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78화 (78/122)

78화 보통 놈은 아니다(1)

“우리가 그동안 너무 데이브 유에게만 매달려 있었습니다.”

범인이라고 단정하기까지 하여 다른 사람이나 각도로 수사를 넓혀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차분하게 사건을 따라가 보자는 것이다.

제3팀장 오하수는 무거운 얼굴이다.

“데이브 유는 일단 제외하자.”

“제외하자는 건 아닙니다. 수사를 여러 방향으로 넓혀보자는 뜻입니다.”

오하수는 답답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정수기로 걸어가 종이컵에 냉수 한 컵을 받아 마셨다.

‘만약 데이브 유가 범인이라면…….’

냉수를 마시며 눈을 빛낸다.

솔직히 자신도 조금씩 데이브 유에게서 마음이 멀어지고 있었다.

범인은 항상 가까이 있다.

자신들과 지금 김평대 암살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데이브 유는 이라크에서부터 굉장히 지척의 거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몇 개월 전혀 낌새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놓아주기에는 뭔가 모르게 불안하다.

“좋아. 일단 수사 방향을 나누자고, 하나는 데이브 유, 다른 하나는 유족들 쪽을 훑지.”

“유족이라면?”

곽철종이 물었다.

“차만오와 이승수.”

곽철종이 맹사성을 돌아보았다.

그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의미였다.

피식!

갑자기 오하수가 웃는다.

맹사성을 바라보는 곽철종의 시선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하긴 남긴 유산도 없고 초라한 삶을 살다 간 그들을 위해 어느 친인척이 복수의 칼을 뽑아 든단 말인가.”

“차라리 제 생각엔.”

오하수가 곽철종을 바라본다.

“채무령 태천문화예술원 이사장을 한번 지켜보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요.”

흠칫!

채무령의 이름이 나오자 오하수의 눈이 긴장한다.

거물이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돈이 많고 정치권력의 정점인 청와대까지 흔들 수 있는 태천그룹의 안주인이다.

말이 안주인이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여자다.

“안 되겠죠?”

곽철종은 자기 입으로 말을 해놓고서도 자신 없는 얼굴이다.

“근거가 있나?”

“전혀 없습니다. 그냥 묘하게 끌립니다.”

“증거가 있어도 함부로 들이밀지 못할 상대를 단지 장례식에 나타났다는 것 하나로 털어보자는 게 말이 돼? 더욱이 우린 지금 그곳과 날을 세울 때가 아니라는 걸 몰라?”

“알겠습니다!”

곽철종이 웃는다.

장난삼아 그냥 던져 본 말은 절대 아니다.

정보원으로서 오랫동안 활동한 데서 오는 어떤 촉이다.

강력계 형사들만 야당으로 불리는 정보원을 끼고 있는 건 아니다.

정보기관원들도 사적 라인을 깔아 놓고 있다.

‘불씨는 아궁이가 아닌 길거리에서 만들어진다.’

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스파이 활동을 한 여자 마타하리가 한 말이다.

사건의 계획과 음모의 시발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관심 두지 않는 밑바닥에서 움튼다는 뜻이다.

국가 간에 벌어지는 전쟁도 의외로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꼬투리에서 시작된다.

즉 거리를 굴러다니는 소문이지만 잘 걸러내기만 한다면 뜻밖의 대어를 낚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프랑스 파리 테러, 미국의 9.11테러 모두 시장에서 상인으로 살아가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이 판을 벌였고 끝내는 엄청난 사건이 된 것이다.

위가 아닌 아래에서 사는 사람들만 잘 감시했어도 일어나지 않을 사건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 하는 일은 잘 되나?

며칠 전 유충식을 만났다.

고미술품 절도와 도굴에 관해 국내에서는 세 손가락에 꼽힐 만큼 출중한 재주를 지녔다.

몇 번 구속될 위기에 있는 그를 손을 써서 빼내주었고 그렇게 정보원으로서 인연을 맺었다.

인사동 뒷골목에서는 하루에도 수십억, 심지어 백억 대가 넘는 고가의 골동품들이 밀거래된다.

교과서에만 등장할 뿐 행적이 알려지지 않는 왕실의 물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양지 산업보다 음지 시장이 활성화된 곳이 인사동이다.

4년 전 고미술품 중개인 신분으로 일본에서 온 재일교포가 북한 지령을 받은 간첩으로 체포되는 와중에 유충식을 만났는데 그의 입에서 놀라운 얘기 한 토막이 흘러나왔다.

- 내가 가장 많이 거래한 손님이 채무령입니다.

채무령에게 국보급 도굴 문화재를 많이 넘겼다는 뜻이었다.

- 그럭저럭 됩니다.

일 잘되냐는 질문에 유충식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가 시큰둥한 건 근래에 큰 물건을 도굴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 이상한 말이 돕니다.

- 이상한 말?

- 태천문화예술원 채무령 이사장이 한국 항공편으로 해외에서 고가의 미술품을 무더기로 들여온다던데요.

- 세금 내고 들어오는데 무슨 상관이야.

피식!

유충식이 웃는다.

- 무슨 얼어 죽을 세금입니까? 한국항공 안방마님과 채무령이 대학 동창입니다.

- 하면 세관을 거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이군.

- 자기 회사 비행기로 실어와 비밀 창고로 이송해 버리면 누가 압니까?

그것이 그날 얘기의 전부였다.

채무령의 미술품에 대한 집착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국내 어떤 박물관도 태천문화예술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골동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신문에 보도된 건 빙산의 일각일 뿐 한국판 대영박물관이라는 말까지 나돈다.

그런데 또다시 해외에서 고가의 미술품을 들여온다고 했다.

