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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벌집 청소부-60화 (60/122)

60화 프리랜서(1)

그런데 사이먼은 물론 랭글리 본사에서까지 배석대가 하는 일에 관여하지 말 것이며 오로지 지원만 가능하다고 했다.

아주 가끔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들에게 그러한 지시가 떨어질 때가 있다.

무얼 하는지 어디에 있든지 내가 윗사람이라고 하여 그에게 명령을 내리려 하지 마라.

오로지 그가 원하는 지원에만 충실하라.

그렇다면 눈앞의 배석대도 어떤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딱 자기 선까지만 알아야 한다.

그 아래도, 그 이상도 알려고 하면 안 되는 것이 정보원들의 철칙이다.

지잉!

핸드폰이 울리고 문자 한 통이 왔다.

보낸 사람은 면전의 알렉스다.

시끄러운 곳에서 용건을 볼 수는 없지 않느냐는 내용이다.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태수가 말했다.

“같이 앉았다가 혼자 일어나면 사람들이 우릴 뭐로 보겠습니까? 빈자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마주 앉았다는 건 아는 사이임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굴이 하얀 당신으로 인해

가뜩이나 우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고.”

알렉스가 일어서려다 앉는다.

“모두 먹었으니 당장 급한 일 없으면 기다렸다가 같이 나갑시다.”

유태수는 소주병을 거꾸로 세우듯 하며 마지막 잔을 따랐다.

쭈욱!

곧바로 비우고 순댓국 그릇을 들어 남은 국물까지 쪽 따라 마셨다.

“커어!”

만족스런 표정으로 휴지를 뽑아 입술 주위를 닦았다.

이윽고 컵에 냉수 한 컵을 따라 입안을 헹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계산요!”

유태수가 먼저 나가 카드를 내놓았다.

“순댓국 특 두 개에 소주 한 병이죠? 이만 원입니다.”

찌지징!

영수증이 나오는 소리가 들리고 카드를 받아든 유태수가 문을 나섰다.

거리는 퇴근 차량들로 붐볐다.

딸칵!

유태수가 말보로 레드 한 개비를 물고 라이터 불을 붙였다.

“도와주십시오. 많이 서툽니다.”

부탁인가, 비아냥인가.

부탁이라고 판단하기에는 표정이 너무 밋밋하고 비아냥으로 보기엔 눈이 너무 잠겨 있다.

유태수는 식당 안에서 보여준 알렉스의 행동에서 한 가지를 느꼈다.

알렉스는 자신의 존재를 몹시 마땅치 않아 한다는 것이다.

그 기분 충분히 이해한다.

알렉스는 정보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나름 베테랑이라고 자부하는 그가 낙하산 타고 뚝 떨어진 낯선 이방인의 수발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좋을 리 없다.

더구나 무슨 임무를 위해 급작스럽게 투입되었는지 상부에서도 어떤 언질도 없다.

“당신 상관들이 나더러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다는 칭찬을 했죠. 그렇다고 난 당신을 무시하거나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인생의 연장자로, 그리고 같은 일을 하는 협조자로

최대한 예의를 잃지 않을 생각입니다.”

유태수가 살짝 웃는다.

알렉스의 굳은 표정은 어느새 풀어졌고 길게 숨을 내쉰다.

“헛헛! 갑자기 얼굴이 왜 이렇게 뜨겁죠.”

알렉스는 어색한 표정을 했다.

“인정합니다. 정보원도 사람입니다. 민간기업체 직원들과 다를 게 없어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동료 직원 뒷바라지만 하라고 하면 섭섭하죠.”

그러면서 손을 내밀었다.

마침내 둘은 악수를 나눴다.

악수보다 더 친밀감을 전달하는 표식은 없다.

특히 정보원에게 악수는 적의를 지웠다는 의미다.

푸틴 대통령의 비자금에 대한 폭로를 한 뒤 러시아 해외정보국으로부터 추적을 받고 있던 게오르기가 미국 땅을 밟았을 때도 환영은 악수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은 당신의 친구다.

부우웅!

택시를 타고 떠났다.

알렉스는 사라지는 택시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놀랍도록 냉철하다.’

