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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벌집 청소부-57화 (57/122)

57화 귀거래(3)

“상대가 복서 출신이라면?”

“복서라고 해서 사람을 한 방에 죽입니까? 일반인보다 강한 충격은 가능하겠지만 중요한 건 술이 깨는 속도 역시 빠르다는 것입니다. 술이 완전히 깨어 정상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아닌

약간의 이성을 회복하는 시간은 의외로 짧아요. 특히 폭력은 힘을 동반하기 때문에 맞는 사람도 때리는 사람도 생각보다 훨씬 회복 속도가 빠릅니다.”

체력소모가 크다는 의미다.

유태수는 채워진 잔을 비웠다.

‘27분.’

자신은 피하는 형을 쫓아가 때렸다.

경찰에서 밝힌 폭행 시간은 27분이다.

작은아버지인 유동풍 또한 법정에서 그렇게 증언했다.

“복서 출신이 같이 술을 마신 사람을 27분간 일방적으로 때린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흠칫!

최필준이 들고 있던 잔에서 술을 흘렸다.

놀란 것이다.

“지금?”

술잔을 내리고 정색하며 본다.

“발렌타인 두 병을 마셨죠. 소장님께서 갖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잣대로 보고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발렌타인 두 병?”

“왜 그러시죠?”

유태수는 자신의 사건을 떠올린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최필준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전혀 달랐다.

“보름 전 우리 집 앞으로 낯선 사내 둘이 찾아왔더군요. 내게 술에 관한 몇 가지 자문을 구하고 싶다면서 봉투를 내놓는데 무려 오백만 원이란 거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지금 데이브 씨와 같은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발렌타인 두 병을 마시면 어느 정도 폭력성이 드러나느냐?”

“난 아무리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도 사람을 27분 동안 두들겨 팰 정도로 정신이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했죠.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이 있습니다. 술에 취해 흉기로 찌르거나, 총을

이용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주먹을 이용한 폭행과는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음주는 우발적 범행을 유도합니다. 흉기, 총 모두 그런 것이죠. 하지만 주먹으로 때리는 건 몰라도 죽이는 건 다른 이유일 가능성이 크죠.”

유태수는 잔을 들어 마셨다.

***

다음 날 아침 정확히 10시에 전화가 걸려 왔다.

설태왕이었고 아침 일찍 오도석으로부터 다섯 배를 지급할 용의가 있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이…… 이건 놀라운 일입니다. 무슨 거래가 이런 식이죠?”

“유장풍 회장은 그런 사람입니다. 탐이 나는 건 기어이 손에 넣어야 해요. 그렇지 못하면 병납니다.”

“도무지!”

천억을 투자해 순식간에 한화 6조, 미화 45억 달러를 벌어들인다.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사흘 이내에 대답을 주기로 했습니다.”

“사흘?”

왜 하필 사흘이냐는 질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왜 삼세판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줄 아십니까? 혹자는 기독교적 사건, 즉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지 사흘 만에 살아난 것에 그 연원을 찾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불가의 삼 보살 설이 유력합니다.”

설태왕은 설명을 이어갔다.

삼존불이라고 하여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왼쪽은 문수보살 오른쪽은 보현보살이 있다.

1은 시작이고 3은 완성이다.

가운데 석가모니불은 1이다.

그렇게 좌우로 1, 2, 3을 세면 항상 석가모니불에게 3이라는 숫자가 다시 돌아온다.

“즉, 좋은 결과를 믿고 싶어 하는 기대심리죠. 그래서 사흘이나 삼세판 모두 기다리는 쪽이나 받는 쪽이든 모두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태수는 빙긋 웃었다.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얘기다.

***

점심시간.

유태수는 마흔 중반가량의 안경 쓴 사내와 설렁탕으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는데 사내가 깍두기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으면서 말했다.

“파실 겁니까?”

사내는 크라운 대표 하대수였다.

“장사는 흘러가는 물이라고 합니다.”

“흐르는 물을 가로막으면 안 된다.”