그것도 한 점에 수백 수천억을 호가하는 고갱과 고흐, 프란시스코 고야, 렘브란트, 로댕의 조각 작품도 들어있다고 했다.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의 그림까지 떠돈다.

단지 확인되지 않는 소문이지만 말이다.

그런 급의 그림은 국내 골동품 가격과는 또 다른 차원의 천문학적인 거액이 들어간다.

문제는 거액을 주어도 거래가 안 된다는 것에서 더욱 가치가 빛나는 것들을 어떻게 들여오는 걸까.

아무튼 끼니는 굶어도 미술품 수집에는 목숨을 건다는 채무령이고 태천미술관 소장품의 절반이 국내외 장물이라는 말도 있다.

‘채무령.’

확실히 알 수 없는 안개 같은 여자가 느닷없이 얼굴도 모르는 이승수 어머니 장례식에 나타났으니 자꾸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

차라리 수학연구소다.

사방에 화이트보드가 걸려 있고 새까맣게 숫자들이 채워져 있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정점의 물리학에서나 볼 법한 공식들이다.

딸칵!

문이 열리고 설태왕이 들어섰다.

멈칫!

설태왕의 눈이 좁혀졌다.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를 오늘 처음 보는 건 아니다.

오래전부터 봐왔고 언젠가부터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제는 사방 벽에 틈이 없을 정도다.

마치 수백 명의 학생들을 앉혀 놓고 혹독한 수학 강의를 진행 중인 것 같은 분위기인데 유태수가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화이트보드를 살펴보고 있다.

“어서 오시죠.”

유태수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한참 지나고 나서야 고개를 돌린다.

오른손에 검정 매직펜을 들고 있는데 손에 잉크들이 묻어 지저분했다.

“상대성 이론만큼이나 굵직한 것 하나 발표되는 것입니까?”

결코 비아냥이 아니다.

워낙 진지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지금 유태수는 수학 공식을 이용한 주식투자 기법에 빠져 있다.

주식투자에 수학 공식이 응용된 건 아주 오래된 일이다.

새로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헤지펀드 매니저들이 이구동성으로 분명하게 짚는 한 마디가 있다.

‘투자는 수학이다.’

사람이 했던 일을 지금은 수많은 자료가 축적된 컴퓨터가 분석 정리하여 예측하는 결과를 내놓지만 최종 결정은 인간의 두뇌 몫이다.

즉 수학을 알지 못하면 컴퓨터가 내놓은 예측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투자와 수학은 불가분의 관계이고 경제이면서도 물리학이 승부를 결하는 세계인 것이다.

‘으음.’

설태왕의 이마가 찌푸려진다.

이해가 되는 공식들이다.

자신은 익히 알고 있다.

팟!

다시 한번 훑어보던 설태왕이 놀란다.

처음 걸린 1번 화이트보드와 맨 마지막의 18번째 걸린 화이트보드의 공식이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건 의문을 가졌던 문제를 풀었다는 뜻이다.

주주들은 언론을 통한 뉴스나 그 회사의 투자 방향을 살피며 주식을 사고판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가격이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여 손해를 보고 이윤을 남긴다.

이런 특성과 현상을 물리학에서 말하는 비선형 동역학 시스템 혹은 카오스 이론이 다루고 있는 세계와 아주 흡사하다.

주식시장은 많은 변수들이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혼돈 시스템이다.

하지만 그 혼돈 속에서 묘한 질서가 만들어진다.

이 질서를 예측하고 읽어 내는 데 물리학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것이고 지금 유태수는 자신을 가상의 주식시장에 던져 그 시스템들을 이용해 어느 정도 답을 찾아낸 것이다.

“데이브!”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마주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해합니까?”

유태수가 질문을 던진 설태왕을 바라보더니 빙긋 웃었다.

“글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수익률을 내는 시스템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공식이 있죠. 문제는 그 공식이 너무 고도의 학문이고 평범한 지능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지만.”

유태수는 잔을 비우더니 자기 손으로 따른다.

“세계적인 펀드 매니저 중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거의 다가 수학을 가르치거나 배운 전공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바닥에서는 경제물리학이라는 특정

분야가 있죠?”

“경제물리학?”

“이코노피식스(Econophysics), 어려운 것 없죠. 경제학의 주제를 물리학으로 풀어내는 방법입니다.”

“재밌는 말이군.”

“그렇죠. 흥미로운 일 아닙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는 경제에 관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엉뚱한 물리학자들을 쓸어 모은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놀라운 건 다름 아닌 미스터

데이브입니다.”

유태수가 술잔을 들려다 고개를 들어 본다.

“내가 왜?”

“과거 인디언 추장들에게는 칼을 던져 상대의 눈알을 명중시키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배울 수 없고 오직 추장으로 선출된 사람만 그 기술을 터득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추장의 절대 권위를 증명하고 보이는 힘인 것이었다.

그런데 추장도 아니면서 추장이 던지는 기술을 그대로 따라 해버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시늉만 내는 것이 아니라 추장보다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표적을 맞혔다.

칼 던지는 비법을 배우지도 않고 알아버리는 그들을 신령한 존재 와칸탕카로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전쟁에서 가장 앞서 싸웠고 놀라운 용맹을 떨쳐 보였다.

“내가 와칸탕카란 말이오?”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고 하지만 가까운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죠.”

“내게 놀라운 투자가의 감각이 있다는 것이로군.”

유태수는 소주잔을 들어 비운다.

“이건 진심입니다. 흔히 힘센 사람 앞에서 약자가 떠드는 아첨이 아니고.”

뚝!

반쯤 비우던 소주잔이 멈춘다.

그리고 다시 마신 뒤 잔을 내린 유태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난 잘 모르겠소. 분명한 사실 하나는 투자에 대한 수학적 공부가 재미가 있다는 것인데.”

유태수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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