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정체불명(1)
피곤한 모습으로 잠시 앉아 있던 유태수는 흘긋 도청 장치가 숨겨진 창가 화분을 한번 바라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넥타이를 풀어 놓고 담배를 들고 마당으로 나온다.
딸칵!
말보로 레드를 피워 문 유태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이지만 북한산 깊은 곳이어서인지 별이 보이는 것이다.
후우!
뿜어내는 푸르스름한 말보로 레드 연기 사이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CIA 중동지역 책임자인 사이먼이다.
두 달 전 암호명 제5의 과일에 대한 얘기를 나눈 뒤 말미에 사이먼이 불쑥 입을 열어 말했다.
- 영국의 BP기업에 대해 알고 있나?
유태수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물론 아버지 유장풍 회장의 입을 통해서였다.
시가총액이 태천을 앞지르는 거대기업이며 영국을 대표하는 석유 기업이라고 했다.
- 그곳에서 미국 시장 진출의 파트너로 일본의 미쓰비시와 한국의 태천에너지를 저울질하고 있다는군.
유태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 지금으로서는 미쓰비시와 합작할 가능성이 80퍼센트 정도랄까.
- 태천에너지와 합작하도록 만들어 주시죠.
느닷없는 요구에 사이먼도 당황했다.
- 지금 뭐라고 했나?
- 태천에너지와 합작하도록 손을 좀 써달라는 것입니다.
- 자네가 태천에너지 소유자도 아니잖나?
- 지금부터 작업에 들어가서 기어이 경영권 지분을 매수할 테니 꼭 태천에너지로 밀어주시죠.
- 하아, 이 사람.
거듭 놀란다.
물건을 만들 공장도 아직 짓지 않았으면서 물건값 내놓으라는 격이라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유태수는 기어이 데브그루가 태천의 경영권에 필요한 지분을 매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오늘 BP에서 직접 온 것이다.
지이잉!
주머니 속 핸드폰이 움직인다.
꺼내 확인하는데 설태왕이다.
“어딥니까? 아직도 회삽니까?”
[우린 밤이 깊어질수록 감각이 더 살아나죠.]
아직까지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뜻이다.
[기자들에게는 언제 흘리죠?]
유태수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영국의 세계적인 에너지 기업 BP사와 태천에너지가 합작하여 미국 시장에 진출한다는 발표가 나면 그야말로 주가는 대폭발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오천 원에서 놀던 주식이 데브그루가 판을 키우면서 지금은 일만 이삼천 원을 오르내린다.
태천에너지를 인수한 데브그루가 앞으로 어떤 그림을 내놓을 건지 시장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다.
“꼭 날짜를 정해 터뜨릴 필요 있습니까? 어차피 밥이 익으면 김이 피어나는 건데.”
[내버려 두자?]
“내가 왜 브룩스 이사가 묵을 호텔을 하드록으로 예약한 줄 아십니까?”
[예?]
하드록 호텔은 한국을 찾는 거물 비즈니스맨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이다.
남산에 있어 한눈에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청와대까지는 10분이면 들어갈 수 있다.
얼마 전 사우디 빈 살만 왕세자가 자신이 묵는 층 전부를 예약하는 것으로 한바탕 유명세를 치렀다.
어쨌든 그런저런 이유 때문에 경제부 전문기자들과 외교통상부 출입 기자들이 가끔 호텔에서 목격되는데 정치 경제적으로 극비리에 한국을 방문한 국제적 거물들의 그림자가 보이는지 살피기
위함이다.
그런 호텔이므로 우리가 입을 열지 않아도 지금쯤 누군가가 브룩스 이사를 발견하고 관찰 중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으음!”
설태왕은 무거운 신음을 흘리며 전화를 끊었다.
놀라운 사람임은 틀림없다.
정보는 자연스럽게 흘러갈 때 시장에 던지는 충격이 크다.
브룩스의 숙소까지 계산한 배석대의 치밀함은 노력이라기보다는 타고난 장사꾼이 아니고서는 보여줄 수 없는 일들이다.
‘배석대.’
시간이 흐를수록 그림자가 크다.
