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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벌집 청소부-58화 (58/122)

58화 난 살아 있다(1)

소파에 앉아 바둑을 두고 있다.

옆에 기보가 놓여 있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 듯 이마를 찡그렸다 폈다 반복한다.

딸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아내 채무령이 다가왔다.

“갑자기 웬 바둑이에요?”

그러면서 맞은편에 앉는다.

“으흐흠!”

유장풍은 한숨을 내쉬며 놓았던 백돌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 이마의 주름살, 바둑이 아니라 회사 일이죠?”

젊어서부터 유장풍의 바둑 수는 매우 높다.

아마추어치고는 적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한 가지 특징이라면 사업이 곤란해지거나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면 돌파 묘수를 바둑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채무령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쯧쯧!”

빈정 상한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려 본다.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가서 차나 한잔 끓여와.”

“죽지 않았대요.”

“무슨 소리야?”

“젊은 나이에 절대 요절할 일 없는 사주라고.”

“내가 요절할 사주는 아니니까 지금까지 살아 있지.”

“태수요!”

순간 유장풍의 표정이 굳어졌다.

콱!

바둑판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 바람에 바둑판의 돌들이 우르르 거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진다.

“누가 그래?”

“대공스님이요. 확실하답디다.”

“그 양반도 늙었나. 아녀자들 붙잡아 놓고 쓸데없는 소리나 내뱉다니.”

“그분의 놀라운 불력은 당신이 인정한 거예요.”

“그놈은 살인자야. 지 형을 죽인 것이라고. 작은아버지를 두들겨 패고, 그래서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어. 죽어야 할 놈이야.”

“그렇다고 기태가 살아나요?”

“무슨 소리!”

버럭 소릴 질렀다.

“살아 있다고 해도 결코 다시는 이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놈이야. 그놈은 발견 즉시 총살될 거야.”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잖아요.”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그놈 얘기 꺼내면 당신 가만 안 둘 거야.”

휘익!

거실을 걸어가는 유장풍에게 채무령이 차갑게 말했다.

“어떻게 가만 안 둘 건데요. 살아 있는 자식을 어떻게 모르는 체하라구요.”

“그 입 닥치지 못해!”

소리가 커지면서 가정부가 내려왔고 유장풍은 일 층 안방으로 들어갔다.

쾅!

집이 흔들릴 만큼 문이 세차게 닫혔다.

“으후후후!”

채무령이 비명 같은 신음을 흘리자 재빨리 가정부가 냉수 한 컵을 가져다준다.

냉수를 마신 채무령이 길게 탄식했다.

‘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슬그머니 가정부가 맞은편에 앉더니 눈을 빛낸다.

“태수가 아직 살았다구요, 사모님?”

“아줌마, 입단속 잘해요. 잘못하면 우리가 어딘가에 숨겨 놓고 신고를 하지 않는 것으로 경찰이 오해할 수 있으니까.”

“그럼요. 당연히 입 딱 지퍼 채워야죠. 하지만 요즘 들어 저도 태수가 보고 싶어요. 어떻게 그렇게 인사성도 밝고 나한테 잘했는지. 이 추운 겨울에 끼니는 챙기고 사는지.”

가정부는 큰 한숨을 쉬고 일어나 올라갔다.

채무령 역시 긴 한숨을 쉬며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

가정 문제 상담소 문이 열리며 사장 백기만이 출근을 했다.

사무실 직원 하봉철과 차만대는 출근하여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날이 춥습니다.”

친구이자 직원인 하봉철이 오른손을 들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후배 차만대가 고개를 꾸벅한다.

“추위 장난 아닌데, 언제 풀린대?”

“기상청에서는 오늘부터 포근해진다고 했는데 영 아닌데요. 꼬락서니가 이대로 며칠 더 갈 것 같습니다.”

“작년 겨울은 반소매를 입고 다녔는데 올겨울은 동태를 만드는구만. 그나저나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만대?”

차만대가 책상 위를 가리켰다.

“책상 위에 올려놨습니다.”

그 사이 하봉철이 믹스커피 하나를 타서 의자에 앉은 백기만에게 내민다.

