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55화 (55/122)

55화 귀거래(1)

사이먼이 창문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송만술과 고주식은 무사하네. 나머지 둘은……”

사이먼이 길게 한숨을 쉬더니 이승수와 차만오가 희생되었다고 했다.

유태수는 눈을 감아 버렸다.

- 무사 귀국을 기원하며 지화자!

안전한 귀국을 소원하며 건배했다.

그만큼 이곳은 위험하고 생사가 절박한 도시였다.

모두가 적이다.

재건이라는 목표를 갖고서 민간기업으로 들어온 그 누구도 이라크 국민들에게는 적일 뿐이다.

이제 막 합격하여 들어온 일행에게는 어떤 선택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원했던 태천그룹에 입사했다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했고 이라크는 여전히 여행 금지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까라면 까야지.’

그렇게 왔다.

***

이라크에 진출한 많은 민간기업들이 크고 작은 사고에 휘말리고 있었다.

막대한 몸값의 용병들을 쓰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공사 환경이 흔들렸다.

한화 오십억에서 백억 정도가 용병들 몸값으로 지급되는 마당이니 어느 기업주인들이라고 속이 쓰리지 않겠는가.

가급적이면 그들을 쓰지 않고 안전을 확보해보려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한국에서 데려오고 싶어도 지원자가 없었다.

국내에서 받던 임금의 두 배를 준다고 해도 고개를 젓는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어쩔 수 없이 용병들을 고용했다.

물론 용병의 효과는 컸고 공격당하는 기업들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유독 태천건설만 살고 죽는 건 팔자소관이라며 끝까지 외면했다.

그뿐 아니라 납치된 근로자를 자신들 손으로 정리하고 끝내 박진태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웠다.

「대한민국(Korea) 청소 대상자(cleaning target)」

「태천그룹 유장풍」

청소명단 맨 위에 올라 있던 아버지 이름.

사실 이라크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솔직히 그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착하고 어진 기업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도 결코 따뜻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생각이 드는 한 가지는 가족에게도 저토록 냉정한데 직원들에게는 얼마나 쌀쌀맞을까였다.

그러나 이제는 대한민국 청소 대상자 1위에 오른 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유장풍은 차라리 금수(禽獸)라는 말을 들었는데 진짜다.

딸칵!

문이 열리고 폴이 들어섰다.

“역시 데이브 예상이 맞아요. 세 사람 모두 KCIA 요원들이었어요. 얼굴은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들이었고.”

유태수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 참, 내일 오후 비행기로 두 사람은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부상을 입은 김평대 씨는 여기서 일주일 정도 치료를 한 뒤 경과를 봐서 귀국할 듯싶습니다.”

“돌아간다고?”

“철수하는 거죠. 엄밀히 말하면 교체하는 겁니다. 이유야, 어쨌든 이쪽에 너무 많이 노출되었으니까?”

몇 초만 늦었어도 확인 사살까지 당했을 것이다.

사이먼은 자신들의 지원이 닿으려면 최소 7분에서 8분을 계산했다.

그 시간이면 유태수는 죽는다.

결국 경찰에 협조를 요청하여 일단 출동만이라도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경찰이 도착하고 45초 만에 CIA 지원부대가 왔지만 경찰이 오지 않았다면 일은 자신이 죽으면서 끝났을 것이다.

“흐흠! 잠시 혼자 있고 싶습니다.”

사이먼과 폴이 병실을 나갔다.

탁!

병실 문이 닫히자 유태수는 오른손으로 스위치를 눌러 침대를 약간 올렸다.

세워진 상체로 먼동이 터 오는 음산한 사막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일말의 혈육지정은 있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지만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죠.

내 아버지였습니다.

누군가 부모는 하늘이라고 했죠.

하늘 같지는 않았어도 날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이다는 마음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술좌석에서 누군가 아버지를 욕하면 참을 수 없는 분노도 느꼈죠.