이런 일이 생기면 솔직히 등골이 서늘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자신은 공부를 하여 펀드 매니저가 되었다.
헤지펀드계의 대부랄 수 있는 레이 달리오를 만나 많은 수업을 받았고 기법을 전수했다.
하지만 배석대가 투자에 대한 공부를 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BP가 합작회사로 태천에너지를 결정한 건 CIA의 교묘한 작전 때문이다.
하지만 태천에너지를 인수하고, 브룩스를 하드록 호텔에 묵도록 조치한 건 전부 배석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태천의 수많은 계열사, 즉 큰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런데 태천에너지를 선택하여 공격한 이유가 뭘까.
갑자기 태천그룹의 속사정에 대해 알지 않고서는 진행할 수 없는 일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설마.’
설태왕의 고개를 살짝 저었다.
태천그룹은 뉴욕 증권거래소에서도 매력 있는 투자처다.
그래서 펀드 매니저로서 누구보다도 알고 있는 편이고, 특히 한국으로 건너와 태천그룹의 가계도를 들여다보기에 이르렀다.
‘누구였더라.’
한국 이름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핸드폰을 들어 번호 하나를 눌렀다.
뉴욕에 있는 친구이자 데브그루 미국 지사를 책임지고 있는 무어이다.
“무어! 거긴 오전이겠지. 뭐 좀 물어보자고, 기억이 잘 안 나서 말인데 누구였지?”
[누구?]
“태천그룹 유장풍 회장의 아들 중 한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했지?”
[막내아들 유태수.]
“오우 맞아. 그래, 고맙네. 그쪽 상황은 좀 어떤가?”
[아직은, 그렇다고 나쁜 건 아니야?]
무어는 금융주 투자에 관한 자신은 따라갈 수 없는 순발력이 있다.
그의 꿈은 데이비드 테퍼 회장을 능가하는 것.
데이비드 테퍼는 공포를 매입해 돈을 번다는 인물이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 금융주로 40억 달러를 벌어들인 기상천외한 인물이다.
한화로 하루에 135억씩을 주머니에 챙긴 금융주 투자 전문가.
전화를 끊고 난 설태왕은 컴퓨터로 유태수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러자 곧바로 유태수에 대한 기록이 화면에 떴다.
군 시절 사진인 듯 군복차림이었는데 계급이 병장이다.
형을 죽이고 어쩌고 하며 자세하게 쓰여 있었는데 고개를 갸우뚱한다.
‘얼굴이 전혀 아닌데.’
사진의 모습은 데이브 유, 배석대의 얼굴이 아니다.
이름 정도 바꾸는 건 미국 사회에서 워낙 흔한 일이기 때문에 관심사는 되지 않는다.
자신도 로버트 설로 불리지만 한때는 마이클 왕으로 명함을 박은 적이 있다.
이름을 여러 개 사용하는 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범죄나 비도덕적인 일을 하기 위함이 아닐까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얼굴을 드러내 놓고 하는 투자도 있지만 이름만 오픈한 투자가들이 월가에는 즐비하다.
“으흐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배석대.
데이브 유.
배석대는 태천건설에 입사했던 실존 인물이고, 데이브 유는 만들어낸 가공인이다.
‘자꾸 이상한데.’
펀드 매니저의 감각이 남다른 탓일까.
오늘따라 배석대의 정체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이 피어난다.
의심이 아닌 이상함이었다.
***
1954년 브리티시 석유유한회사가 되었다가 1982년 상호를 BP(영국국영석유회사: The British Petroleum Co)로 변경하였다.
영국에서 가장 큰 에너지 기업으로 오래전부터 북해유전을 개발하고 있는데 20여 년 전 미국의 중견 석유회사를 흡수 합병하면서 엑슨 모빌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석유 기업이
되었다.
BP가 어떤 기업인지 몰라서 보고서를 받아 보는 것이 아니다.
도무지 뭐가 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시장의 판도가 경악스럽게 돌아간다.
회사를 넘긴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BP와 신재생에너지 미국 시장 합작 투자가 발표되면서 일만 이삼천 원 언저리에서 놀던 주식이 폭등을 넘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뛴다.