“땡큐!”

후루룩!

하봉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딱딱한 플라스틱 파일로 된 서류를 열었다.

가장 먼저 알코올에 작용하는 여러 화학 물질들이라는 글씨가 들어온다.

백기만은 천천히 서류를 살폈는데 두 번째 장 중간쯤 보다가 눈을 빛낸다.

“GHB?”

자신이 형사로 근무할 당시만 해도 그런 약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질문에 차만대가 다가가 설명했다.

GHB(Gamma-Hydroxy butynic acid)는 냄새가 없는 흰 가루약이다.

알약이나 캡슐 형태로 물이나 술에 타 액체 상태로 마시기에 물 같은 히로뽕이라는 뜻에서 술꾼들 사이에서는 물뽕으로 불린다.

신경을 흥분시키는데 히로뽕에 비해 GHB는 신경을 가라앉힌다.

정맥 마취제로 개발되었다가 심한 부작용으로 판매 및 사용이 금지되었다.

마약으로 규정은 했으나 다른 물질과 혼합했을 시 정확히 어떤 부작용이 일어나는지는 아직 백 퍼센트 밝혀진 바 없다.

GHB를 물에 타 마시면 근육이 풀리면서 졸음이 쏟아진다.

문제는 물이 아닌 음료수, 그중에서도 술에 탔을 때의 현상이다.

몸을 떨며 식은땀을 흘리거나, 심한 구토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두통을 겪는 사람들도 있고, 환각에 몸과 마음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아직까지 분명한 부작용은 시험 중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최면이 걸린 듯 과거를 발설하고,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도 한다.

GHB의 무서운 점은 또 있다.

복용하고 12시간이 지나면 소변과 대변으로 완전히 배출된다는 것이다.

이때 혈액검사를 하면 아무런 증거는 나타나지 않는다.

좀체 잡힐 일이 없는 마약인 셈이다.

팔랑!

백기만이 마지막 장을 덮는다.

“한마디로 물뽕을 넣었을 가능성이 크다. 발렌타인 술에?”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좋아, 그렇다 치자. 그럼 증거를 찾아야 하고 우리도 직접 실험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당연하죠.”

똑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백기만은 본능적으로 벽의 시계를 돌아보았다.

아침 10시다.

이토록 이른 시간에 노크를 하고 찾아온 사람은 누굴까.

직감적으로 평범한 사건이나 사람은 아니다.

하봉철과 차만대도 뭔가를 느낀 듯 선뜻 문을 열지 않고 백기만을 바라보았다.

툭!

백기만이 문을 열어주라는 듯 턱으로 지시한다.

차만대가 문 앞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돌려 천천히 문을 열었다.

“여기가 가정 문제 상담소 맞습니까?”

사람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린다.

“그렇습니다만 어디서 오셨는지?”

“가정 문제로 상담을 좀 받고 싶어 왔습니다.”

“아, 네! 들어오시죠.”

차만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한 사내가 들어섰다.

위아래 미드나잇 블루(검은빛이 도는 청색) 계열 정장에 길게 늘어진 줄무늬가 있는 붉은 색 넥타이를 했다.

“이쪽으로 좀 앉으시죠.”

차만대의 안내를 받은 사내는 소파에 앉았다.

“사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그사이 어느새 백기만은 안쪽 칸막이 쪽으로 들어가 있다가 차만대의 보고를 받고 나온다.

“여기 차 좀.”

그리고 백기만은 재빨리 다가와 사내를 향해 허리를 숙인다.

“어서 오십시오.”

자리에 앉으며 작은 금속 케이스를 꺼내더니 명함 한 장을 꺼냈다.

“백기만입니다.”

사내는 건네주는 명함을 받아서 살피는 듯하더니 자신의 지갑에 정성스럽게 꽂아 넣었다.

“어떤 상담을 받고 싶으신지?”

“인터넷에 사장님 상담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글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이 정도 능력이면 마음을 털어놔도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내 입으로 내 광을 파는 것 같습니다만 저와 거래하여 불만족스러웠다는 고객은 아직 없습니다.”