“안 팔면 태천에서 데브그루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할 것입니다.”

“그건 아직 싸울 준비가 안 된 상태이기 때문에 상대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거군요.”

“이쪽도 아직 몸이 풀린 상태는 아니고.”

두 사람은 설렁탕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벤츠 한 대가 태천그룹 사옥 앞에 멈췄다.

설태왕이 운전석에서 내렸고 조수석에서 데브그루 고문 변호사 강석수가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오도석은 두 사람을 웃는 얼굴로 맞이하며 가벼운 악수를 나눴다.

“가시죠!”

오도석의 안내를 받아 설태왕과 강석수는 유리처럼 빛나는 대리석을 밟으며 로비로 들어섰다.

로비에는 정장 차림을 한 보안요원들이 곳곳에 보인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커다란 사각형의 탁자를 놓고 네 사람이 앉았다.

설태왕과 강석수가 나란히 앉았고 맞은편에는 태천그룹 법무팀장 오만철이 오도석과 앉았다.

오도석과 설태왕은 각자 앞에 서류를 놓고 사인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류를 서로 건네며 악수를 나눔으로써 데브그루가 가지고 있던 크라운의 지분이 태천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설태왕은 환하게 웃지만 오도석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오도석은 설태왕과 강석수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고 두 사람이 떠나고 나서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에 많이 걸린 모양입니다?”

옆에 있던 오만철이 입을 열었다.

“그런 것 있죠.”

그게 뭐냐는 시선으로 오만철이 바라보았다.

“그런 것, 거, 뭐죠. 똥 싸고 뒤를 닦지 않는 기분.”

“네에?”

“갑시다!”

두 사람은 역시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유장풍 회장 앞에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

“회장님, 왜 검토하시지 않습니까?”

유장풍은 신문을 접어 읽고 있었다.

“보셔야죠.”

거듭되는 재촉에 유장풍은 코에 걸치고 있던 돋보기를 벗어 탁자 위에 놓았다.

스윽!

서류를 끌어당기더니 내려놓은 돋보기를 다시 걸친다.

천천히 계약서를 보더니 숙였던 고개를 들면서 다시 돋보기를 내려놓는다.

쓱!

갑자기 맞은편 오도석을 향해 오른손을 내민다.

“뭘?”

“담배 하나 줘.”

“시가 피우시지.”

“오 팀장은 맨날 같은 반찬만 먹나?”

오도석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보헴 시가 한 개비를 꺼내 주고 불까지 붙여 준다.

후우!

연기를 천장을 향해 뱉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담배만 피우는 유장풍을 바라보는 오도석의 눈빛이 흔들린다.

한 치만 흐트러져도 심기를 짚어낸다.

‘좋지 않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크라운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보였다.

그래서 오늘 서류를 가져오면 무척 기뻐할 줄 알았는데 전혀 말이 없다.

“오 팀장!”

법무팀장 오만철을 부른다.

“예, 회장님!”

“자네야말로 내 곁에서 수많은 기업들이 내 손을 떠나고 내 주머니로 들어오는 걸 보고 경험했지?”

“그렇습니다.”

“이번 건에 대한 느낌이 어떤가?”

“나쁘지 않습니다. 이제 태천자동차에 안전벨트 ‘클린 히트’를 적용하면 미국 차 독일 차 따라잡지 말란 법 없잖습니까?”

기술에서도 밀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독일 차, 일본 차, 미국 차에게는 아직도 2퍼센트 부족하다.

유장풍은 태천자동차가 세계 자동차 회사 시가총액 1위에 올라서는 걸 보는 것이 꿈이다.

안전벨트야말로 자동차 안전을 책임지는 결정적인 기술로 들어간다.

“어느 정도 따라잡을 때까지 클린 히트를 우리 태천자동차에만 설치하는 거죠.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경쟁 업체에는 당분간 판매를 중단하는 겁니다.”

“쯧쯧쯧! 자넨 법 공부하기 잘했군.”

오만철의 눈이 커졌다.

“네?”

