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62화 (62/122)

62화 제1차 부자대전(父子大戰)(1)

오도석이 침을 삼켰다.

“알았어요. 계속 알아봐요. 물론이죠.”

전화를 끊은 오도석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뭐가?”

오도석은 깜짝 놀란다.

부엌 식탁에 앉아 있는 줄 알았던 유장풍이 어느새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유장풍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할 만큼 통화에 모든 신경을 쏟았다는 뜻이었다.

“사람이 자리에 앉은 것도 모를 정도인 걸 보면 아주 불편한 전화인 모양이군?”

“판세가 장담할 정도까지는 아직 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데브그루로부터 사들인 주식을 내세워 임시주총을 소집했다.

그런데 경영권 탈취를 위한 우호 지분 확보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우리 쪽 우호 지분을 좀 더 확보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안심할 단계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하긴 하대수가 주주 관리는 잘하지.”

하대수는 크라운 대표다.

“회장님, 차 가져왔습니다. 오 팀장님도 드세요.”

진미류가 붉은색의 홍차 두 잔을 내놓는다.

“감사합니다.”

오도석은 살짝 웃어 보인 뒤 소파에 앉았다.

유장풍이 잔을 들어 뜨거운 홍차 한 모금을 마셨다.

“하대수 지분이 어느 정도라고 했지?”

“20퍼센트가 조금 안 되지만 가족들과 우호 지분을 합치면 40퍼센트 초반까지는 될 것입니다.”

공개매수로 경영권 확보에 필요한 지분을 매수할 수도 있다.

시장매입을 하려면 못해도 지금 주가의 2배 정도는 오를 것으로 예상해야 한다.

2배는 최소 가격이고 그 이상도 염두에 둬야 하고, 매도할 주주들이 매력을 느낄 만큼의 시장 가격에 맞추려면 훨씬 더 많은 자금이 소요될 수도 있다.

그뿐 아니다.

방어자가 대항적인 공개매수에 나설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주가는 더욱 뛸 것이 뻔하다.

만약 제삼자가 뛰어들어 공개매수를 할 경우 사태는 심각해진다.

유장풍이 우려하는 제삼자는 삼왕이다.

그들 역시 눈독을 들이고 있는데 말은 태천의 자회사와 같은 크라운을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며 그건 상도의에 반하는 일이라며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믿었다가는 장사 못 한다는 걸 유장풍은 알고 있다.

“일단 끌어모아 봐. 한 주를 가진 주주라도 만나보란 말이야.”

“물론입니다, 회장님.”

대답을 한 오도석은 차를 마시는 유장풍을 슬쩍 살폈다.

크라운은 보통 하청업체들과 다르다.

특히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는 상상을 초월한다.

영업이익의 절반을 기술개발에 재투자할 만큼 한국 기업풍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곳이다.

유장풍이 단순히 새로 개발된 클린 히트 안전벨트 하나 때문에 집착하는 건 아니다.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숨겨진 기술, 아직 세상에 내놓을 때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신기술이 상당한 수준까지 개발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헌데 문제는 이놈의 육감이다.

뭔 일을 할 때면 어김없이 육감이 작용한다.

이번 일도 육감이 좋지 않다.

인체는 오감을 소유한다.

그런 면에서 육감은 본능적인 느낌이나 직관으로 흔히 초식동물들이 포식자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지 않고서도 알아차리는 것에 비유한다.

‘육감은 백 퍼센트 맞다.’

누군가의 전달이 아닌 본인이 느낀 것이기 때문에 틀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크라운을 향한 유장풍의 시선은 욕심을 넘어 집착에 가까웠다.

20퍼센트의 주식을 무려 다섯 배를 주고 인수한 것이 그 한 예다.

그 정도 지분으로도 충분히 경영을 간섭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기어이 자신의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싶어 한다.

어떤 식으로든 크라운을 주머니에 넣긴 할 것이다.

허나 오도석의 육감은 그 과정에서 엄청난 출혈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었다.

