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53화 (53/122)

53화 피바람(1)

“허허험!”

정철산은 헛기침을 한 뒤 계속 읽어 내려간다.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 드립니다. 모든 건 나의 욕심이 만들어낸 참극이며…….”

“이거야 원.”

“진짜!”

기자회견장은 충격으로 빠져들었다.

정철산은 자신이 읽은 내용의 유서를 기자들의 카메라에 보이도록 펼쳐 보였다.

파팍!

퍼펑!

카메라가 정신없이 터졌다.

“박진태 씨의 유서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필적이 맞는다는 국과수 감정까지 나왔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정철산은 자신보다 더 흥분한 기자들을 달래는 여유까지 보이면서 차분하게 대답해 주었다.

탁!

오도석이 텔레비전을 껐다.

유장풍은 소파에 앉아 있고 오도석은 들고 있던 리모컨을 내려놓는다.

“한 방에 정리됐습니다.”

오도석이 야심 차게 입을 열었다.

지이잉!

그때 핸드폰이 요동치고 오도석은 살짝 꺼내 문자를 확인했는데 눈이 커졌다.

“시위단체가 모두 철수했다고 합니다. 보안과장의 문자 메시지입니다.”

뉴스타도의 폭로 이후 20여 시민단체에서 진상규명과 유장풍 회장 구속수사를 주장하며 날마다 사옥 앞에 진을 치고 시위를 벌였다.

“박 소장 시신은?”

“이달 22일쯤 인천공항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국내 병원에 시신이 안치되면 회사를 대표해서 제가 한 번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유장풍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상 위를 스윽 한 번 훑는다.

“퇴근하시겠습니까?”

“몸이 찌뿌둥하구먼.”

“채 과장, 차 대기시켜. 회장님 퇴근이야.”

운전사 채봉식에게 전화로 지시를 내린 오도석은 몇 걸음 앞서가는 유장풍을 따라갔다.

“오 팀장!”

앞서가던 유장풍이 몸을 돌렸다.

“탈 없도록 잘해. 여기서 일 생기면 그땐 죽도 밥도 안 된다고.”

“염려 마십시오.”

탁!

두 사람이 회장실에서 사라졌다.

***

사사삭!

컴퓨터 화면에 사람의 얼굴이 그려지고 있었다.

“눈썹이 좀 더 짙어요.”

백인 사내가 컴퓨터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있고 유태수는 뒤에서 팔짱을 낀 채 특징을 잡아주고 모자라는 부분을 지적해 준다.

CIA 비밀 안가에서 어젯밤 엘리베이터를 내린 세 명의 동아시아계 사내들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유태수 옆으로는 사이먼이 서 있었다.

“됐어요. 아주 비슷해요.”

몽타주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스스슥!

그려진 몽타주가 사진처럼 인쇄되어 나왔다.

유태수는 세 장 모두를 집어 들고 살핀다.

세 사람의 머리에는 터번까지 그려져 있었는데 유태수가 빙긋 웃는다.

“왜, 아는 친군가?”

“이렇게 만들어 놓고 보니 세 사람 모두 기억이 납니다.”

아는 사람들이다.

첫 번째 사내는 처음 인질 협상을 위해 죽은 오무철과 같이 타고르 마을을 찾아갔던 전주식이다.

당시 그는 총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나중에 오무철의 시신을 찾는 데 도와달라며 안내를 부탁한 뒤 자신에게 총을 겨눴던 김평대와 곽철종이다.

“서기관님!”

문이 열리고 폴이 들어왔다.

“전주식이는 박덕배라는 이름으로 이라크 서부에서 석유와 가스 파이프 라인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삼왕물산 토목계장이기도 합니다.”

팟!

유태수의 눈이 빛난다.

재빨리 사이먼 곁으로 다가가 폴이 건네준 서류를 어깨너머로 본다.

인쇄되어 나온 건 몽타주지만 폴이 가져온 서류에 붙은 사진은 진짜 전주식의 얼굴이다.

“역시 대단하군.”

갑작스러운 사이먼의 극찬에 유태수가 놀란다.

