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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벌집 청소부-70화 (70/122)

70화 레프트 훅(3)

감정은 슬프지만 눈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차고 넘쳤다.

그 눈을 오늘 본 것이다.

뛰는 심장은 그 눈을 보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 막내아들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채무령을 발견한 보안요원들이 깜짝 놀랐다.

아직까지 사옥을 찾아온 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데 보안팀장이 달려와 허리를 구부렸다.

“어서 오십시오.”

“나 신경 쓸 것 없어요. 가서 일들 해요.”

다다닥!

“이…… 이사장님!”

또다시 한 떼거리의 사람들이 달려왔다.

고위 간부들이다.

그중 오도석 팀장도 보였는데 채무령 앞에서 일제히 허리가 굽혀졌다.

“어쩐 일이십니까?”

오도석이 입을 열었다.

“오 팀장, 회장님 있어요?”

“계십니다만 지금 손님과 말씀 나누는 중이신데…….”

“기다리죠 뭐.”

그러면서 보안요원 두 명이 잡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또각또각 걸어갔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걸어가는 채무령을 보며 오도석의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요동친다.

입사한 지 20년이 가까이 되었지만 채무령이 회사를 찾아오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표정 어때?”

주위 간부들에게 묻는다.

“글쎄요.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감이 안 좋은데.”

그때 먼저 엘리베이터에 오른 채무령이 말했다.

“우리 먼저 갈까요?”

“아닙니다.”

오도석은 재빨리 달려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채무령을 보며 유장풍의 눈이 커졌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법이야.'

그 말 한마디에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회사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 채무령이 연락도 없이 찾아오자 유장풍은 한동안 말을 않고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저승사자 아녜요.”

“알아, 알지.”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유장풍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헛헛헛! 거 뭐라더라. 응, 맞아. 이거야말로 놀랄 노 자로군. 당신이 회사를 찾아오다니, 나 누군지는 알겠나?”

제정신 맞느냐는 질문에 채무령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여비서가 김이 나는 두 잔의 차를 가져왔다.

“대추차입니다.”

채무령이 좋아하기에 준비한 것이다.

탁!

문이 닫히자 채무령이 잔을 들어 올려 살짝 수증기를 코로 들이마신다.

향을 느끼려는 행위다.

조용히 붉은빛이 감도는 대추차를 한 모금 마신 채무령이 잔을 내려놓는다.

“뭔 일이야?”

유장풍이 참지 못하고 다그치듯 물었다.

잔을 내린 채무령이 빤히 바라보자 유장풍이 멈칫하며 더듬거렸다.

“뭘 그렇게 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것 아직도 유효한 건가요?”

멈칫!

유장풍이 깜짝 놀란다.

“아니, 농담으로 한 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거야.”

“농담할 얘기가 따로 있지, 이제 막 시집온 여자 앞에서 매몰차게 말했는데 그게 어떻게 잊혀요.”

“쯧쯧! 소갈머리 하곤.”

“대한민국이 망하기 전에는 망하지 않는다는 태천그룹이니 이제 내 말 한마디 해도 되겠죠.”

“뭔 말?”

“얼마 전에 태천건설 이라크 직원 두 명이 죽었다고 했죠. 신문에도 나왔었고, 그때 테러범들에게 당한 것이라고 한 것 같던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우리 쪽 사람들이 죽였다면서요?”

출렁!

들고 있던 대추 잔을 떨어뜨릴 뻔하면서 찻물이 탁자로 약간 떨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저쪽 정보원 사람들이 그랬다던데?”

“무슨 날벼락 맞을 소리야. 그런 말이 어딨어? 이 사람이 말이면 다 되는 줄 알아?”

“천만 원을 거지에게 적선하듯 부의금으로 던져 줬다더군요.”

“이…… 이 사람이 정말.”

“당신은 한 집안을 멸족시켰어요. 자식이라고는 하나뿐인데 그 아들이 죽었고, 다니던 회사에서는 위로금 명목으로 천만 원의 부의금을 가져왔어요. 생각해 봐요. 얼마나 치욕스럽겠어요.

