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66화 (66/122)

66화 인간의 눈(目)(1)

유장풍이 입술을 삐죽인다.

“그래서 이놈이 태수라는 거야, 뭐야?”

“태수라고 확신하네.”

“미친, 생긴 걸 봐. 빵을 보라고. 어디가 태수야? 그래, 태수라고 치세. 그놈 어딨나? 당장 경찰에 연락해서 잡아들여야지.”

“이런 말 들어봤나? 장강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세월은 어찌할 수가 없고 우리 또한 밀려 나가게 되어 있네.”

“무슨 개소리야?”

“떠밀려 나가는 것보다는 내 발로 나가는 것이 보기 좋지.”

그 말을 남기고 노기술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

“말하다 말고 어딜 가?”

“말이 통해야 하지.”

탁!

회장실 문이 닫혔다.

“밴댕이 소갈머리 하곤.”

투덜거리더니 노기술이 놓고 간 사진을 주워 바라본다.

한참을 바라보던 유장풍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

***

베토벤 교향곡 7번 1악장이 커피숍에 울려 퍼진다.

오도석은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가끔씩 앞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는데 아직도 약속 시간은 5분 정도 남았다.

무려 20분 전에 도착했다.

누군가와 시간약속을 이행하는데 이십 분을 먼저 온 기억은 거의 없다.

태천그룹의 인사팀장은 누구를 만나도 항상 늦게 도착했고, 설혹 늦는다고 해도 인상 찌푸리는 이는 없다.

도착하는 시간이 곧 약속 시간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십 분 전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태천 그룹의 인사팀장을 이십 분 일찍 나오도록 하는 인물이 누굴까.

벌떡!

커피숍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서자 오도석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정 다운 점퍼에 야구모자를 쓴 데이브 유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도석은 유태수를 향해 깊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커피?”

“좋아요!”

오도석은 손을 들어 여종업원에게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이제 한국에 완전히 정착하는 겁니까?”

“글쎄요. 돈만 잘 벌리면 굳이 떠날 이유는 없겠죠.”

묘하게 여운이 남는 말이다.

돈이 잘 벌리고 있으므로 아직은 떠날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여종업원이 커피를 놓고 돌아갔다.

후루룩!

커피를 마신 유태수는 정면으로 오도석을 바라보았다.

“내가 뭘 어떻게 해주면 됩니까?”

“편지에서 언급한 대로 위임장을 부탁하고자 합니다.”

“편지를 받고 나서 좀 알아봤는데 태천의 움직임이 야릇하더군요.”

야릇하다는 표현에 오도석이 살짝 웃었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직접 회사 경영에 뛰어든다면 지금보다 몇 배 큰 회사로 만들 자신 있습니다. 비즈니스 측면이나 세계시장에서의 태천 브랜드라면 크라운은 지금보다 더욱

위력을 떨칠 것으로 확신하죠.”

“그렇겠죠. 태천이 손을 대면 나무젓가락도 금 젓가락으로 변하니까.”

흠칫!

오도석이 깜짝 놀라면서 두 눈을 빛낸다.

오도석은 긴장했다.

유장풍이 사무실도 아닌 자택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분홍빛이 감도는 녹차를 직접 끓여 건네주는 유장풍에게 더욱 고개를 낮췄다.

- 뭐 해, 마시지 않고?

- 예, 감사합니다.

잔을 들어 올린다.

그야말로 코끝에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휘몰아친다.

좋은 녹차일수록 향에 취하고 맛에 비틀댄다고 했다.

아직 마시지는 않았지만 향기부터가 사람의 기분을 흔드는 걸 보면 꽤 비쌀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 모금 마셨다.

후룩!

적당히 뜨겁다.

크게 한 모금 마시기에는 뜨겁고, 입바람으로 불며 식힐 만큼은 뜨겁지 않았다.

-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아나?

총무부 소속의 인력지원실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갑자기 호출이 온 것이다.