장사꾼에게 출혈이란 원가의 몇 배, 심지어는 수십 배 비싼 가격에 샀을 때다.

‘음!’

20퍼센트의 지분으로도 얼마든지 크라운을 간섭하고 움직일 수 있다.

‘지금 여기서 멈췄으면.’

오도석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시간을 두고 싸워야 할 전쟁으로 판단하는데 유장풍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인다.

***

승용차 한 대가 정문에서 멈췄다.

출입 카드를 지하철 개찰구처럼 생긴 기둥에 가져다 대었다.

비이잉!

하는 소리가 들리고 앞에 있던 차단기가 올라간다.

쑤욱!

수고들 하라는 듯 경비실 창문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인 뒤 사내의 차가 조금씩 멀어져 갔다.

「낙성초등학교 26회 송년 모임」이라는 글씨가 쓰인 플래카드가 전면 벽에 걸려 있고 식당 가득 사람들이 모여 앉아 시끄럽게 떠든다.

“자, 마셔.”

“야, 진짜 몇 년 만이야.”

오랜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들끼리 술잔을 부딪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송년 모임의 분위기는 한창 달아오르고 있었다.

조금 전 회사를 나온 사내 역시 동창 모임에 참석했다.

“한 잔만 해, 인마.”

6학년 때 짝꿍이기도 했던 이동휘가 소주잔에 술을 따르려 하자 사내는 술잔을 쥐고 피했다.

“정말 못 마셔. 알잖아. 술 알레르기 있다는 것.”

“뭐? 술? 술도 알레르기가 있어?”

그러면서 주위 동창들을 둘러본다.

하지만 모두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들이었다.

“있겠지, 뭐.”

동창 한 명이 귀찮다는 듯 툭 뱉어 말했다.

“김평대 네가 무슨 회사에 다닌다고 했지?”

“조그만 건설회사야.”

“건설회사?”

“태움건설이라고 주로 도로공사와 아스팔트 포장이 주 분야지.”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술이 들어가면서 사람들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졌고 잠시 후 노래방 기계가 들어오면서 송년회는 더욱 달아올랐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단지 직업상 자제해야 하고 비상사태를 대비해 항상 긴장해야 하기 때문에 술을 피하는 것이다.

술 좋아한다.

그러나 아직은 마실 때가 아니다.

같은 일을 하는 회사 사람들 모두가 자신처럼 술을 피하는 건 아니다.

자주 마시는 이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최고위급으로 정치적 차원에서 마신다.

예를 들어 국정감사 기간이 다가오면 국회 정보위 소속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잘 봐달라는 의미의 대접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식이 술이라는 아버지의 지론이 아니더라도 술은 마실 것이다.

다만 그런 자리까지 올라 화려하게 말이다.

부웅!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려던 사내가 멈칫했다.

목덜미에 차가운 것이 닿았기 때문이다.

멈칫!

본능적으로 룸미러를 보다 깜짝 놀란다.

룸미러가 틀어져 있다.

칼 든 인물은 자신을 볼 수 없도록 미리 조치를 해 놓은 것이다.

“난 국정원 직원들이라고 하면 모두가 총을 다니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전기 충격기 하나가 전부더군요.”

차량을 뒤진 모양이다.

“갑시다.”

재촉한다.

사내는 기어를 당기고 식당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등으로 뭔가 흘러내린다.

식은땀을 흘릴 리는 없고 아마 피일 것이다.

개미에 물린 것만큼의 따끔함도 없었는데 피가 흘러내린다는 건 굉장히 예리한 칼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주차장을 나오자 묵직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내비에 은평구 진관동 111-111을 찍으세요.”

사내는 시키는 대로 찍었고 지도가 나타났다.

[50미터 앞에서 우회전하세요.]

본격적인 길 안내가 시작되었다.

사내는 내비가 시키는 대로 핸들을 틀고 방향을 바꿨다.

***

캄캄했다.

산바람이 강하게 부는 이곳은 분명 구파발 인근 북한산이다.