배석대는 랭글리 특채다.

특채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특별하게 급히 채용할 만한 역량이 있기 때문이며 특별한 능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랭글리 사원증을 받기 힘들다.

이미 배석대에 대한 불편한 심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노련하고.’

웬만한 사람 같았다면 자신의 태도를 문제 삼아 사이먼에게 전화를 하여 무슨 대접이 이따위냐고 따졌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랭글리 고위 간부들과 직통한다는 걸 내세워 목에 힘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린다.

‘오디너리 스테이트 오브 마인드(ordinary state of mind).’

이름하여 평상심이다.

고요한 마음의 상태, 불가에서는 이를 곧 도(道)라고 했다.

그릇에 떠 놓은 물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그릇이 흔들리기 전까지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데 여기서 그릇은 곧 세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세상이 흔들리기 이전에는 절대 내 마음이 현혹되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따위의 감정의 굴곡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자신을 적응시키고 적시는 카멜레온의 법칙과 평상심은 정보원이 갖추어야 할 최우선 조건이다.

그런데 배석대는 그 모든 걸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알렉스입니다. 배석대 씨가 혹시 이 분야에 대한 어떤 훈련을 받은 적이 정말 없습니까?”

랭글리 직속상관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다.

[전무하네. 그는 분명 연구 대상일세. 우리도 놀라니까. 아무튼 잘해보게. 지금으로서는 그의 어깨에 많은 일들이 걸려 있다네.]

알렉스는 전화를 끊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가다 중지하면 아니 간 것만 못하다.’

라는 한국 속담이 있다.

이왕지사 페이스 메이커라면 제대로 하는 것이 좋다.

***

구기동 자택에 도착했다.

탁!

핸드폰 문자를 확인했다.

눈에 익은 이름 세 개가 적혀 있었다.

전주식.

김평대.

곽철종.

이라크에서 자신을 공격했고 입사 동기였던 이승수와 최만오를 죽인 국정원 요원들이다.

그들은 일을 끝내고 일제히 귀국했다.

교환 근무.

일정 기간 그 지역에서 활동한 뒤 본국으로 철수한다.

지나치게 노출이 되어 보호 차원에서 불러들이는데 2, 3년 국내 근무를 하다가 다시 해외로 파견되기를 반복한다.

국정원 직원들에 대한 신상은 기밀이다.

함부로 외부로 노출될 수 없다.

그런데 알렉스가 세 사람의 거주지 주소를 정확하게 전달해 준 것이다.

아무리 국정원이 날고 긴다고 해도 랭글리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다.

정치적으로 미국이란 우산을 벗어날 수 없는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들에 의해 주물러진다.

딸칵!

담배에 불을 붙인 유태수는 이마를 찡그렸다.

“우리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놈 중 하나가 돈 꿔주고 못 받는 놈이라고.”

빚은 받아야 한다.

결코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딩동!

갑자기 초인종이 울린다.

현관 입구에 붙은 인터폰 화면에 모자를 쓴 사내가 나타났다.

“택배입니다.”

“놓고 가세요.”

“예!”

택배원이 화면에서 사라졌고 유태수는 문을 열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철컹!

대문을 열자 대문 기둥 아래 박스가 한 개 놓여 있었다.

박스는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유태수는 박스를 거실로 들여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박스 위에 붙은 송장 이름을 찾는다.

「배덕용」

유태수는 멈칫했다.

귀국하여 통화한 적은 있지만 이곳 주소는 아직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이내 살짝 웃고 만다.

그들은 앉아서 천 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는 차원 밖의 존재들이다.

스으윽!

서랍을 열어 커터 칼을 꺼낸 유태수는 꼼꼼하게 붙은 테이프를 잘라내고 상자 뚜껑을 열었다.

에어캡으로 단단히 감싼 물건이 있다.

유태수는 둘둘 말린 에어캡을 벗겨 내기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40센티 정도 되는 길쭉한 대나무 한 자루가 나온다.

지름 3센티 정도 되는 두께였는데 대나무 마디가 매우 촘촘하다.