차라리 빈손으로 가서 영정사진에 큰절하고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 한마디 했다면 어머니가 투신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당신이 죽인 것 맞죠?”

부들부들!

유장풍은 두 주먹을 쥐었는데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하하!”

유장풍은 갑자기 괴성 비슷한 웃음을 터뜨렸다.

“절간을 오래 다니더니 부처님이 되셨구만. 순두부에 이빨도 박히지 않을 소리 그만해. 그러는 당신은 얼마만큼 세상을 성실하고 순백으로 살았기에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당장

여기서 나가. 어서!”

“내 삶이 깨끗했단 말 안 했어요. 다만 이제부터라도 사람처럼 살아보자고 했던 거죠.”

“왜 이러실까? 개처럼 계속 살아,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유장풍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가 짖지 않는다고 사람 되는 줄 알아? 뭣들 하는 거야! 당장 이 사람 데리고 나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유장풍은 재차 소릴 지른다.

“장 실장, 장 실장!”

덜컹!

문이 열리고 장민혁 수행비서가 뛰어 들어왔다.

“저 사람 데리고 나가.”

“회장님!”

“꼴도 보기 싫어. 어서 끌어내!”

“회삽니다. 목소리 좀 낮추시죠. 밖에 있는 직원들 듣습니다.”

“들으라고 해.”

“언제 오셨습니까?”

장민혁이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장 실장, 잘 왔어요. 이승수라는 사람 알죠?”

얼른 떠올리지 못하는 듯 이마를 찡그리자 채무령이 다시 말했다.

“얼마 전 이라크에서 죽은 우리 직원 말이에요.”

“아아! 예 압니다. 젊은 사람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사람 어머니가 상심한 나머지 투신했다는 것도 알겠군요?”

“그…… 그렇습니다.”

“장례식장에 누가 갔나요? 설마 우리 직원도 아닌데 거길 뭐 하러 가느냐는 건 아니겠죠?”

“이사장님!”

채무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알아요. 지금부터라도 짖고 물어뜯는 개 같은 짓거리를 하지 않으면 우리 집안의 과거가 조금은 사면이 될지.”

“쯧쯧! 부처, 예수 났군.”

탁!

채무령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빌어먹을 마누라.”

유장풍은 거칠게 욕을 뱉어내며 탁자 위에 놓인 시가 케이스를 열었다.

손가락 굵기의 두툼한 시가를 하나 들더니 끝에 있는 포장 부분을 칼날로 툭 잘라냈다.

치익!

기다란 나무 성냥으로 불을 켜더니 시가에 붙이고 빤다.

코히바(Cohiba), 이름하여 시가 계의 에르메스로 불리는 초고가의 명품이다.

우라질, 날궂이 하는 것도 아니고, 형편없는 여편네 하며 유장풍은 화를 삭이지 못했다.

“장 실장!”

“예!”

장민혁이 가까이 다가와 선다.

“알아봐. 죽은 놈 이름 뭐야? 이라크에서?”

“이승수와 차만오입니다.”

“어미가 투신했다는 녀석, 거기 좀 가봐. 눈치를 보아하니 여편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거길 간 모양인데.”

“알겠습니다.”

장민혁이 나가자마자 유장풍은 피우던 시가를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렸다.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진 것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더니.”

남은 대추차를 원샷으로 비웠다.

***

가난하면 결코 친인척들에게 안부 인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가난한 형제의 전화는 피하고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이승수의 어머니는 결코 두 명의 오빠와 한 명의 언니가 있지만 전화를 끊고 살았다.

이승수의 친가 쪽에도 두 명의 백부가 있지만 역시 길거리에서 부지불식간에 만나면 알아보지 못할 만큼 관계에 먼지가 가득 쌓였다.

그렇게 외면하고 모르는 척했던 여동생과 제수씨의 장례식이 삐까번쩍하다.

아들이 죽으면서도 어떤 보상금 따위는 없었다고 들었다.

도대체 어디서 돈이 났을까.

장례관계자에게 슬쩍 물었더니 오천만 원 이상의 비용은 나올 것이라고 말한다.