그것도 인사팀장으로 전격 발탁됐다는 비서 장민혁의 전화를 받고 기겁했다.

몇 번이고 정말이냐고 묻고 확인했는데 사실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옷을 갖춰 입고 유장풍의 집으로 달려온 것이다.

- 어느 대통령이 그랬지. 인사가 만사라고.

기억한다.

비록 IMF를 불러온 상처를 남겼지만 민주화를 위해 걸어온 길 만큼은 존경받을 만했던 대통령이었다.

‘사람의 일이 곧 모든 것이다.’

라는 의미 아니겠는가.

모든 기업들이 앞다투어 인재를 뽑기 위해 안달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내 기업들의 채용 과정을 보면 학력 위주가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학력은 학교 공부일 뿐이고 세상살이는 공부와는 별개다.

학교 다닐 때 이른바 왈왈구찌들(공부가 아닌 다른 분야에 뛰어난 애들, 대부분 쌈질임)이 사회적응에 뛰어나고 사업에 성공을 거두는 것에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그릇과 됨됨이가 첫 번째야. 출신 대학은 두 번째라고. 내 말을 알아?

- 예.

- 인사팀장은 나무젓가락을 금 젓가락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야.

신입사원들을 나무젓가락에 비유했다.

젓가락으로서 충분히 자기 소임을 다할 수 있으나 그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뛰어난 능력, 금 젓가락이 될 수 있는 사원들을 뽑으라는 것이었다.

이런 유장풍 회장의 젓가락 이론이 지금 유태수의 입에서 나오자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태수가 눈을 빛낸다.

“위임장이니 뭐니 하는 이런 복잡하고 불편한 절차 필요 없이 태천에서 내가 소유하고 있는 크라운 지분을 전량 매수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태천이 돈이 없어 몇 푼 되지도 않는

내 지분을 못 살 리는 없을 테고.”

오도석이 커피잔을 들어 올린다.

***

크라운의 유동성 위기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주가를 폭락시켰고 삼만 원 후반대에 거래되던 것이 보름 사이에 만 원대로 떨어졌다.

그리고 한 달이 조금 지나 오천 원 선까지 무너졌다.

그때 데브그루에서 지분 20퍼센트를 확보하는 조건으로 투자에 뛰어든 것이다.

오천 원이 채 안 되는 주식을 주당 칠만 이천 원에 매수했다.

그것도 다섯 배를 계산했는데 문제는 그 이후다.

처음에는 다섯 배도 아깝지 않다고 했던 유장풍이다.

아무리 태천이라고 해도 한화 6조면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담스러운 액수는 더욱 아니다.

그런데 양측이 합의한 거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너무 많은 바가지를 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굉장히 속이 쓰린 듯 며칠간은 유장풍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러면서 유장풍에게서 발작적으로 튀어나온 외침이 있었다.

- 크라운 경영권 잡아!

이렇게 되었으니 크라운의 경영을 확실히 자신의 수중으로 가져오겠다는 의지였다.

이전까지는 대주주로 크라운을 적당히 컨트롤하겠다는 정도였다.

이제 언제까지 속쓰림에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유장풍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제 크라운을 자기 손 아래 두려 하고 있었다.

굶주린 늑대다.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기 때문에 무조건 매수하려 들 것이다.

상대가 쫓기거나 급할 때 이뤄지는 거래는 무조건 한쪽이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설마 회장님의 지금 심리 상태를 들여다보고 하는 말은 아닐 테고.’

쭈욱!

유태수는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그 노인네 거품을 물었을 것이 뻔해.’

거기다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다.

나이가 들었고 조금씩 감각이 무뎌지고 있다.

그 실례가 무려 다섯 배를 주고 주식을 매수한 것이다.

크라운이 탐이 났다고 해도 예전의 아버지라면 절대 오케이 하지 않는다.

일반 사람들이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노욕(老慾)이라는 비판을 받겠지만 아버지가 그러는 건 노망(老妄)이다.