처음 삼천리골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당황하여 떠올리지 못했지만 기억이 생생하다.

구파발역에서 내린 등산객들 대부분이 이곳 삼천리골을 통해 산을 올라 향로봉 비봉을 거쳐 세검정 쪽으로 내려간다.

완만한 세검정 코스와 달리 시작부터 가팔라 초보자들에게는 부담스런 길이다.

“세워요!”

차가 멈추고 주위를 본다.

펜션을 지으려다 멈춘 건지 아니면 모텔 건물이 들어서려다 포기한 건지 짓다 만 4층 건물이 눈에 띄었다.

건물 주위로 마른 잡초들과 쓰레기들이 어지럽혀진 것이 제법 오랫동안 공사가 멈췄음을 알 수 있었다.

딸칵!

뒷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내린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에 재빨리 비뚤어진 룸미러를 바로 맞춰 살피지만 사람은 없었다.

스윽!

오른손을 목 뒤로 돌려 따끔했던 부위를 만졌다.

피다.

출혈은 멈췄지만 손가락에 피가 묻어나온다.

슬쩍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만치서 담뱃불 하나가 깜빡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끝내 사내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지금도 캄캄하여 담뱃불 말고는 보이지 않는다.

강도는 아니다.

문득 상대가 고정 간첩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항할 수단이 없어 고분고분 응했지만 잠긴 차 문을 열고 안에 숨어 있다가 칼을 들이대는 수법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룸미러를 돌려놓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얼굴을 노출하지 않는 수법 등등을 보면 아마추어가 아니다.

만약 자신이 국정원 요원이라는 걸 알고서도 오늘 밤 일을 진행했다면 결과는 비관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 안에는 무기로 사용할 만한 물건이 없다.

트렁크에는 골프채와 얼마 전 이삿짐을 싸면서 사용했던 노끈과 테이프가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요원한 물건들이다.

딸칵!

김평대는 차에서 내렸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태연함을 가장해야 한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고 라이터 불을 붙였다.

상대에게 납치된 포로이지만 담배 피우는 것 정도는 터치할 것 같지 않았다.

승용차 전방으로 빨간 벽돌 무더기가 있다.

김평대는 그곳에 주저앉았다.

자신을 데리고 온 사내는 오른쪽으로 앉았는데 둘 사이의 거리는 3미터 남짓 되었다.

“아버님 생신에 가야죠?”

흠칫!

김평대는 크게 놀랐다.

음력 12월 초, 그러니까 양력으로 계산하면 1월 초에 아버지 생신이다.

당연히 그날 갈 것이며 이미 통화도 끝냈다.

더욱 자신은 큰아들이다.

“올해 중학교 들어간 큰 놈이 공부를 잘하던데?”

“으음!”

숨길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사내가 뱉은 말의 겉표면은 무척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아버지에게 잘하는 효자의 모습을 칭찬하는 것으로도 들린다.

하지만 말은 껍질이 아니라 안에 들어 있는 속이 중요하다.

사내의 말은 너희 가족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으니 지금부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협조하라는 뜻이다.

협조하지 않으면 가족에게 해(害)가 간다는 경고였다.

“당신들 회사와 태천그룹과는 어떤 관계요?”

파팟!

김평대의 눈이 커졌다.

‘진짜 고정 간첩.’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태천그룹과 국정원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1급 비밀로 그 일에 참여하고 있는 현장 요원들 말고는 지휘부만 아는 일이다.

“김평대 씨.”

자신을 지목해 납치할 정도면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라 예상은 했으나 막상 불리자 묘한 기분이 든다.

앞가슴으로 찬 바람이 스쳐 가는 섬뜩한 기분.

“나 배석대라는 사람입니다.”

“허어억!”

김평대는 소스라쳤다.

배석대.

결코 잊히지 않을 이름이다.

비록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를 죽였지만 자주 생각이 나는 인물이다.

그의 주검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그날 이후 행적이 드러나지 않아 죽음으로 마무리된 이라크 신자르 산맥에서 있었던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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