“스치듯 보았을 뿐인데 보라구, 몽타주와 실제 사진상의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아.”

사이먼은 유태수의 눈썰미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유태수는 사이먼이 넘겨준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인쇄되어 나온 몽타주와 비교했는데 거의 일치할 정도의 수준이다.

자신이 봐도 놀랍다.

안목(眼目)은 곧 기억력으로 이어진다.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을 쉽게 잊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기억력이 좋음을 의미한다.

“유서는 어떻게 썼을까요?”

인터넷 한국 언론을 보면 박진태의 필적이라는 걸 국과수에서 검증했다고 밝혔다.

“쉽지!”

사이먼이 빙긋 웃었다.

“총구를 귓가에 대고 위협하면 대부분 쓸 수밖에 없지. 또 한 가지는 박진태 소장의 필적이 담긴 서류를 가져와 컴퓨터에 입력한 뒤 동일한 필체로 유서를 작성하는 거지.”

“컴퓨터가 알아서 한단 말이군요?”

“위조 대필은 굉장히 쉬운 일일세.”

유태수는 서류를 챙겨 안가를 빠져나왔다.

***

국내도 아닌 해외 건설 현장이기 때문에 단 하루도 현장소장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는 것이 본사의 뜻이었다.

곧바로 전통수를 소장으로 승진시켜 박진태의 자리를 메운다.

“데이브.”

전통수가 차 한잔하자면서 불렀다.

사무실은 텅 비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커피잔이 놓였다.

“우린 데이브에게 굉장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 데이브가 아니었다면 회사는 또 한 번 전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렸을 것입니다.”

몰래 사막을 가로질러 오던 납치범 셋 중 둘은 유태수의 총에 죽었고 한 명은 노모와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서울 본사에서는 데이브의 능력에 경의를 표한다는 말이 나왔죠.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뭐죠?”

“오로지 외부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길 바랍니다.”

유태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외부의 적.’

유태수는 살짝 웃는다.

전통수의 말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회사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일체 개입하거나 관심을 갖지 말라는 뜻이다.

박진태 소장을 자재 창고에 처박아 놓고 하던 조사를 자신이 가로막은 적이 있었다.

물론 박진태 소장에게 모든 덤터기를 씌우려는 오도석 팀장의 지시가 있었음을 간파했기 때문에 나선 것이다.

“알겠습니다.”

유태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데이브 덕분에 이제 우리 공사는 미친 듯이 달려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유태수도 같이 따라서 크게 웃었다.

***

송만술이 맥주 한잔하잔다.

토요일 오후다.

데이브 유라는 이름으로 숨기고 있지만 정말 오랜만에 이라크에 온 동기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송만술, 이승수, 차만오, 고주식, 그리고 유태수,

처음 이라크에 올 때는 너무 긴장하여 군대 신병처럼 굴었는데 이제는 자못 연륜도 풍기고 여유가 느껴진다.

모술 쿠르드족 거주 지역 「인샬라」라는 조그만 바(BAR)에 모여 앉았다.

내일이 일요일인데다 모처럼 마련된 술자리여서인지 술을 마시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다.

“데이브!”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고 모두가 불콰한 얼굴이다.

“배석대라는 사람 압니까?”

“또 그 얘깁니까?”

유태수는 빙긋 웃었다.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모두가 하루에도 수십 번 배석대의 분위기가 풍긴다고 말한다.

그중 이들 넷은 단순한 흥미로 묻지 않았다.

그들 눈에는 보고 또 봐도 얼굴만 약간 다를 뿐 백 퍼센트 배석대라는 것이었다.

쭈욱!

유태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맥주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난 지금도 믿지 않아.”

술이 한잔 들어가서인가 송만술이 단호히 말했다.

“만술아, 그 소린 이제 그만 하자.”

차만오가 쏘아보듯 바라보았다.

“회사에서 지침까지 내려왔잖아. 배석대는 북한 보위부에 끌려간 것이 틀림없으므로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고.”

“회사도 그래. 왜 말을 못 하게 하냐고. 아니, 의심할 수도 있고 믿는 사람도 있는 거잖아. 난 믿어지지 않는다니까?”

