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프리랜서(2)
3분 3회전이다.
헤드기어까지 착용한 경기에서 KO가 나올 확률은 드물다.
슈슈슈슈!
핀치 그립(Pinch Grip) 또는 언더 그립(underhand grip)이라고도 부른다.
우리가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칼의 손잡이를 쥐는 방법으로 주방의 칼을 쥐는 것과 거의 흡사하다.
또 한 가지는 해머 그립(Hammer Grip)으로 부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휘두르는 철저한 공격적 칼질이기 때문에 오버 핸드 그립(overhand grip)이 좀 더 자세한
표현이다.
야구에서 투수가 어깨 위로 팔이 넘어와 공을 던지는 걸 생각하면 쉽다.
도법에서 오버 핸드 그립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철저히 공격적일 뿐 아니라 대개가 이성을 잃고 극히 흥분된 상태에서 많이 나오는 동작인데 단점은 각도가 큰 만큼 느리다는 것이다.
쫘아아아!
언더 그립의 칼이 부챗살처럼 옆으로 퍼진다.
도신에서 뿜어나온 은빛 광채로 인해 마치 합죽선처럼 펴졌다.
칼이 부채처럼 펴질 일은 없다.
그만큼 찌르는 동작이 빨라 부채가 펼쳐지는 현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후우우!
20여 분 실전에 가까운 동작을 했을 뿐인데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다시 한번 손에 쥐고 있는 칼을 보며 유태수는 중얼거렸다.
‘이렇게 칼까지 만들어 보냈다는 건 그만큼 죽일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뜻일 텐데.’
스윽!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지이이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온몸을 떨고 있었다.
“여보세요?”
[데이브, 접니다. 송만술이.]
“송 형, 어딥니까? 알겠습니다. 금방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유태수는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 흘린 땀을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면서 핸드폰으로 택시를 호출했다.
10여 분 기다리자 골목으로 택시 한 대가 나타났다.
탁!
유태수를 태운 택시가 골목에서 멀어져갔다.
유태수는 뒷좌석에 앉아 늦은 밤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송만술과 고주식은 자신보다 닷새 늦게 서울로 들어왔다.
물론 회사에 곧바로 사표를 제출했는데 이후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흐흠!”
그들에 대한 미안함이 크다.
자신 때문에 두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었고 이승수와 차만오가 죽었다.
유태수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얼굴이 벌겋게 물들 만큼 갑자기 분노가 치솟은 것이었다.
밤이 늦은 시간인데도 감자탕집은 사람들이 많았다.
“데이브!”
송만술이 먼저 유태수를 발견하고 손을 들어 알은체를 했다.
데이브라는 말에 주위 몇몇 손님들이 유태수를 돌아보았다.
송만술은 고주식과 앉아 있었는데 유태수는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눴다.
“얼굴 좋네.”
송만술이 불콰한 얼굴로 말했다.
“한잔해야죠.”
“그럼요.”
유태수는 소주잔을 받았다.
“우리 한 손으로 따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두 손으로 술을 따르려는 송만술을 보며 유태수가 지그시 웃었다.
멈칫!
송만술이 이마를 찌푸리더니 고주식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언제 그런 말을 했었는지 묻는 것이다.
고주식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기억이 없다는 것인데 술로 인해 기억을 못 할 만큼의 먹은 나이는 아니다.
“그런 말 했습니다.”
그러면서 유태수는 한 손으로 잔을 잡았다.
했다.
분명히 했었다.
이라크 파견 결정이 나고 다섯 명이 술집에 모여 틀림없이 그런 말을 했다.
- 우린 동기이고 하필이면 나이까지 같으니 친구 하자. 사석에서는 말 놓고 편하게 지내자. 술 따를 때도 이제 한 손으로 주고받고.
당시는 데이브 유가 아닌 배석대였다.
물론 배석대의 얼굴로 그런 약속을 했으니 송만술과 고주식이 충분히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받으시죠.”