유태수는 밑동 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대나무를 쥐었는데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텅 빈 대나무 무게라면 무겁다고 느껴야 할 것 같았다.

찬찬히 살펴봤지만 대나무에서 특이한 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남도 끝자락 시골 성당에서 경비로 근무하는 배달부가 아무 의미 없는 대나무 막대기 하나를 보낼 리 없다.

몇 번을 훑고 살피던 유태수는 느껴지는 바가 있어 대나무 양쪽 끝을 두 손으로 잡고 잡아당겼다.

스으으!

뽑힌다.

칼이다.

하얗다 못해 투명한 유리를 보는 것 같다.

“음!”

칼날이 정말 얇다.

종잇장이라는 말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팟!

칼을 살피던 유태수의 눈이 빛난다.

‘그 칼이다.’

군대 첫 휴가를 나왔을 때 형 유기태가 단골 복어집을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요리사는 두 사람이 보는 앞에서 복어 회를 떴는데 회라기보다는 차라리 한 장 한 장 습자지(習字紙, tracing paper)를 뜬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았다.

복어 살은 섬유질과 근육으로 되어 있어 질기다.

그렇기 때문에 얇게 썰수록 먹는 사람이 편한데 요리사의 솜씨도 놀라웠지만 회를 뜨는 칼이 너무 독특했다.

칼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얇았기 때문이다.

유태수가 칼에 흥미를 느끼자 형 유기태가 ‘후구히키보초’라는 복어 회를 전문적으로 뜨는 칼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꾸우욱!

너무 얇아 부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손잡이를 쥐고 칼을 휘었는데 요지부동이다.

처음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볍게 눌렀으나 꼼짝을 하지 않는 칼날을 보며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꾸우욱!

온 힘을 다해 휘어 보았지만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얇은 도신은 작은 경련도 없다.

“후우우!”

길게 숨을 내쉰 유태수는 미소를 지었다.

바닥에 종이 한 장이 접혀 있다.

유태수는 종이를 들어 펼쳤다.

「네오에게 도마 늙은이의 도법을 배웠다고 들었지. 내가 왕년에 칼을 좀 써 봐서 아는데 도법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칼이라네. 칼은 도법을 빛나게 해주는 최고의 조연이야.」

그게 끝이다.

유태수는 칼을 들어 도신을 천장의 형광등에 비췄다.

형광등이 보인다.

탁!

칼집에 넣었다가 다시 한번 뽑아 들었다.

파아아!

칼집을 나오자 강렬한 은광이 거실을 가득 메운다.

좋다.

뭔지 모르지만 짜릿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태수는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한겨울 추위가 얇은 셔츠 속을 금방 파고들었다.

어둠이 밀려간다.

태양이 솟구치면 강렬한 햇빛에 안개가 밀려나듯 으스름한 칼 빛에 밤의 마당이 훤해지는 것 같았다.

일목지급(一目之急), 눈이 빨라야 하고, 초보지각(超步之脚), 걸음이 빨라야 한다.

사력지공(死力之功), 죽을힘을 다해라.

청소를 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능력이다.

네오는 이 세 가지를 힘주어 말했다.

눈은 상대의 움직임만 관찰하고 경계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까지도 들여다봐야 한다.

마음을 보면 몸이 어떤 동작을 보일지 알 수 있다.

그동안은 틈을 내어 연습했지만 손에 지금과 같은 칼을 쥐진 않았다.

칼 대신 나무 막대기를 쥐거나 그냥 맨손으로 연습했을 때와 다르다.

손에 칼이 쥐어져서인가.

사방을 살피는 눈이 더욱 빠르다.

사사삭!

움직이는 걸음이 놀랍도록 신속했다.

마치 날개가 달린 느낌이다.

오랫동안 복싱을 한 탓에 스피드는 좋았다.

고등학교 때 같은 동급 선수들도 자신의 스피드에 혀를 내둘렀고 쉽게 따라잡지를 못했다.

그렇다고 주먹이 가볍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전국대회 기록을 보면 유태수의 주먹이 어느 정도 강도인지를 알 수 있는데 공식 기록만 17번 싸웠다.

그중 11번을 KO승을 거뒀으므로 경이적인 파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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