노욕과 노망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버지는 이성보다는 서서히 본능에 지배되는 어린아이로 점차 돌아가고 있었다.

늙으면 아이가 된다.

“정말이십니까?”

오도석이 진짜 팔 마음이 있냐고 묻는다.

“이 자리가 농담할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크라운의 어제 종가가 구만 삼천 원이었습니다. 어림잡아 1조 5천억 정도 나오는군요.”

오도석의 표정이 굳어진다.

스무 배가 올랐다.

즉 오천 원 때에 매입했으니 백억 전후다.

백억을 투자해 1조 5천억을 내놓으라는 거래.

개인이 백억을 쏟아붓는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터이고 필시 여러 투자자의 자금이 뭉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자의 배후에도 누군가 있다고 봐야 한다.

“다섯 배 주시오.”

“허걱!”

강심장인 오도석이 소스라친다.

“다…… 다섯 배.”

“집에서 나올 때는 일곱 배를 요구하려고 했는데 상대의 약점을 잡아 물어뜯는 것도 적당히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크라운의 경영권을 가져가기 위해 올인하고 있다고 하여 무지막지하게 요구한다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다섯 배로 줄인 것이라는 대답이다.

“진짜 다섯 배를 원하십니까?”

“이 자리가 농담할 곳이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앞서 했던 말을 다시 뱉는다.

그건 또 한 번 같은 말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요구가 분명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쭈우욱!

오도석은 식은 커피지만 술을 마시듯 단숨에 비워 버린다.

‘설마 덫에 걸린 건가.’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전번 데브그루와의 거래도 다섯 배였는데 유태수도 다섯 배를 요구하고 있다.

다섯 배를 주고 했던 양측 거래에 대한 비밀은 철저히 지키기로 했다.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합의된 시나리오인가.

이대로 전달하면 지금 유장풍의 페이스를 볼 때 오케이 할 가능성이 크다.

씨익!

갑자기 오도석이 웃었다.

“공교롭습니다.”

“무슨 뜻이오?”

“왜 지금 떠올랐는지.”

말해보라는 듯 유태수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한 사람을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사람 한 명을 아는데 굉장하거든요.”

“그래요?”

“아무리 봐도 생김새는 아닌데 분위기가 묘하게 그와 닮았습니다. 진짜 닮았습니다. 볼수록!”

“누군지 말해보시죠?”

“핫핫핫!”

오도석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런 웃음소리에 주위 손님 몇이 돌아보았다.

오도석은 웃음을 그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또 연락드리죠.”

오도석은 목례를 하고 커피숍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유태수는 마지막 남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잔을 들어 올렸다.

끼이익!

달리던 승용차가 급정거를 하더니 오른쪽 길가에 멈춰 섰다.

벌컥!

운전석 문이 열리고 오도석이 급하게 뛰어내리더니 인도로 올라섰다.

“퀘에엑!”

길가 가로수 아래 허리를 구부리더니 토하기 시작했다.

웨엑!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마를 찡그렸다.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무슨 술을 얼마나 마셨으면 저 지랄일까 하는 경멸의 시선들이다.

주르륵!

조금 전 마셨던 커피까지 완전히 토하고서야 천천히 허리를 폈다.

오도석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았다.

갑작스러웠다.

커피숍을 나와 차를 몰고 나오는데 그때부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일시적인 현상이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심지어 어지럼까지 느끼면서 재빨리 차에서 내려 토한 것인데 속이 조금 편안했다.

‘믿을 수가 없군.’

왜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면서 이렇게 야단을 떠는지 자신은 알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긴장하면 이런 신체적 반응이 일어난다.

병원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단지 의사가 말하길 특별한 물건이나 사람에게 반응하는 트라우마성 발작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는 면 단위에 분포되어 있으나 고등학교는 읍내에 딱 한 곳이 있었다.

무려 세 군데 중학교에서 몰려든 신입생.

싸움이 벌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