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제1차 부자대전(父子大戰)(2)
김평대는 어금니를 문다.
말이 이어졌다.
“국정원이 민간 기업의 어려움에 그토록 깊숙이 개입한다는 건 한 가지를 생각할 수 있죠. 뭔가 긴히 오가는 일들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난 그게 뭔지 지금 묻는 것입니다.”
“진짜 배석대 씨란 말이오?”
그러고 보니 목소리는 배석대 같다.
스으으!
사내가 일어났다.
저벅저벅!
가까이 다가오더니 일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쭈그려 앉는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지만 워낙 어두워 얼굴 확인은 불가능했다.
탁!
라이터 불이 켜졌다.
하지만 바람에 금세 꺼졌다.
탁탁탁!
자꾸 꺼졌지만 사내는 포기하지 않고 라이터 불을 켰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바람이 잠시 멈췄고 꺼지지 않은 라이터 불에 한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턱 밑에서 타오르는 라이터 불에 비치는 사내의 얼굴은 낯이 익었고 그건 자신들이 죽은 것으로 단정했던 배석대가 분명했다.
라이터 불은 꺼졌고 주위는 다시 어둠 속에 잠겼다.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고 잠시 멈췄던 겨울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내 입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오.”
어둡지만 김평대의 눈이 반짝거렸다.
유태수는 그러냐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짧은 시간 수많은 생각과 계산이 오르내렸을 것이다.
생신을 앞둔 아버지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고, 전교에서 1등을 하는 아들의 웃는 모습도 보았을 것이었다.
아직까지 남편이 평범한 민간 기업에 다니는 줄 알고 있는 아내와의 추억까지도 끄집어냈을 것이다.
김평대의 대답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고 가치인 그 모든 사람들과 헤어질 수 있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히죽!
유태수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주 좋은 얘기요. 감동이 진하게 담겨 있소.”
유태수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고 잠시 후 배달부로부터 선물 받은 칼을 꺼냈다.
아직까지는 대나무로 보일 뿐이었다.
스으으!
칼집에서 칼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칼이 빠져나오자 갑자기 주위로 으스름한 달빛이 나타났다.
중천 하늘에 반달 하나가 떠 있는 듯 선명하지는 않지만 주위 사물이 어렴풋이 들어온다.
한 자루 얼음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칼을 보며 김평대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무슨 칼이…….’
그렇지 않아도 겨울바람으로 한기를 느끼는데 칼이 뽑히자 더욱 춥다.
“그렇게까지는 안 봤는데 대단합니다. 영화 속에서 보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정보요원들을 보며 과연 저게 가능할까 했는데 어려운 것이 아니군요.”
번쩍!
눈앞으로 한 줄기 빛이 폭발하는 듯싶더니 왼쪽 무릎이 찌릿했다.
마치 달궈진 쇠꼬챙이 하나가 쑤시고 들어온 것 같았는데 김평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으으!”
처음에는 아팠다.
그런데 갈수록 뜨거움은 고통으로 바뀌더니 끝내 온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아흐흐흐!”
참을 수가 없다.
아프다는 표현도 한참 모자라는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이 온몸을 덮어버렸다.
“위국헌신(爲國獻身),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나라가 없는데 나와 가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써거억!
무릎에 박힌 칼이 시계방향으로 틀어졌다.
파르르르!
온몸이 불에 탄다.
너무 아프면 신음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김평대는 거품을 물었다.
뭐라고 소리를 내는 듯 입술을 움직였지만 귀에 들리지는 않았다.
“랭글리 최고의 첩보요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프린스가 구소련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할 때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 입이 열리리라 생각하고 괴롭히는 것이라면 포기해라. 나라를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의 입은 죽어도 열리지 않는 법이다.”
“끄아아아!”
아홉 시에서 세 시 방향으로 박힌 칼이 열두 시에서 여섯 시로 반듯하게 돌아갔다.
뼈가 잘려 나가고 무릎을 에워싸고 있는 많은 신경들이 투투툭 소리를 내며 끊어진다.
“어어어…… 어어엉!”