“경쟁자는 목을 치는 것이 아냐. 어느 정도 숨통을 트여주면서 동행하는 거지.”

“하면 벤츠나 도요타 같은 새끼들한테도 클린 히트를 판매한단 말입니까?”

“목줄은 채워도 목을 조이는 게 아냐. 나란히 경쟁하면서 조금씩 빼앗아 먹을 생각을 해야지 단칼에 죽이면 다음 표적들이 어떻게 보겠어. 당장 경계하고 우리와 거리를 두려고 할 것

아냐. 타초경사도 몰라?”

“타초경사(打草驚蛇)?”

그러면서 오도석을 돌아보았는데 아느냐고 묻는 것이다.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할 필요 없다는 뜻이죠.”

“호랑이가 굶주려 죽기도 하는데 왜 그러는 줄 알아? 인정사정없고 눈에 보이는 족족 잡아먹다 보니 피식자들이 도망을 가버리지.”

“그들이 자신들의 목에 목줄이 채워지도록 가만 있을까요?”

오도석이 입을 열었다.

유장풍이 이마를 찡그린다.

“에어백이 열 개 있으면 뭘 해, 제대로 된 안전벨트 하나가 훨씬 낫다는 과학적 자료를 보고서도 그런 말을 해.”

부욱!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끈 유장풍이 상체를 소파에 똑바로 세운다.

“태천그룹 50년사에서 이렇게 돈을 강탈당하듯이 한 거래는 처음인데.”

“마음에 안 드십니까?”

“데브그루 대표가 로버트 설이란 놈이라고 했던가?”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세계 최고의 투자회사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더군요. 레이 달리오가 대표죠.”

“그 노름꾼 놈?”

그러자 오도석이 씨익 웃는다.

- 돈 놓고 돈 먹는 놈이 노름꾼이지 그럼 뭐야.

언젠가 환투기로 일 년에 140억 달러를 벌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유장풍이 뱉어낸 말이다.

“좀 더 알아봐. 이상하게 불쾌해. 누군가 내 뱃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야.”

“예옛?”

두 사람 모두 놀란다.

자신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는 유장풍의 통밥을 간파한 사람이 데브그루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 증거로 다섯 배를 부른 것이다.

여섯 배도 있고 네 배도 있는데 왜 하필 다섯 배일까.

‘다섯.’

다섯이란 숫자는 유장풍의 고유 번호 같은 것이었다.

- 다섯 배는 남아야 직원들 월급 주고 내 주머니로 좀 들어갈 것 아닌가.

어느 날 창업하고 십여 년 정도 흘렀을 때 임원 회의에서 뱉어낸 말이었다.

꼭 어떤 목적이나 의미가 있어서 한 말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입 밖으로 흘러나온 다섯 배라는 숫자는 지금까지 유장풍의 수익 공식으로 고정화되고 말았다.

뭘 하든 다섯 배의 수익을 올리려다 보니 무리수는 피할 수가 없었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어디에서도 태천그룹이 관여하는 사업에는 항상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두 배, 세 배도 아닌 다섯 배의 이익을 남기기 위한 직원들의 무자비한 폭식성에 지역주민과 현지 고용원들의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인도의 태천섬유 공장 사건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여러 의류와 면직에 코팅제 한 가지를 사용하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테플론 코팅 시 사용되는 합성 물질 중 하나인 PFOA(Perfluorooctanoic acid)가 얼마나 인체에 무서운 위험을 끼치는지 알고서도 폐수로 방류한 것이다.

인근 주민들이 고환암, 갑상선암, 신장암, 후두암을 포함한 각종 암에 시달렸고 기형아를 유발하기까지 했다.

환경단체와 지역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하며 원인조사에 들어가려고 들자 친 회사 세력들을 동원하여 방해하기 시작했다.

또한 인도 정부에 로비를 하여 결코 PFOA를 사용한 적이 없다는 공식발표를 얻어 낸다.

당시 태천섬유의 막대한 흑자와 주가 폭등으로 섬유 계열사 한곳의 시가총액이 13조를 기록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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