“보름 만에 열 배가 올라?”
사이드카가 밥 먹듯 발동되었다 멈추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길은 잡히지 않았다.
일만 오천 원 하던 주식이 오늘 폐장가 십오만 이천 원이다.
열 배가 넘는 수직 상승이다.
51퍼센트의 지분을 삼천억에 매입했다.
그런데 열네 배 가까이 올랐다.
대충 헤아려도 4조 2천억이다.
아무리 헤지펀드라는 것이 단기 수익을 올리는 상품이라고 해도 이건 기가 막힐 일이다.
“나를 두 번이나 이용해 먹는 것 아닌가.”
회장실에 사람들이 모였다.
유장풍 회장을 비롯해 장민혁 실장, 오도석 팀장, 그리고 노기술 자동차 사장과 동생 유동풍, 마지막으로 장남 유종태다.
그야말로 면면이 알짜배기 측근들이자 태천그룹의 심장부다.
부들부들!
유장풍 회장의 입에 물린 시가가 심한 경련을 일으킨다.
숨을 죽인다.
유장풍이 이토록 분노한 모습은 처음이다.
친구이자 창업 동지인 노기술도 당황한 듯 입도 벙긋 않고 앉아 있고, 가끔씩 바른 소릴 하던 동생 유동풍은 아예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도 형님의 이런 모습은 오늘 처음 보기 때문이다.
“어디서.”
목소리까지 떨린다.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거지. 어디서부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데브그루.”
쉬지 않고 데브그루를 중얼거렸다.
우린 가끔 그런 소리를 한다.
내가 미쳤지.
내가 귀신에 씌었나.
어이가 없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에 휘말리거나 이용당했을 때 스스로 내뱉거나 아니면 주위에서 하는 소리들이다.
유장풍.
경제잡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100대 부자 중 67위로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큰 재산을 소유한 인물이자 태천그룹의 창업주다.
“말해봐!”
시선이 오도석을 향했다.
태천그룹에서만큼은 인사팀장은 이사급이다.
인사가 만사임을 주창해온 유장풍이기에 그의 사람 보는 눈을 신뢰하고 아직까지는 적재적소에 정확한 사람을 보내고 앉혔다.
오도석이 올리는 인사안 중 거의 90퍼센트가 그대로 사인이 날 만큼 신뢰도는 흔들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잘못 낀 단추 아니야?”
출렁!
오도석의 눈빛이 흔들린다.
데브그루와 크라운 주식 매수 건에 직접 일선에서 움직였다.
그러나 최종 결재는 유장풍이었고 자신은 분명히 부정적 의견을 내비쳤지만 기어이 다섯 배를 주고 매수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던지는 저 질문은 자신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오도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말이 나와도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무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이번 태천에너지 지분 매도에 이은 BP와의 합작,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보나?”
이번에는 장민혁 실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한마디 해도 되겠나?”
노기술이 입을 열었다.
유장풍이 입을 다물자 노기술은 말을 이었다.
“지금 질문 말이야. 헤지펀드가 어떤 부류들인지 몰라서 한 건가? 우린 눈엣가시였던 태천에너지를 판 것에 만족해야 하네. 이후 벌어지는 일까지 들여다보면 안 돼. 팔아 버린
물건인데 그 물건이 이후 누구 손에 어떻게 들어가고 무슨 가격으로 재거래되는지 알 필요도 없어.”
“누가 몰라서 그러나?”
“알면서 그럼 왜? 목에 걸린 가시 넘어갔으면 됐지, 뭐가 또 부족한 거야. 사촌도 아닌 촌수 없는 사람이 논을 산 것까지 배 아파하면 어쩌자는 거야?”
피식!
유장풍이 실소를 지었다.
갑작스런 실소에 모두가 놀란다.
“내가 뭔가에 단단히 씌었어.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병신 짓거리를 할 리 없어.”
오도석은 눈을 감았다.
자신의 실수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 실수란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섯 배를 주긴 했지만 향후 20년간은 자동차 안전벨트 시장을 장악할 크라운 지분 삼분지 일을 거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