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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벌집 청소부-76화 (76/122)

76화 칼이 온다(2)

“규모는?”

“최소 가스유전 세 척과 석유개발 두 척입니다.”

해양 플랜트 산업은 새로운 고부가 가치산업이다.

다만 아직까지는 국내 기술의 한계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전문기술자와 핵심 설비들을 발주처에서 국내로 들여와 설치 제작하기에 큰 이익을 남기지는 못한다.

그나마 국내 기술에서는 태천중공업이 가장 앞서 있다.

다섯 척이면 최소한 40억 달러 이상이다.

빈 살만이 통 크다는 걸 다시 실감한다.

탁!

아버지는 사업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는데 보던 서류를 소리 나게 덮고서 시가를 꺼내 물었다.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만나봤어?”

유종태를 향해 묻는다.

“예! 두 시간 정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래! 어때?”

“흠!”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두 시간여 동안 얘길 나눴지만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된 데이브 유에 대한 형상이 하나도 없다.

안개처럼 분명히 두 눈으로 볼 수 있었지만 해가 떠오르면서 사라져 버리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왜 아무 말이 없냐?”

유장풍이 나직하게 묻는다.

현재로서는 자신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장남이다.

장자 세습이란 규정은 없으나 큰아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집안의 기둥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예외는 언제든지 있다.

굳이 반듯하지 않고 구불구불한 나무를 선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버지!”

“그래, 말해 봐. 편하게.”

“솔직히 기억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꿈틀!

유장풍의 눈썹이 움직인다.

티익!

유장풍이 탁자를 툭 치듯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을 두 시간 동안이나 만나고 왔는데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없다?”

“글쎄, 그것이 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시가를 문 유장풍이 소파에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견고하고 색이 아름다운 자단목으로 뼈대를 이룬 의자다.

푹신한 의자는 허리와 신체 여러 관절 계에 좋지 않다고 하여 최소한의 쿠션만 집어넣은 의자다.

역시 자단목으로 된 장방형 책상,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회장 유장풍이라는 명패는 들어서는 사람을 짓누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네가 귀신을 만나고 온 모양이구나.”

“젊은 사람치고는 무척 여유가 있었고, 또.”

하나씩 나열하듯 더듬거리며 말했지만 자신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닌자라고 들어봤느냐?”

금시초문이다.

“닌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일본의 밤을 지배했던 자객들이다. 자객이 뭐더냐?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부류들 아니냐. 침투, 암살, 교란, 변장에 워낙 능숙하고 두 눈을 뜨고서도

다가오는 걸 발견하지 못할 만큼 자신을 숨기는 데 뛰어나지.”

멈칫!

유종태의 눈이 떨린다.

데이브 유의 얼굴이 여러 가지로 겹치고 있었다.

사실 유종태는 지금 한 가지를 크게 놓치고 있었다.

눈빛은 완전히 동생 유태수였으나 얼굴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얼굴이 혼동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유태수의 눈빛은 아주 강렬했다.

눈으로 싸운다면 결코 유태수를 이길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가족들끼리 말하기도 했었다.

그런 유태수의 눈을 데이브 유가 갖고 있다 보니 머릿속이 혼란이 온 것이다.

눈은 유태수고 얼굴은 전혀 아니다 보니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내려지지 않고 자꾸 흔들리는 것이다.

“종태야!”

“예, 아버지!”

“데이브 유가 적이냐, 아군이냐?”

“흐읍!”

유종태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데이브 유의 특징을 잡아내지는 못했다고 치자. 그러나 날 해치려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아차렸을 것 아니냐?”

“다른 건 몰라도 크라운에 지분을 투자함으로써 우리 계획을 방해했고, 이유야 어쨌든 태천에너지로 천문학적인 거액을 챙겼습니다.”

“왜 대답이 없냐? 난 적인지 아군인지 물었다?”

유장풍의 눈빛이 더욱 가라앉는다.

“적인 것 같습니다.”

유장풍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유종태를 바라보았다.

부친의 시선이 무척 부담스러운 듯 유종태는 눈을 좌우로 돌렸다.

“장사꾼은 세상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눈다. 죽여야 할 적과 살려둬야 할 적이지. 아비의 말뜻을 이해하겠느냐?”

“조금은!”

“다시 묻겠다. 데이브 유는 죽여야 할 적이냐, 아니면 살려둬야 할 적이냐?”

적인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언질이다.

하지만 유종태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파르르!

유장풍의 눈썹이 파도처럼 출렁거렸고 아들 유종태는 식은땀을 흘렸다.

“적입니다!”

“그만 가보거라!”

유종태는 식은땀을 훔치며 인사를 하고 회장실을 나왔다.

주르륵!

한여름에 뙤약볕에서나 볼 수 있는 굵은 땀방울을 얼굴에 달고 나오자 비서실 장민혁 실장이 놀란 눈으로 본다.

곧바로 비서실을 빠져나온 유종태는 복도에 나와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크후후후!”

신음 같은 한숨이 조용한 복도에 울려 퍼진다.

잠시 닫힌 문을 바라보던 유종태는 걸음을 옮겨 화장실로 들어섰다.

촤아아!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양손으로 물을 떠서 얼굴을 씻었다.

퍼퍼퍼퍼!

소리 나게 얼굴을 연거푸 문지르며 씻었는데 들어오던 남자 직원 한 명이 인상을 찌푸렸다.

47층. 이곳은 회장실을 비롯해 비서실과 크고 작은 지원사무실로 이뤄져 있다.

태천 사옥에서도 가장 깊은 구중심처인 것이다.

특히 회장 유장풍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화장실을 사용할 때도 무척 조심스럽고 매너 있게 움직인다.