김평대는 죽어가는 자의 신음을 터뜨리며 벽돌 더미에 등을 기댔다.
슥!
유태수는 담배 두 개비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중 한 개비는 자신이 물고 다른 하나는 김평대의 벌어진 입속에 찔러 넣어 주었다.
멈칫!
김평대의 눈동자가 출렁거렸다.
‘확실히 만만치 않다.’
아무나 고문하지 않는다.
누구나 고문을 하여 상대의 입을 열게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
고문도 기술이며 또한 전문적인 학습이 되어야 한다.
배석대의 표정은 처음과 지금에서 차이가 없다.
눈빛은 부드럽고 담배까지 불을 붙여 입에 넣어 주는 친절함을 보여주었다.
고문을 할 줄 안다는 뜻이다.
‘배석대.’
처음 배석대를 만날 때부터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긴 했다.
같이 배석대 사냥을 했던 선배 곽철종은 분명하게 말했다.
‘어째 느낌이 싸한데.’
배석대 제거에 대한 결과 보고를 마치고 돌아서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극한의 훈련을 받고, 숱한 위험 속을 드나들다 보니 정보원들은 일반인들이 갖지 못한 기능을 지니게 된다.
직감, 또는 본능이라는 것이다.
‘눈 봤지? 눈은 그 사람의 심리 상태를 증명하는 분명한 창문인데 전혀 그런 것이 보이지 않더라고.’
그냥 넘겼다.
배석대는 납치된 노동자들을 제거한 비밀을 알게 되어 죽였다.
죽이지 않아도 될 사람에게 총을 겨눈 것에 대한 일말의 자괴감이나 인간적 감정이 남아 있지는 않다.
그런데 상대의 행동은 완전 프로페셔널이다.
그렇다면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비정한 사고방식 말이다.
“내 가족은?”
“걱정 마세요.”
나는 죽일 것이냐는 질문을 하고 싶지만 차마 입이 열리지 않는다.
김평대의 마음을 읽었음인지 유태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편하게 보내드리죠.”
살려 줄 수는 없다.
하지만 고통 없이 죽여 준다는 뜻이었다.
“우리 회사의 보복이 두렵지 않소? 우리 회사는 무서운 국가기관이오.”
씨익!
유태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건 죽을 사람이 염려할 일이 아닙니다.”
“하긴!”
김평대가 어금니를 꾸욱 물더니 입을 열었다.
가족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에 말을 한다.
“암호명 제5의 과일.”
“제5의 과일?”
유태수의 눈이 커졌다.
***
수돗물에 깨끗이 손을 씻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손을 씻지만 오늘은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였고 힘주어 뽀드득 소리가 나게 씻는다.
지이잉!
전화가 울렸고 액정에 영문 설(seol)이라는 글씨가 떴다.
쿠욱!
스피커 폰 버튼을 누른다.
[태천에서 임시 주주 총회를 소집했습니다.]
“그래요.”
예상한 일이다.
설태왕으로부터 몇 마디 더 듣고서 수화기를 내린다.
유태수는 마당으로 나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후우우!
말보로 레드의 진한 연기가 어둠 속으로 흩어진다.
조금 전까지 불던 바람이 종적을 감추면서 연기가 마당 위를 덮는다.
지금까지는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얻었고 소유하셨지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크라운 경영에 발을 담그는 것까지는 허락하지만 칼자루까지 잡으려는 꿈은 버리셔야 합니다.
무리하셨다가는 칼자루도 잡지 못하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될 것입니다.
상대를 알고 싸우면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셨죠.
제가 지금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당신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
쭈우우욱!
담뱃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
저녁을 먹고 오랜만에 아내와 차를 마시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누구세요?”
[경비실입니다. 택배가 왔는데 가져가셔야겠습니다.]
“택배요? 옷 갈아입기도 뭐한데 아저씨가 조금 가져다주시겠어요? 부탁해요.”
[사모님, 제가 움직이기에는 너무 덩치가 커서 말입니다. 꼼짝을 할 수도 없습니다.]
“내용물이 뭔데요?”