친인척들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다.

남의 장례식장 찾아온 듯하더니 갑자기 삼삼오오 모여 이승수의 학창 시절 공부 잘했던 얘기며, 가난했어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다는 어머니 칭찬에 여념이 없다.

“대한민국 참 멋진 나라다.”

보다 못한 송만술이 구역질 난다면서 씹어 뱉는다.

유태수는 그러는 송만술을 보며 히죽 웃었다.

어려서부터 눈이 아플 만큼 보고 자랐던 풍경이어서인지 자신의 눈에는 그러려니 하지만 송만술은 속이 메스꺼운 모양이다.

아버지를 향한 회사 사람들의 아부는 상상을 초월한다.

어린 나인데도 낯이 뜨거움을 느낄 정도였다.

“돌아버리겠네.”

고주식이 구시렁대며 다가온다.

“왜, 또?”

송만술이 묻자 고주식이 인상을 썼다.

“왜 내가 상주 노릇을 하는 시간만 되면 이러지. 태천그룹에서 또 왔어. 아이 짜증 나.”

“누가 왔는데?”

송만술이 묻는다.

“회장님 지시로 비서실에서 왔다던데.”

“유장풍 회장이 보냈단 말이야? 이거 말이 됩니까?”

송만술이 놀란 표정으로 유태수를 바라보았다.

유태수는 재밌다는 듯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유태수는 아버지를 대신해 장민혁이나 오도석 둘 중 한 명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수행비서인 장민혁이 왔다는 건 아버지가 극도로 분노했다는 의미다.

그건 곧 조금 전 장례식장을 다녀간 어머니가 회사를 찾아가 이승수의 죽음이 테러범들 소행이 아니며, 충격으로 어머니까지 투신했으므로 태천그룹이 한 가족을 몰살한 것이라는 말을

전달한 것이 분명하다.

「여기저기 사회적 약자나 소외된 단체를 찾아다니며 봉사도 하시고 적지 않은 기부금을 내시고 있더군요.」

가정 문제 상담소에서 온 첫 보고서였다.

그것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

어머니가 저지른 행위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진심으로 과거를 뉘우치려면 자신이 지닌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고 가진 재산 전부를 사회에 내놓아야 그나마 네오에게 사정을 해 볼 수 있다.

어머니의 지금 행동은 사람을 죽여 놓고 부의금 몇 푼 보내는 꼴이다.

용서는 피해자의 몫이지 가해자가 결정할 수 없다.

장민혁의 방문은 위로를 위함이 아니라 어머니를 회사로 찾아가게 한 자신을 만나보기 위해서인 것이다.

장민혁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먹는 건 아니다.

자신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만나기 위해 벌이는 연출이다.

슥!

유태수가 맞은편에 앉았다.

투툭!

장민혁이 국물을 떠먹던 일회용 수저를 떨어뜨렸다.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고 그냥 앉았을 뿐인데 장민혁이 놀란 것이다.

‘빠르군.’

장민혁은 이미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기세가 유태수와 너무 흡사하다는 걸 느꼈다고 보았다.

“별일이군요. 오전에는 여왕 폐하께서 이 누추한 곳을 오셨는데 오후에는 회장님의 사자(使者)가 찾아오고.”

“이라크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유태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국에 오신 이유를 조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알잖소.”

흠칫!

맞받아치듯 말하자 깜짝 놀란다.

“알면서 묻는 건 유장풍 회장님 특기라고 알고 있는데 그분을 오래 모셔서인지 닮아갑니다.”

“네…… 네!”

연거푸 당황한다.

맞다.

유장풍 회장을 오래 모셔서 잘 안다.

알면서도 이쪽 반응을 떠보기 위해 묻는 유장풍 회장의 처세술은 악명 높다.

특히 간부들 사이에서는 공포다.

알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생각이나 과장된 보고를 했다가 그 자리에서 날벼락 맞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하면?”

“완전히 정착하기 위해 들어왔다고 내가 오도석 팀장에게 말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을 리는 없고.”

이미 유장풍을 통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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