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56화 (56/122)

56화 귀거래(2)

서울이다.

살기 위해 떠났다가 살기 위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주택가에 멈췄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둘이다.

유태수와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자신을 도망자의 삶에서 극적으로 탈출시켜준 친구 최호민이었다.

이미 서울에 거처할 곳을 부탁했고 집을 보러 온 것이다.

눈에 익은 산이 우뚝 서서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 바로 북한산이었다.

구기동 깊숙이 들어왔는데 최호민이 대문이 굳게 잠겨진 조그만 단독주택 앞에 멈췄다.

“이 집이야.”

그러면서 부동산 주인에게 받은 열쇠라면서 대문을 열었다.

끼익!

대문을 열고 들어간 유태수는 마당을 살폈다.

넓지 않은 마당에는 이틀 전에 내린 잔설이 남아 있다.

빙 둘러쳐진 담벼락을 따라 나무들이 심겨 있었는데 하나의 나무에 시선이 꽂혔다.

“저거 매화 아냐?”

“맞아, 집주인 말로는 이백 년이 넘었대. 저 매화나무가 북한산에 심겨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데라우치 총독 운전기사 나카무라 놈이 개인 소유하기 위해 이곳에 터를 잡고 집을 지은

것이 이 집의 시작인가 봐. 당시도 백 년이 넘었다고 했으니 그렇게 됐지.”

유태수는 천천히 산바람에 흔들리는 매화나무로 다가갔다.

밑동이 두툼하고 얼핏 죽은 고목처럼 보인다.

- 멋지다.

마당 양지쪽에 매화나무가 있었다.

겨울눈이 그치기도 전에 피는 매화를 보며 유장풍은 무척이나 흡족해하며 대화를 하듯 혼잣말을 했다.

- 널 보며 옛 선비들은 빼어난 운치와 격조가 있다고 했는데 나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얹어주고 싶다. 넌 요녀(妖女)다. 철석간장의 사내 나 유장풍의 마음을 이리도 흔드니

말이다.

매화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은 지극했다.

끔찍하다 할 만큼 아낀다.

그런데 전세로 거주할 남의 집이지만 쉽게 보기 힘든 고매(古梅)가 심겨 있다.

만약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집을 통째 매입하고 말 것이다.

이층 단독주택은 새로 들어올 사람을 대비하여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바로 내일부터 살면 돼.”

유태수는 상당히 마음에 드는 듯 표정이 환하다.

바깥으로 나온 최호민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런데 말보로 레드였고 유태수가 보며 눈을 빛낸다.

“보헴 시가 리브레 아니었나?”

유태수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바꿨어. 네가 떠난 이후.”

최호민은 길게 연기를 내뿜고 말을 이었다.

“왜 많은 담배를 놔두고 말보로 레드일까? 갑자기 궁금해지더라고, 그래서 당장 한 갑을 구매해 피워봤지.”

“그래.”

“독하더군. 그리고 빨리는 맛 하나는 분명하고.”

“한 가지 더 있지, 필터로 가까워질수록 괴상망측한 향기가 짙어진다는 것.”

“글쎄, 나는 잘 모르겠던데.”

“더러운 냄새. 세상 온갖 잡것들이 모두 썩어 문드러져 있는 시궁창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지.”

그러면서 담배를 피워 무는 유태수의 눈이 벌겋게 번들거린다.

그러면서 저 높이 솟구쳐 오른 향로봉 위로 무언가가 떠 오르고 있었다.

그건 어마어마한 건물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건물로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투고 있었다.

흡사 굶주림에 미쳐 돌아가는 아귀지옥을 보는 듯했다.

그런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옥상의 한 노인.

유장풍, 바로 아버지였다.

히죽!

유태수는 사라져 버린 향로봉의 환영들을 보며 웃었다.

***

육중한 정문 기둥에 「천로(天露) 연구소」라는 글씨가 일필휘지로 박혀 있다.

부우웅!

연구소를 빠져나간 흰색의 차량은 외곽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핸들을 잡고 있는 최필준은 올해 마흔세 살로 천로 연구소장이다.