[글쎄, 영어로 쓰여 있어서…….]
차를 마시고 있던 남편 오하수가 일어났다.
“여보, 내가 가지러 간다고 해.”
오하수는 추리닝 위에 다운 점퍼를 걸치더니 운동화를 신고 아파트 문을 나섰다.
아파트 경비 구조식이 문을 열고 나왔다.
“이겁니다.”
경비실 바로 앞에 노란 박스로 포장된 기다란 물건이 있었다.
오하수는 허리를 숙여 박스에 붙은 송장을 확인했다.
「Red Clay Matte」
“황토 매트 같은데.”
허리를 숙여 한쪽을 들어보던 오하수가 깜짝 놀란다.
“우욱!”
황토 매트가 무겁다는 건 알지만 약간 들썩이다 말았다.
오하수는 경비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같이 옮기자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너무 늙었다.
칠십이 넘었다는 얘길 들었다.
“칼 있어요?”
“예!”
노인이 경비실 안으로 들어갔다.
군 시절 유격훈련 도중 다친 허리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쑤시기는 하지만 아직 이런 매트를 깔고 자야 할 정도는 아니다.
툭!
투툭!
여기저기 붙은 테이프를 자르고 박스를 풀어 헤쳤다.
박스 안에는 지붕을 덮는 파란색 천막이 둘둘 말려 있었는데 여전히 묵직했다.
오하수는 둘둘 말린 천막을 벗기려 했지만 너무 무거웠으므로 조심스럽게 칼로 잘라 내기 시작했다.
안의 내용물이 칼이 닿지 않도록 잘라내고 위쪽 부분을 벌려 보았다.
“으허헉!”
윗부분을 벌려 보던 오하수가 소스라쳤다.
“왜 그러십니까?”
경비는 허리를 숙여 역시 파랑 천막을 벌렸다.
“헉!”
경비는 쿵 소리가 나도록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사…… 사람!”
오하수는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천막을 벌렸고 칼을 이용해 좀 더 넓게 찢었다.
뚝!
손이 멈췄고 두 눈이 커졌다.
진짜 사람이었다.
시체.
죽은 시체가 택배로 온 것이다.
***
모두들 비상호출을 받고 달려 나왔다.
오늘 낮에까지 자신들과 점심을 같이 먹고 농담을 주고받던 김평대가 죽은 것이다.
그것도 팀장인 오하수의 집 주소로 보내진 것이다.
딸칵!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급히 들어왔다.
“택배 회사에서는 전혀 배달한 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엑스레이로 일일이 화물을 들여다보는 공항세관은 아니지만 시체인지 택배인지 구분 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오하수가 사는 아파트에 들른 택배 회사의 송장을 전부 살폈고 담당 기사들에게 연락했지만 누구도 그런 물건은 내려놓거나 싣고 간 사실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방법은 하나군. 놈이 놓고 갔네.”
오하수가 입을 열었다.
수시로 아파트 곳곳을 순찰하는 경비가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택배인 양 놓고 간 것이 틀림없다.
지이잉!
인터폰이 울리자 오하수가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번호 하나를 눌렀다.
“예! 국장님!”
[내 방으로 건너와요.]
낮과 밤이 없는 정보 세계이지만 한밤중에 비상이 걸려보긴 창사 이래 처음이라고 했다.
“잠깐 국장님 만나고 올 테니 회의 계속해요.”
재빨리 윗도리를 걸쳐 입고 방을 나갔다.
올해 마흔다섯인 대테러국장 박조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을 불렀으면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만 피우고 있을 뿐이다.
불콰한 얼굴을 보아 어디선가 술을 마시다 급히 들어온 얼굴이다.
“김평대가 오 팀장 직속이지?”
“예!”
박조술은 물고 있던 담배를 건물 바깥으로 집어 던지며 돌아섰다.
“내가 아는 강력계 형사팀장이 한 명 있지. 언제가 내게 이런 말을 하더군. 피살자의 상처를 보면 대략 범인을 유추할 수 있다는 거야.”
갑작스런 범죄 얘기에 오하수는 눈을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