이번에는 송만술이 엉거주춤 한 손으로 잔을 내밀었다.
유태수 역시 한 손으로 술병을 쥐고 잔을 채워 준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송만술의 눈썹이 약간 찌푸려졌다.
술은 한 손으로 주고받으면서 말은 존칭이다.
아직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인간관계다.
“아직은 집에서 쉬고 있죠.”
대신 고주식이 대답했다.
“태천에서 위로금 비슷한 것 좀 받았습니까?”
피식!
위로금이라는 말에 송만술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주식아, 우리 받은 것 있냐?”
“있기는 개코가 있어. 사직서 수리됐다는 것도 문자로 왔잖아.”
“송 형, 고 형. 나와 같이 일해볼 마음 없습니까?”
갑작스런 제안에 두 사람이 멍한 표정을 했다.
“우리더러 용병 생활을?”
“아닙니다. 서울 바닥에서 무슨 용병입니까?”
유태수는 소주를 비우고 자기 손으로 다시 따랐다.
탕!
소주병을 놓은 유태수는 송만술을 빤히 보며 말했다.
“태천에서 받던 것보다는 더 많을 겁니다.”
“농담 아닌 것 같은데?”
고주식이 유태수의 표정을 살피며 더듬거렸다.
쭈욱!
송만술이 훌렁 잔을 비운다.
“뭐 하는데요? 우리가 아는 데이브는 총 쏘고 도망치는 사람 잡는 분이었는데?”
그때 유태수가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손을 들었다.
“설 대표.”
감자탕집으로 설태왕이 들어섰다.
정장 차림이었는데 재빨리 다가왔고 유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송만술과 고주식도 일어났다.
“대표님, 내가 얘기했던 분들입니다. 이쪽이 송만술 씨, 여기가 고주식 씨.”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설태왕입니다.”
설태왕은 두 사람과 번갈아 악수를 나눈 뒤 지갑에서 명함 두 장을 꺼내 각각 한 장씩 건넨다.
「DEVGRU CEO ROBERT SEOL」
파팟!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빛냈다.
“데브그루라면 안전벨트 클린 히트를 개발한 크라운?”
뉴스를 본 모양이다.
미국계 투자회사 데브그루와 손잡고 제2의 도약을 계획한다는 미라클 대표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맞습니다.”
설태왕이 미소를 짓자 송만술과 고주식이 유태수를 바라보았다.
둘이 어떤 관계냐는 질문이었다.
“내 제의에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얘길 해줄 수 없다는 뜻이다.
잠시 서로를 마주 본다.
그러더니 송만술이 말했다.
“콜!”
“나도 콜!”
뭔지 몰라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굉장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두 사람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데 데이브는 데브그루와?”
“투자자 중 한 분이죠.”
설태왕이 말했다.
술기운으로 붉게 달아오른 송만술의 눈동자가 빛났다.
연봉협상 따위는 없었다.
태천에서 받는 것보다 많다는 말이 가장 귀에 들어왔고, 결정적인 건 자신이 아는 데이브 유는 뛰어난 용병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데이브가 서울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에 흥미가 생긴 것이다.
방아쇠 당기는 일에 익숙한 전장의 사나이가 총기 소유가 불법인 대한민국에서 무슨 사업을 할까.
이라크에서 몇 번 죽을 위기를 겪은 탓인지 순간적으로 데이브와 손을 잡아보고 싶어졌다.
용병 노릇은 아니더라도 결코 순탄하고 안정적인 사업은 아닐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예전에 없던 배짱이 생긴 것이다.
고주식도 송만술과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한 것이다.
이판사판.
무슨 일이든 이제 망설이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건배하죠. 이제 우리는 한 식구입니다.”
잔을 부딪치려던 고주식이 눈을 좁혔다.
유태수의 입에서 식구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식구(食口).