그곳은 국내 최고의 주류기업인 천로주류 산하 연구기관이며 한국을 넘어 세계 주류시장에 천로라는 브랜드를 알린 받침돌이자 기둥이다.

특히 새로 출시된 「아리랑주」가 미국을 비롯한 남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연구소장 최필준의 무게는 더욱 커지고 있었다.

차가 서울로 진입했다.

퇴근 시간이어서 도로는 주차장이다.

최필준은 슬쩍 핸드폰 시계를 한 번 보며 내비게이션을 주시했다.

자신이 타고 갈 도로를 가리키는 선이 빨간색이다.

그건 정체가 극심하다는 뜻이었다.

탁!

핸들을 손바닥으로 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최필준은 약속 시간에서 무려 20분이 지나 도착했다.

강남에 있는 유명한 참치 집이다.

이곳 ‘어도(Edo)’는 오로지 참다랑어, 일본말로 혼마구로라 불리는 어종만 내놓는다.

그리고 냉동이 없다.

또한 갓 잡은 지 72시간이 지난 참치는 절대 손님에게 권하지 않는다.

지금은 겨울철로 일본 츠마루 해협에서 잡히는 참치만을 비행기로 긴급 공수하여 스시(壽司)와 회를 만들어 낸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최필준이 들어섰다.

“미안합니다. 막힐 것을 예상해서 20분 일찍 나왔는데도.”

짙은 청색 정장에 빨간 넥타이를 한 유태수가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서울 생활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 미안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단 술부터 한 잔 받으시죠.”

팟!

유태수가 손에 쥔 술병에 「아리랑」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자신이 개발한 술이다.

그런데 묘하게 국내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작은 업소는 몰라도 대형 식당에서는 찬이슬이나 오늘처럼 따위를 놓고 판다.

주르륵!

자신이 아는 바로는 이곳 어도에서도 아리랑주는 취급하지 않는다.

“맛이 좋습니다. 향기롭고 특히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의 따끔한 맛은 언뜻 밤송이를 삼키는 기분입니다.”

술병을 들고 칭찬을 한다.

기분 나쁠 이유가 없는 최필준이 미소를 지었다.

“소장님 참치 좋아한다고 하셔서 준비했는데 천천히 많이 드십시오.”

“감사합니다. 이사님!”

최필준은 아침 출근길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상대는 사촌 형님인 성형외과 의사인 최민종이다.

즉 유태수의 친구인 최호민에게는 최필준이 당숙이 된다.

데이브 유라는 투자회사 데브그루 고위 인물이 자신을 만나자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을 더 움직일 요량인 듯 아들 최호민과 절친이라고 했다.

최호민은 조카들 중 자신이 가장 잘 챙기는 조카다.

작은 체격이지만 결코 어디서 두들겨 맞고 들어오지 않는 다부지고 붙임성 있는 조카다.

거기에 공부까지 잘하여 자주 용돈을 주곤 했다.

- 우리 호민이 조카 절친이면 무조건 만나야죠.

오늘 자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당숙께서 만드신 아리랑주가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고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멈칫!

최필준의 눈이 빛난다.

당숙(堂叔).

당숙이면 오촌이다.

요즘같이 쥐어짜는 핵가족 시대에는 멀지 몰라도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당숙은 매우 가까운 친척이다.

그런데 자신을 당숙이라고 불렀다.

“술은 모릅니다. 대중가요처럼 언제 갑자기 히트를 할지.”

그건 맞다.

출시 당시에는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다가도 어느 한순간 태풍처럼 술꾼들의 사랑을 받기도 한다.

유럽의 경우 그런 예가 흔하다.

처음 맥주가 나왔을 때 이게 술이냐고 외면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호민이로부터 얘기 들었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유태수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말이 필요 없는 친구라더군요. 주위에 술친구는 많지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벗이라고 했습니다.”

“호민이야말로 내게 그런 녀석입니다. 절대 없어서는 안 될 놈,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

최필준의 눈이 빨갛게 타오른다.

꼭 술을 마셔서가 아니다.

입 밖으로 뱉어낸다고 해서 모두가 말일 수는 없다.