수많은 노동자들이 사옥 앞에서 농성을 해도 난 한 번도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아버지였으니까요.

그래도 우리 아버지인데 하며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 마음이 완전히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망설임 없이 아버지를 청소해야겠다는 지독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단 말입니다.

주륵!

눈물 한 방울이 흘러 내렸다.

‘지랄도 가지가지라더니.’

슥!

스스로 흘리는 눈물이 어이없음에 유태수는 웃었다.

***

검정 밴 한 대가 멈췄다.

뒤쪽 트렁크가 열렸고 잠시 후 병원으로부터 흰 천에 덮인 관이 이동식 침대에 실려 나왔다.

관은 모두 두 개.

이승수와 차만오의 시신이 차에 실려 공항으로 이동하려는 것이었다.

주위에 십여 명의 태천건설 직원들이 하얀 장갑을 끼고서 운구를 하고 있었다.

쾅!

관이 실리고 밴의 뒷문이 닫혔다.

부우웅!

밴은 천천히 병원을 빠져나갔고 유태수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딸칵!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때 송만술이 다가왔다.

침통한 표정이었는데 담배를 물고 불 좀 달라는 듯 다가왔다.

유태수는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주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었고 정민출이 이쪽을 보고 말했다.

“안 타?”

두 대의 판도라 SUV가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로 들어갈 테니 먼저 가세요!”

송만술이 소리쳐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이 두 대의 SUV에 분승하여 병원을 떠났다.

“사표 써야겠습니다.”

송만술이 불쑥 말했다.

“연봉이 많으면 뭐 합니까? 이런 회사가 어떻게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기업이 되었는지…….”

“송 형!”

유태수가 입을 열었다.

“나도 한국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2년 계약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만두면 옷 벗는 거죠. 그래도 손톱만큼의 애정은 있었는데 완전 넌더리가 납니다.”

“뭐가요?”

알 수 없는 엉뚱한 말에 송만술이 눈을 치켜떴다.

넌더리가 나면 자신들이 나야 한다.

“난 내일 당장 서울로 들어갑니다. 언제든지 연락하십시오. 다른 건 몰라도 송 형이 그토록 먹고 싶다는 소주는 실컷 사 드릴 테니까.”

틱!

담배꽁초를 튕겨 버리고 유태수는 천천히 걸어갔다.

***

오도석은 겨울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겨울의 한강은 꽁꽁 얼어 있었고 호텔 커피숍 손님들의 옷차림은 두껍다.

연 사흘째 서울에 한파 경보가 발령 중이다.

저벅저벅!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장 차림의 설태왕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도석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가까이 다가온 설태왕에게 손을 내민다.

“어서 오십시오. 오도석입니다.”

“로버트 설입니다.”

두 사람은 힘차게 악수를 한 뒤 마주 보며 앉았다.

그때 여직원이 커피를 가져왔다.

설태왕은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씨익 웃는다.

왜 웃느냐는 듯 오도석이 바라보자 설태왕이 덤덤하게 말했다.

“쓰군요.”

멈칫!

커피가 쓰다는 말에 오도석의 눈이 빛난다.

그냥 뱉어낸 말이라기보다는 뭔가 의미가 들어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아무래도 미국 커피와는 조금 다르겠죠.”

“그렇습니다. 미국 커피는 쓰지 않습니다. 매우 달짝지근합니다.”

“그럼 믹스커피로 한잔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 우리 한국에도 달짝지근한 커피 있습니다.”

“아닙니다.”

“데브그루에서 크라운을 살려 주었더군요?”

“아닙니다. 투자할 기업을 찾던 우리 눈에 크라운이 보인 거죠. 다행히 하대수 대표님께서 우리의 조건을 거침없이 수용하여 매우 만족합니다.”

“월가(맨해튼 남쪽 금융가 월스트리트를 줄여 월가로 부름)에서도 데브그루 투자회사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더군요.”

“누구나 시작은 보잘것없죠.”

“우리에게 크라운으로부터 넘겨받은 지분을 팔 생각은 없으십니까?”