“담배 하나 피워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차 부장, 재떨이 좀 가져와.”

차만대가 칸막이 뒤에서 유리 재떨이 한 개를 가져와 놓고 돌아간다.

딸칵!

말보로 레드를 입에 문 유태수가 라이터 불을 켰다.

담배를 빨아 당기자 라이터 불이 쑥 작아졌다가 다시 커진다.

후우!

연기를 길게 내뿜은 유태수가 윗주머니에서 쪽지 한 장을 꺼냈다.

유태수는 접힌 쪽지를 펼쳐 잠시 살피듯 보더니 백기만에게 내밀었다.

스윽!

자신 앞으로 온 쪽지를 들어 보던 백기만이 멈칫했다.

「채무령」

백기만은 한참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고개를 들어 유태수를 바라보았다.

“뭡니까? 얼핏 사람 이름 같은데?”

“맞습니다. 그리고 사장님 머릿속에 떠올린 그분이 맞습니다.”

백기만은 깜짝 놀랐다.

쪽지에 적혀 있는 세 글자를 보는 순간 한 여자를 떠올렸다.

더구나 자신은 지금 그 여자의 가정 문제를 심층 분석하며 상담하고 있는 중이다.

“태천문화예술원 이사장님.”

“채…… 채무령 이사장님!”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이다.

태천문화예술원은 한국 고전과 현대 문화예술의 산실이다.

우리의 국악과 춤, 서양의 클래식 음악과 발레, 댄스로 표기되는 실용무용까지 모든 분야에 관여하면서 수많은 영재들을 키워냈다.

이른바 태천문화예술원의 장학생들로 불리며 세계적인 음악 콩쿠르를 휩쓴 한국 출신 뮤지션 대부분이 태천문화예술원에게 직간접적인 후원을 받거나 지금도 여러 형태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

특히 태천문화예술원 대극장은 영국의 로열 앨버트 홀에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태천문화예술원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바로 태천미술관이다.

우리나라 개인 미술관으로서는 단연 압도적인 컬렉션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는 발군의 퀄리티를 자랑한다.

사립 미술관이지만 소장하고 있는 예술품을 들여다보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인데 우선 국보만 39개가 소장되어 있고 보물이 108개이다.

우리나라 국공립 미술관을 통틀어도 태천미술관과 비교할 만한 곳은 국립경주박물관 정도다.

그렇다고 국립경주박물관이 태천미술관에 비해 소장 문화재가 압도적인 건 아니다.

많이 모자란다.

전통 문화재나 고미술품만이 아니다.

현대 미술에도 이중석, 박수군은 물론 김환길 화백, 그리고 서양의 미술품 중 모네와 고갱의 작품까지 즐비하다.

하루 방문객만 일만여 명에 이르며, 특히 해외에서 찾아온 관광객이 절반에 달하는 한국 제일의 국제적 명소가 된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

태천문화예술원 이사장 채무령을 부르는 또 하나의 이름이다.

영국 제국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제의 이름이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 굉장히 부정적 요소가 배어있다.

문화예술에서만큼은 그녀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절대 군주였다.

시작은 긍정적이었지만 고인 물이 썩듯 언젠가부터 불만과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속된 말로 찍히면 국내든 해외이든 예술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포기해야 한다.

그만큼 국내외에서 채무령의 영향력은 강력했다.

꾸울꺽!

백기만이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채무령 씨에 대해 잘 아십니까?”

“채무령 씨를 모르는 분이 있을까요?”

“채무령 씨에 대한 얘기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얼마나 잘 알고 계시는지?”

백기만이 멈칫했다.

유태수의 입가로 살짝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런 유태수를 한참 바라보던 백기만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채무령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유태수의 질문 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국내 제일의 재벌기업 사모님, 태천문화예술원 이사장 같은 모든 대중들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을 묻는 것이었다.

“뭘 알고 싶은지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꽃이 화려하다고 하여 그 꽃이 피기까지의 삶도 화려할까요?”

“으음!”

백기만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채무령을 화려한 꽃으로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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