그런데 마치 지하철역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거친 세수 소리에 남자는 소변기를 향해 걸어가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어느 부서에 근무하십니까?”

뚝!

허리를 숙인 채 세수를 하던 유종태의 동작이 멎었다.

뚝뚝!

얼굴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천천히 허리를 세우며 고개를 돌렸다.

“사, 사장님!”

남자 직원은 기겁하며 허리를 숙였다.

“너무 시끄러웠죠. 미안합니다.”

“절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탁!

수도꼭지를 잠그고 핸드 타월을 몇 장 당겨 몇 번 접었다.

그리고 여자들 화장 두드리듯 얼굴의 물기를 닦아 냈다.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고 머릿속이 답답하지 뭡니까? 그래서 잠시 소란을 피웠는데 조심하죠.”

“사…… 사장님!”

유종태는 빙긋 웃어 보이며 화장실을 걸어 나갔다.

***

태천 사옥 옥상은 숲이다.

진짜 숲이다.

작은 산 하나를 옮겨다 놓은 듯 소나무에서부터 가이스카 향나무와 붉은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 한참 만개해 있는 동백, 그리고 우아한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 에메랄드 그린 나무가

빼곡하다.

그뿐 아니다. 작은 연못이 있고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잠시 도심을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 들게 조성해 놓았다.

직원들의 휴식 공간이다.

그러나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머리를 식히는 직원은 거의 없다.

일 분 일 초를 쪼개고,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직원들에게 이곳에서의 휴식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렇다고 전혀 이용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가뭄에 콩 나듯 한다.

유종태는 붉게 단장하고 있는 동백꽃을 보며 앉아 있었다.

툭!

투툭!

동백꽃이 떨어진다.

이상할 일이다.

한창 보기 좋게 피었는데 툭 하니 떨어져 버린다.

모든 꽃은 시들며 떨어지는데 지금 보는 동백은 가장 탐스러운데 떨어지고 있었다.

동백나무 아래에는 수십 송이 동백꽃이 누워 있다.

떠밀려서인가, 아니면 때를 알고 떨어지는 것인가.

떠밀려 떨어진다면 추할 일이지만 가장 왕성하게 피어날 때 떨어지는 것이 박수를 받는 일이라는 걸 아는 걸까.

욕심에 무덤을 파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흐흠!”

유종태는 떨어진 동백꽃을 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적(敵)이란 무엇인가.

적은 반드시 쓰러뜨려야 할 상대이다.

분명히 자신의 입으로 데이브 유는 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데이브 유가 적일 만큼 적대적 행동을 해서 그렇게 말한 건 아니다.

아버지의 기세에 떠밀려 마지못해 적이라고 한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입에서 적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강요하고 떠미는 듯했다.

두 명의 직원이 작은 소로에 나타났다.

많아야 서른 전후로 보였는데 손에 커피잔을 들고 있었으며 유종태를 보고서도 어떤 행동이 없는 걸 보아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다.

“잠깐!”

갑자기 유종태는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두 사람은 멈칫하더니 걸음을 세우고 유종태를 바라보았다.

“신입 사원인가 봅니다?”

“네! 작년에 들어왔으니 아직 채 일 년이 안 됐습니다만…….”

안경 낀 직원이 대답했다.

“한 가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갑자기 뭔가를 물어보겠다는 말에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분께서는 적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초면에 너무 생뚱맞은 질문이 아닌가 싶군요.”

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질문으로 덮치듯 파고드는 유종태를 빤히 바라보더니 안경 낀 직원이 말했다.

“적이라면 군대에서 말하는 적군 할 때 그 적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적은 때려죽일 상대를 적이라고 하지 않나? 군대에서 우리의 적은 누구였지?”

“북한군.”

“적은 살려두면 끊임없이 날 괴롭히고 학대할 대상 아니겠습니까? 한문으로 적(敵)이 원수 적자 아닌가?”

“맞아!”

안경을 쓰지 않은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직원은 길을 따라 걸어갔고 유종태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때려죽여야 할 상대.’

유종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의든 아니면 아버지가 강요했든 자기 입으로 적이라는 표현을 했었다.

지금 두 신입 사원의 논리대로라면 데이브 유는 죽여야 할 적인 것이다.

“으음!”

갑자기 숨이 턱 하니 막힌다.

한 번도 아버지의 자리를 편하게 넘겨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냥 줄 아버지도 절대 아니다.

자신의 입에서 적이라는 말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 또한 아버지가 뭘 바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모습이다.

유종태는 떨어지는 동백꽃을 뒤로 하고 오솔길로 사라졌다.

***

공기정화식물 남천의 잎사귀 뒤에 붙은 도청 장치를 살폈다.

피식!

한참 도청기를 살피던 유태수가 웃었다.

단청(斷聽)시켰다.

도청 기능을 수신하는 쪽에서 잘라 버린 것이다.

툭!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던 기계를 떼어내어 살핀다.

육안으로 뭔가를 간파하고 확인할 만한 건 보이지 않는다.

‘발각되었다는 걸 눈치챘군.’

그래서 그쪽에서 차단한 것이다.

딱!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 한 병을 꺼내 마개를 땄다.

벌컥벌컥!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서너 번 연거푸 마시던 유태수는 담배를 들고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확실히 밤공기가 부드러워진 것이 봄이 오고 있음이다.

말보로 레드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온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도청이 실패했다는 걸 인지한 지금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뿐이다.’

깊숙하게 빨아들이는 듯 담배 끝이 빨갛게 타올랐다.

- 태수야. 물러나면 더 손해라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학생복싱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미들급 준결승에 올랐다.

1, 2라운드에서는 모두 KO승이었고 준준결승에서는 판정으로 이겼다.

그런데 준결승 상대가 작년 대회 우승자인 기혁필이었다.

기혁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태수를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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