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칼이 온다(1)
혹시나 오늘은, 내일은 하면서 기다렸지만 끝내 이승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태천그룹으로부터의 더 이상 움직임은 없었다.
또한 금방이라도 보상금을 보낼 것처럼 하던 어머니 채무령 역시 장례식장 한 번 다녀간 것으로 끝이었다.
‘언론의 시선을 의식한 행보였던 거야.’
어머니의 장례식장 방문은 그날 밤 뉴스로까지 보도되었다.
기자의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며 일체 어떤 말도 하지 않음으로 어머니는 자신의 인품을 대중에게 드러내 보인 것이다.
임직원이 간 것이 아니라 태천그룹 총수의 아내가 찾아갔다는 건 확실히 여론 환기에 도움이 되었다.
이승수 어머니의 자살 소식에 어찌 됐든 태천그룹을 향한 시선들이 싸늘했는데 어머니의 장례식 방문으로 완전히 회복된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어머니는 회사로 아버지를 찾아가 큰 소리를 내며 싸웠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진심이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 역시 어머니의 소름 끼치는 연출 기획인 것이었다.
회사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품을 보여주기 위한 쇼였던 셈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의도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알고서도 화를 낼 수밖에 없도록 어머니가 만든 것이다.
“으음!”
어머니에 대해 조금씩 껍질이 벗겨진다.
아버지와 달리 어쩌면 어머니야말로 물밑에서 누구보다도 잔혹하게 경쟁자들을 사냥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사냥했다는 확신이 든다.
저벅저벅!
유태수는 다소 먹먹한 시선으로 커피숍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데이브 유?”
유태수가 고개를 돌렸다.
유종태가 수행비서 정준구와 서 있었다.
유종태 측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나와 기다리던 중이었다.
유태수는 유종태와 정준구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나도 안 변했군.’
유태수의 시선은 형 유종태보다 뒤에 서 있는 정준구에게 박혔다.
얼마나 당했으면 정준구는 눈물을 보였다.
군대 입대를 며칠 남기지 않았을 때였다.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이던 5선 의원 이찬목과 큰형 유종태가 저녁 약속을 했다.
그런데 수행비서 정준구는 그만 시간 착오를 일으키고 말았던 것이다.
저녁 7시 약속을 8시로 기억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더욱 놀라운 건 국방위원장 이찬목 의원의 태도였다.
그는 이쪽에 왜 오지 않느냐, 어딘데 이렇게 늦냐는 전화 한 통 없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했다.
그날 저녁 식사가 끝나도록 유종태는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야 했다.
그 일로 정준구는 사표를 강요받았다.
사표를 내지 않기 위해 밤늦은 시간에 집까지 찾아왔다가 유종태의 갖은 폭언에 시달렸다.
- 아저씨!
유태수가 대문을 열고 나오는 정준구를 뒤따라 나왔다.
고개를 돌린 정준구는 재빨리 눈물을 훔치면서 괜찮은 척하려 애썼는데 유태수가 빙긋 웃었다.
- 더럽죠?
- 태수야! 전혀 그런 생각 하지 않아.
정준구는 더럽냐는 유태수의 말을 우리 큰형이 아니꼽냐고 묻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 내가 봐도 형이 심했어요. 국회의원 아니라 대통령과도 약속 시간을 잘못 전달할 수도 있는 거지.
- 아니야. 그게 내 실수…….
- 다른 건 몰라도 아저씨 그만둘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테니 걱정 말고 돌아가세요.
- 고맙다, 태수야.
씨익!
유태수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 나중에 소주나 한잔 사세요.
정준구는 걱정 말라고 했다.
언제든지 소주 생각나면 전화하라며 크게 웃었다.
정준구는 물러갔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유태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형이다.
아버지 뒤를 이어 태천그룹을 이끌어갈 차기 총수가 유력한 사람이다.
자신과 사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나이 차이가 있기도 했지만 성격이 맞지 않아 기억될 만한 추억은 별로 없다.
“바쁘실 텐데?”
무슨 일로 태천그룹 차기 총수가 되실 분께서 날 만나자고 한 것이냐는 시선을 던진다.
유종태는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는데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핏줄만이 느낄 수 있는 교감이자 감응인가.
낯설지 않다.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눈빛이다.
물론 생김새는 전혀 다르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낯익다.
“시간을 내주어 고맙습니다.”
유종태는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아침에 썼던 글귀를 떠올린다.
「참초부제근맹아의구발(斬草不除根萌芽依舊發)」
글귀가 담고 있는 뜻을 그 자리에서는 몰랐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알게 되면서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풀을 베고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싹은 옛것이 다시 돋아난다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병폐를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걱정거리가 다시 일어난다는 건데 삭초제근이라는 말로도 가끔 사용되었다.
후환을 없애려면 뿌리까지 쳐버려야 한다는 잔인한 말이다.
후환(後患).
아버지에게 후환이 될 만한 사람은 누굴까.
오래 고민하지 않고 떠올렸다.
지금 면전에 있는 데이브 유.
크라운을 입에 넣으려는 아버지의 꿈을 무산시켰고, 태천에너지를 싼값에 인수하여 열 배가 넘는 이익을 남기기 직전이다.
아버지 사전에 이런 상대는 있을 수 없다.
아직까지 아버지를 이토록 속 쓰리게 만든 상대는 없었다.
데이브 유가 유장풍의 존엄을 훼손한 꼴이다.
아버지가 던진 메시지는 그것이다.
자신이 눈앞의 데이브 유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그 결과에 따라 회사 경영권이 주어질지 그렇지 않을지 결정될 것이라는 뜻이다.
“데브그루 투자자라고 들었습니다.”
“일부분이죠.”
투자자이긴 하지만 그렇게 막강한 힘을 지닐 만큼 손 큰 고객은 아니라는 의미다.