“그래, 좋다. 만술이 네가 그토록 석대가 북한 보위부에 끌려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뭐야?”

차만오가 물었지만 고주식과 이승수도 무척 궁금한 듯 눈을 빛낸다.

“이유라니? 정말 석대를 몰라서 묻는 거냐? 석대 걔가 우리와 같냐. 연수원 시절부터 그 자식은 달랐어. 승수 네가 말했지? 석대한테서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묘한 기운이

풍긴다고, 어쩔 땐 나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 때가 있다고 했지?”

“사실이야. 최소한 난 그렇게 느꼈어.”

고주식이 중얼거렸다.

“나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석대는 우리와 좀 다른 놈이야. 우리 중 유일하게 SKY를 나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서울에 있는 대학도 못 나온 녀석이야. 그런데 우리 눈치 보는 것

봤어. 웬만한 사람 같으면 우리 스펙에 질린다니까. 그런데 석대를 봐. 오히려 우릴 리드하잖아.”

송만술이 말했다.

“사실 나도 뭔가 있다고 본다.”

침묵하던 이승수가 말했다.

“있어. 석대가 사라진 데에 뭔가 있다고.”

송만술이 단호히 목소리를 높였다.

“회사에서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거냐?”

차만오가 물었다.

“며칠 전 자살한 박진태 소장도 그래. 갑자기 왜 자살을 해?”

송만술이 핏대를 올렸다.

“이곳 현장에서 있었던 모든 사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사를 그만둔 분이 왜 호텔 방에서 방아쇠를 당기냐고?”

“전번 근로자 납치 사건이 박 소장과 사막의 요람이 손잡고 조작한 일이라잖아.”

“야, 차만오. 너 그 말 믿냐? 진짜 믿냐고?”

송만술이 물었다.

“안 믿어.”

“뭐라고?”

“회사 발표 나도 안 믿는다고.”

“그런데 왜 넌 자꾸 믿는 것처럼 말을 하지? 이유가 뭐야?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해야지.”

콸콸콸!

차만오가 고개를 쳐들고 거칠게 맥주를 마셨다.

커억!

트림을 하며 손등으로 입가에 흘린 맥주를 닦으며 눈을 빛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시나리오를 쓰려면 좀 더 치밀하고 현장감 있게 쓰든가. 곧 죽어도 씨발 나 Y대학 나온 놈이다. 좀 배웠다는 이유로 회사의 발표가 죽어도 이해가 안

된다니까? 그래서 미칠 것 같아. 도대체 날 뭐로 보고 저따위 발표를 하는가. 그래서 너희들에게 묻고 또 묻는 거야. 왜 안 믿는 것이냐? 믿어라. 믿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좀 믿자.”

억지로 믿어야 하는 현실이 너무 괴로운 것이다.

“그래. 우리 결론을 내리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네 사람은 절대 회사 발표 안 믿는다. 이의 있는 사람?”

송만술이 말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믿지 않는다고 하여 우리가 회사와 어떤 전선(戰線)을 형성하자는 건 아냐. 다만 우리들 중 또다시 석대 같이 갑자기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매사에 신중하자는

거지.”

삐이걱!

그때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병을 내리던 유태수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에 터번을 두른 세 명의 사내가 들어섰다.

그들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주인을 부르더니 맥주 세 병을 주문했다.

“한 병씩 더?”

그러면서 송만술이 유태수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은 숙소로 돌아가면 곧바로 누워 자면 되지만 유태수는 경비팀장이다.

야간 근무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에게는 정해진 휴식이라는 건 없다.

상황이 발생하면 한밤중이든 휴일이든 언제든지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오케이!”

유태수는 좋다며 흔쾌히 대답하고 재빨리 볼펜을 꺼내 손바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하면서 내 얘기 잘 들으세요.」

순간 네 명 모두 깜짝 놀란다.

「웃어요, 목소리 높여 떠들고.」

그때 주인이 맥주 네 병을 가져다 놓았다.

“땡큐!”

“앗쌀람 알라이쿰(신의 평화가 그대와 함께!)”

주인은 호들갑스러운 인사에 빙긋 웃으며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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