출은 절대 안 됩니다.”

단호했다.

“물론입니다.”

전화를 끊은 유태수는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차량의 유리를 내렸다.

차 안의 에어컨 냉기를 한 번에 씻어 갈 만큼의 뜨거운 열기가 밀려들었다.

모술 하트라 호텔 주차장으로 포드 익스플로러 한 대가 들어서고 있었다.

지하 2층 주차장에 차가 멈추고 라이트가 꺼졌다.

딸칵!

시동까지 꺼지면서 차 문이 열리고 유태수가 내렸다.

전력난이 심한 관계로 지하 주차장의 전등은 드물게 켜져 있었고 어둑한 통로를 걸어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흘긋!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고 고개를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때마침 내려오고 있었는데 8층이다.

엘리베이터는 4층에서 한 번 멈췄다가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층에서 멈추지 않고 곧장 지하 2층에 멎었다.

쨍!

유태수는 내리는 사람들을 위해 옆으로 비켜섰다.

엘리베이터에서는 모두 네 사람이 내렸다.

네 명 모두 터번을 둘렀는데 세 명은 동아시아계로 보였고 맨 나중에 나온 사내는 이곳 현지인이다.

네 사람이 내린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유태수는 8층을 눌렀다.

늦은 시간 때문인지 엘리베이터는 멈추지 않고 한 번에 8층까지 올라갔다.

8층에서 내린 유태수는 박진태가 묵고 있는 815호를 향해 복도를 걸어갔다.

이곳에서 오늘 밤을 묵고 내일 같이 바그다드로 이동할 것이다.

박진태가 인천행 비행기를 타는 그 순간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다.

여러 가지 상황을 보건대 뭔가 태천 쪽에서 모종의 작전이 발동되었음이 틀림없다.

모종의 작전은 위해(危害)일 가능성이 컸다.

딩동!

벨을 눌렀다.

안으로부터 반응이 없자 다시 한번 벨을 눌렀는데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유태수는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번호를 눌렀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는다.

몇 번에 걸쳐 전화를 끊었다 다시 번호를 눌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유태수는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걸 간파하고 호텔 프런트로 전화를 하려다 멈칫했다.

아직 어떤 상황이 발생한 건 아니다.

박진태의 처지가 아슬아슬하기 때문에 스스로 다급해 하는 것이다.

괜히 전화를 받지 않는다거나, 벨을 눌러도 반응이 없다면서 무슨 일이나 생긴 듯 경찰을 부른다거나 호텔 측에 협조를 구하자면 시끄러워진다.

박진태는 최대한 조용히 떠나야 하는 입장이다.

카드식 도어다.

슥!

유태수는 주머니에서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물건을 꺼냈다.

언뜻 큐브의 한 단면처럼 보였는데 정사각형의 조각이 가로세로 네 개씩 모두 열여섯 개가 붙어 있었다.

스탬 큐브로 불리는 디지털 전자식 문을 열 수 있는 이름하여 만능 키인 셈이다.

스탬 큐브는 자석과 전기를 갖고 있는 특별한 물건으로 CIA에서 건네준 것이다.

- 스탬 큐브에서 흘러나가는 자석의 N극과 S극, 전기의 음극과 양극이 키 내부를 완전히 마비 시켜 버리는 원리요.

찰칵!

소리가 나며 손잡이를 당기자 문이 열렸다.

“소장님.”

객실은 깨끗했다.

“박 소장님!”

반응이 없다.

유태수는 재빨리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훗!”

물이 반쯤 차오른 욕조에 박진태 소장이 알몸으로 잠겨 있었다.

그런데 죽었다.

턱밑에서 핏줄기가 보였고 터져나간 뇌수와 머리털이 욕조 뒷벽을 완전히 시뻘겋게 덮어 버렸다.

오른손에 권총이 들려 있다.

욕실에 앉아 스스로 총구를 턱밑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파팟!