“한국인입니까? 미국인입니까?”
데이브 유는 이중국적이다.
한국인도 되고 미국인이기도 했다.
“많이 궁금한 모양입니다.”
모든 것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유종태가 데이브 유를 찾아올 사람은 절대 아니다.
크라운에 투자하여 막대한 차익을 얻은 것이나 태천에너지를 인수하자마자 영국의 세계적 석유회사 BP와 합작 투자 기사가 쏟아졌다.
아버지 유장풍은 데브그루의 자금이 크라운에 들어갈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워낙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분이기 때문에 어쩌면 헤지펀드의 공격이란 걸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에서는 콧방귀를 뀌었을 수도 있다.
자신감.
태천그룹이 헤지펀드 공격을 받은 것이 여러 차례다.
가장 가까웠던 일이 삼 년 전에 있었던 태천상선 사건이다.
갑자기 외국인들의 태천상선 주식 취득이 급증했다.
물론 이 외국인들은 다름 아닌 '메트리카 파트너스(Metrica Partners)'라는 싱가포르 헤지펀드였다.
파트너스는 주식을 취득한 뒤 태천상선에 대한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며 경영 참여를 시도했다.
결국 파트너스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세 차례에 걸쳐 주주총회를 열었지만 끝내 태천상선 경영권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대신 취득 시보다 주가가 5.3배 올라 일조 삼천억 가까운 이익을 남겼다.
크라운에 이어 태천에너지로 엄청난 거액을 거머쥐었다.
이제 백 퍼센트 누군가 태천그룹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걸 아버지는 확신한 것이다.
제3의 정보망까지 동원해 데브그루의 배후가 누군지 밝혀내려고 했으나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
그러자 아들 유종태를 보냈다.
한마디로 적국(敵國)에 사신(使臣)을 보낸 것이다.
사신은 자칫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 돌아온다면 적국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낼 수가 있다.
특히 적국의 왕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분명하게 앎으로써 전쟁을 하든 하지 않든 대비책을 세우는데 한결 수월해진다.
“아직도 배가 고프십니까?”
계속 한국에서 사냥을 할 생각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재벌이 돈 많다고 돈벌이 그만둔 것 본 적 있습니까? 다다익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흠칫!
유종태의 눈이 커졌다.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을수록 더욱 좋다는 뜻이다.
이 말을 가장 즐겨 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 유장풍이다.
뭐든지 많을수록 좋다.
그중에서 돈이야말로 많을수록 날 더욱 기쁘게 한다는 것이 유장풍의 지론이다.
그런데 눈앞의 데이브 유의 입에서 아버지와 똑같은 말이 나왔다.
‘어랏.’
자신을 보며 살짝 웃는 미소 속의 눈빛이 너무 익다.
너무 눈에 익어 갑자기 경계심보다는 친밀감이 들 정도였다.
‘태수.’
막냇동생 유태수의 눈빛이다.
닮은 것이 아니라 똑같다.
출근길에 유치원까지 태워다 주기까지 한 동생의 눈빛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고 보니.’
데이브 유를 만나고 온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유태수의 이름을 들먹였다.
장민혁 실장도, 오도석 팀장도 하나 같이 눈빛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유태수라고 했다.
거기에 장례식장에 다녀온 어머니도 너무 기이했다면서 그놈이 환생이라도 한 건지 하며 넋두리를 했다.
두 사람은 본격적인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업과는 전혀 상관없는 상대의 신상이나 주변 친구들과 학창 시절 등 잡다한 얘기들이 오갔다.
말속에 그 사람의 생각이 들어 있다.
상대의 말을 자주 듣는 이유는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회사로 돌아오자 아버지 유장풍은 없었다.
시내 모처에서 얼마 전 한국을 다녀간 사우디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의 수행비서를 만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빈 살만은 사업적인 투자 말고도 개인적으로도 두터운 친분을 자랑한다.
얼마 전 청와대 초청으로 입국했다가 워낙 바빠 유장풍을 만나지 못하고 간 것이 못내 미안했었는지 기어이 수행비서를 보내 위로하는 것이다.
돈 많은 그가 단순히 식사 한 끼로 위로를 끝낼까.
유종태는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뭔가 선물을 가져왔을 것이다.
유종태는 무거운 얼굴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애연가다.
머릿속에는 데이브 유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로가 묻고 주저 없이 대답했다.
가족 관계에서부터 학창 시절, 특히 데이브 유는 용병 시절의 얘기를 실감 나게 풀어 내놨다.
‘데이브 유.’
2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눴다.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건 그에 대해 알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과연 데이브 유에 대해 알았을까.
삐이익!
인터폰이 울리고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회장님 돌아오셨습니다.]
유종태는 곧바로 담뱃불을 끄고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유장풍의 표정이 밝다.
그건 빈 살만의 수행비서와 무척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술까지 한잔한 듯 얼굴이 불그스레했다.
“언제 봐도 멋진 사람이야.”
목소리가 우렁우렁했다.
딸칵!
문이 열리고 장민혁 실장이 들어왔다.
“양쪽 모두 약정서에 가서명이 끝났습니다. 이제 회장님께서 리야드로 가셔서 사인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서류를 유장풍에게 조심스럽게 내민다.
탁!
두꺼운 남색 표지를 넘기자 잘 정돈된 서류가 있었다.
유장풍은 천천히 서류를 읽었고 한쪽으로 앉은 유종태가 장민혁을 향해 뭐냐는 눈짓을 했다.
그러자 장민혁이 빙긋 웃었다.
“사우디 해양플랜트에 대한 약정서입니다. 대강의 아웃라인을 그쪽에서 세워 왔기에 오늘 가서명했습니다.”
“해양플랜트?”
유종태가 깜짝 놀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