말의 신뢰는 당사자의 눈빛에서 나온다.

유태수의 눈은 고요했다.

‘흔들리지 않는다.’

그건 삶에 거짓이 없고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다.

거짓과 술수로 무장한 사람들의 눈은 가볍다.

그래서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상하좌우로 번들거린다.

유태수의 눈은 정확히 결가부좌했다.

‘누구지.’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물론 사촌 형님과 조카가 동시에 칭찬하는 사람이었기에 궁금하긴 했으나 직접 마주 앉아 보니 더욱 알고 싶어진다.

“제가 바쁜 소장님을 뵙자고 한 이유가 궁금하실 겁니다.”

“말해 보세요.”

“감별사이기도 하다고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술맛을 구별하는 감별사들이다.

유럽에서는 검미사(檢味師)라고 부르며 회사에서 직위 또한 매우 높다.

그야말로 술맛과 향을 판별하는 사람들로 검미사들의 자기관리는 엄격하기로 소문나 있다.

맛과 향처럼 몸의 컨디션에 따라 감지 능력이 좌우되는 분야도 없다.

그래서 이들의 금욕생활은 거의 수도자에 버금간다.

“처음에는 검미사로 일했죠. 그런데 저의 미각과 후각이 워낙 독특하다 보니 새로운 술을 만들어 내는 연구원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독특한 미각과 후각이라면?”

“희석된 술의 여러 화학적 성분을 구별해 냅니다.”

술은 단순 알코올이 아니다.

거기에는 많은 향과 맛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술을 먹고 사람을 죽였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까?”

“네에?”

최필준은 사람을 죽인다는 질문에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아주 가끔 술을 마시고 흉기를 휘두른다든지.”

질문을 이해 못한 얼굴이다.

갑자기 잘 나가다 술에 취해 살인 운운하니 가슴이 서늘해진 기분도 든다.

최필준은 깊숙한 시선으로 유태수를 한참 바라보더니 허리를 곧게 폈다.

“형님의 전화를 받고 혹시 경쟁회사라든지 외국계 주류회사 관계자라면 무조건 만나지 않겠다고 했더니 그런 일은 아니라더군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라는 뜻이다.

“꼭 알아야겠습니다. 술에 관한 전문가이시니 한마디 해주시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눈빛은 너무도 차갑다.

그건 질문을 재미로 한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있었다.

흘긋!

빈 술병을 보는데 두 병이다.

지금 세 병째 첫 잔을 마시고 있다.

자신이 도착했을 때 한 병은 이미 비어 있었으므로 한 병 반을 유태수가 마셨다는 뜻이다.

알코올 도수 27도의 아리랑.

한 병 반이면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정상을 약간 이탈한다.

즉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말이 많아지고 농담이 나오는 단계이다.

그런데 먼지 한 톨 흔들림이란 없는 저 냉정하고 비수 같은 눈빛은 뭔가.

술이 센 것과 술을 지배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금 유태수는 술을 지배하는 자의 눈이다.

“사람들은 도수 높은 술을 마시면 빨리 취한다고 여기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고급 양주로 불리는 도수 40도 이상인 술은 위에서의 배출을 늦추고 흡수를 억제하죠. 즉, 도수와

상관없이 많이 먹어야 취하는 것이 술입니다. 지금 술에 취해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내 대답을 아주 극단적으로 좁힌다면 칼을 포함한 무기를 이용한

살인은 이른바 완전히 술에 맛이 간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입니다.”

“대취자?”

“그렇죠.”

“주먹으로 사람을 때려죽였다면 그건 흉기를 휘두른 주취자와 어떤 차입니까?”

“주먹으로 사람을 때려죽인 예는 거의 없죠. 주먹질을 하는 사람은 있어도 죽이는 것과 때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죠.”

“전혀 다른 문제?”

“한 대 때렸는데 넘어져 뇌진탕으로 사망했다던가, 재수 없게 가슴을 쳤는데 심장마비로 죽는 일이 아니라면 때려서 죽인다는 건 무립니다. 도대체 얼마나 때려야 상대가 죽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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