국어사전은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 다른 한 분야의 식구를 떠올린다.
한 조직에 속하여 함께 일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곧 조폭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우리는 식구 아이가.’
라는 어느 한국판 느와르 영화 대사도 기억한다.
의리를 충성과 남자의 가치로 여기는 음지 사내들.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차가운 냉기 한 조각이 가슴을 스친다.
***
유장풍은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여인 진미류가 직접 차려준 저녁 식탁이다.
자신의 집에서 먹던 반찬들에 비하면 조촐하다 못해 초라할 정도였지만 쩝쩝 소리 내며 음식을 씹는 소리가 밝고 경쾌하다.
“그렇게 맛있어요?”
맞은편에 앉은 진미류가 살짝 웃는다.
“난 이렇게 맛있는 저녁을 먹어 본 적이 없어.”
“저 또한 회장님께서 이토록 즐겁게 식사하시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정장 차림을 한 오도석이 부엌 입구에 서서 빙긋 웃었다.
“팀장님, 같이 드셔요.”
“먹었다고 했잖습니까? 나 걱정 말고 어서 드세요.”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진미류는 아쉬운 표정을 했다.
“그래서 어찌 됐어?”
“식사 끝나고.”
“입이 밥 먹지, 귀가 먹나?”
오도석은 가볍게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데브그루의 자산 운용 규모는 정확한 파악은 아직 어렵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아 보입니다만……. 한 가지.”
“자네답지 않게 뭘 그렇게 자꾸 머뭇거려. 뭔데 말해봐.”
“칼 아이칸 아시죠?”
“칼 누구?”
“칼 아이칸이라고 유명한 헤지펀드.”
“또 헤지펀드인가. 빌어먹을 놈들.”
그들은 기업인이 아니다.
헤지펀드는 노름꾼이고 사기꾼이라는 것이 유장풍의 생각이다.
“칼 아이칸이 다른 헤지펀드와 다른 점은 기업을 전문적으로 사냥한다는 것입니다.”
뚝!
기업을 사냥한다는 말에 유장풍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천연가스회사 델파민, 부동산 그룹 리퍼블릭, 타이어의 명품으로 불리는 유니온 등의 지분을 사들여 이사 자리를 차지한 뒤 경영자들을 압박하죠. 대표적인 방법이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가혹한 구조조정입니다. 그렇게 회사의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고 정리한 뒤 가치가 오를 때 지분을 팔아치우는 인수 합병(M&A)의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그의 자금이 데브그루에 들락거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자산을 운용하는 레이 달리오에 이어 이번에는 인수 합병의 전문가와 연관이라고.”
“겉으로 드러난 대표는 로버트 설이지만 그렇다고 레이 달리오도 아니고 칼 아이칸은 아닙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툭!
젓가락을 놓는다.
공기에는 절반도 넘는 밥이 아직 남아 있다.
웬만한 보고에는 결코 하던 일을 멈추는 유장풍이 아니다.
사실 오래전 칼 아이칸의 공격을 태천 계열사 한 곳이 받았고 다행히 잘 방어를 해냈지만 너무 아찔한 위기에 몰린 경험이 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입맛을 잃어버린 것이다.
“오 팀장은 어떻게 보고 있어. 이 상황을 말이야.”
오도석은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야 할지 아니면 적당히 감춰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전자든 후자든 자칫 자신의 무능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자신도 데브그루는 무대일 뿐이고, 뒤에서 무대를 총괄 지휘하는 감독이 있다는 생각은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증거도 내놓지 못한 채 제삼의 인물이 있을 것이라는 식의 보고는 유장풍이 좋아하지 않는다.
“자네가 입을 닫는 걸 보니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군.”
“가능성이 큽니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한 오도석이 슬쩍 유장풍의 눈치를 살핀다.
“받아봐.”
오도석은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김 과장!”
오도석은 부엌을 벗어나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정말입니까?”
오도석의 표정이 굳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