갑자기 유태수의 눈에서 번갯불이 튄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 몇 장을 찍은 뒤 재빨리 객실을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로 갈까 하다 신속하게 비상계단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어 달렸다.

계단을 막 내려가려는데 쨍 하며 복도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렸다.

슬쩍 얼굴을 벽에 붙이고 내다 보았는데 권총과 AK를 든 사복 차림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이라크 경찰이다.’

유태수는 최대한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삽시간에 1층에 도착하고 로비 쪽의 상황을 살폈다.

제복을 입은 경찰관 둘이 권총을 차고 있었다.

재빨리 지하 2층까지 내려간 유태수는 차의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주차장을 빠져나오고 20초대 지나지 않아 경찰차 한 대가 출구를 막아 버렸다.

주르륵!

8층을 나와 차를 몰고 호텔 밖까지 나오는데 3분도 채 걸리지 않은 듯했다.

부우웅!

유태수는 차를 몰아 사무실을 향해 달렸다.

***

경비들이 유태수의 차량을 확인하고 차단기를 올려준다.

“팀장님, 소장님은 오늘 낮에 떠나셨습니다. 내일 바그다드로 간 다음 인천 비행기를 탈 모양입니다.”

“일이 틀어졌소.”

차단기를 지나자 차량을 세우고 유태수가 내렸다.

“광기 형, 담배 하나.”

경비실 근무로 돌아온 정광기가 자신이 피우던 담배를 건네주고 불도 붙여 주었다.

“왜, 뭔 일 있어?”

“죽었어요.”

“누가?”

“박진태 소장님!”

“누가 죽어요?”

화장실을 다녀오던 양성칠이 놀라 묻는다.

담배를 피워 문 유태수의 눈이 번들거렸다.

***

태천건설 사옥에 긴장이 흐른다.

회의실 전면 벽에 「이라크 사태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그 앞으로 연단과 테이블과 마이크가 놓여 있다.

수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모두가 사장 정철산이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옆 사람과 수군거렸다.

“무슨 기자회견이야?”

“글쎄, 이라크 사태라고 하는 걸 보면 전번 인질 납치 문제와 관련된 것 같은데.”

기자들이 웅성거리고 있을 때 앞문이 열리고 비서 한 명과 태천건설 정철산 사장이 나타났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워낙 중요한 사건이다 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저희 사장님으로부터 이라크 사태에 대한 발표가 있겠습니다.”

“이라크 사태라고 하면 전번 인질들 죽음에 관계된 것입니까?”

“들어보세요. 여러분의 궁금증이 풀릴 것입니다.”

비서가 한쪽으로 물러나고 정철산이 단상의 마이크 앞으로 다가왔다.

“태천건설 사장 정철산입니다.”

그리고 옆으로 비켜 나와 기자들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정철산은 품속에서 가져온 A4용지를 꺼내더니 읽기 시작했다.

“먼저 나로 인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고 윤기철 씨와 고도춘 씨, 그리고 두 분 유족들에게 마음을 다해 사죄를 드립니다. 태천건설 이라크 현장 노동자들의 납치와 살해 사건은 모두

나 박진태가 꾸민 일입니다.”

“박진태 소장이!”

“마…… 맙소사, 정말입니까?”

기자들이 놀라 소리쳤지만 정철산은 계속 읽어 내려가기만 했다.

“회사로부터 받아야 하는 공기 단축에 대한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심지어 공기 내에 완공하지 못하면 그에 대한 책임 추궁이 있을 것을 회사 간부들이 공공연하게 암시했죠.

책임 추궁, 그건 곧 명예라는 이름을 붙인 퇴직이죠. 쫓겨나지 않기 위해 사막의 요람을 끌어들여 근로자 둘을 납치한 거죠. 그들은 돈이 필요했고 난 쫓겨나지 않는 안전장치를 원한

것입니다. 하지만 구출과정에서 그만 두 분 모두 희생당하고 만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나의 욕심이 만들어낸 참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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