“크라운은 태천자동차 하청기업이잖습니까?”

한마디로 태천자동차가 크라운의 목줄을 쥐고 있는 셈인데 지분을 살 필요가 있느냐는 뜻이다.

“소유사와 거래사는 다르죠. 데브그루에서 투자한 액수의 두 배를 드리죠.”

“정말이십니까? 태천이 크라운의 경영권을 노린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 모양입니다?”

“경영권은 관심 없고 단지 주주가 되고 싶은 것이죠.”

“주주라 아주 좋은 말씀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가진 지분에다 우호주 조금만 얻어내면 크라운 경영권 쉽게 흔들 수 있습니다. 진심인 듯한데 좋습니다. 다섯 배 주시죠.”

“다섯 배라면 오천억?”

씨익!

설태왕이 웃음을 지었다.

“지금 크라운의 주가가 얼마죠? 어제 종가로 칠만 이천 원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현재 주가로 계산해서 다섯 배?”

“당연한 것 아닙니까? 물건을 당시 시세로 거래하지, 오래전 가격으로 계산기 두드리는 장사꾼도 있습니까?”

부도설이 돌면서 곤두박질친 크라운의 당시 주가는 겨우 오천 원을 넘나들었다.

오천 원일 때 천억 지원설이 터졌다.

꿀꺽!

오도석은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좀체 표정 변화가 없어 냉혈한으로 불리는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섯 배를 주시면 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설태왕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오도석은 돌덩이처럼 굳은 얼굴로 커피숍을 나가는 설태왕을 바라보았다.

꾸울꺽!

목이 마른다.

현재 주가로 1천억이 1조 2천억이 되었다.

그런데 다섯 배면 6조를 달라는 뜻이다.

장사 제대로 하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천억을 투자해 불과 한 달 보름 만에 6조 원을 내놓으라며 손을 벌린다.

쭈욱!

커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셨다.

그런데도 심한 갈증이 밀려온다.

***

벤츠 한 대가 공항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차 안에서는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록 음악이 흘러나왔고 핸들을 잡고 있는 설태왕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흥에 겨워했다.

슥!

핸드폰 시계를 확인한 설태왕이 화들짝 놀란다.

“이런, 서둘러야겠군.”

부아앙!

액셀을 밟으며 빠르게 사라졌다.

입국장은 복잡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 속에 선글라스에 야구모자를 쓴 유태수가 보였다.

“배!”

설태왕이 재빨리 다가갔다.

유태수는 손을 내밀어 설태왕과 악수를 했다.

“기내에서 서울이 굉장히 춥다던데?”

겨울옷은 없다.

부랴부랴 경유지 이스탄불에서 가죽 재킷 하나를 사서 입었는데 설태왕이 말했다.

“차로 갈 텐데 그 정도 차림이면 충분하지요.”

유태수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아랫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어찌 됐소? 오 팀장 만나기로 한 것 말이오?”

이미 전화로 태천그룹에서 접촉 제의가 왔다는 보고를 했다.

설태왕이 빙긋 웃었다.

“말씀 그대로던데요. 두 배 줄 테니 팔라는 거죠.”

“두 배?”

유태수가 걸음을 멈췄다.

주가가 열다섯 배 넘게 폭등했는데도 두 배를 준다는 건 크라운을 기어이 손에 넣고 싶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거래방식은 그렇다.

갖고 싶은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고야 만다.

- 다섯 배 불러요.

- 네에?

전화 통화를 하는 설태왕의 눈이 커졌다.

거래에 대한 모든 걸 일임하였기 때문에 많든 적든 모든 판단은 자신의 몫이다.

자신도 두 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섯 배를 요구하라니 설태왕은 주저앉을 만큼 놀라고 말았다.

유태수가 웃는다.

“보나 마나 내일 아침에 연락이 올 거요. 다섯 배 값에 사겠다고.”

“설마.”

“갑시다!”

유태수는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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