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누구지(2)
혹자는 무궁화급도 아닌 일반 잎사귀 계급에서 무슨 상관의 영향이 있겠냐고 묻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쫄따구 세계가 더 군기가 센 법이다.
“에이!”
배달부는 기분 나쁘다는 듯 투덜거리며 문을 닫고 사라졌다.
송만술은 놀라지 않았다.
경찰서 옆 골목에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는데 박소봉이 칼을 무릎뼈 사이에 박아도 입을 열지 않더라는 말에 미지근하다.
딸칵!
유태수는 담배를 피워 불을 붙인 후 유리를 내렸다.
부우웅!
시동이 걸리고 승용차가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송 과장!”
유태수는 담배를 길게 빨아들였다.
“말해요.”
홱!
운전하던 송만술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본데 뭘 그렇게 주저하십니까? 우리 송 과장이 용기 없는 사람은 아닌데.”
유태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딸칵딸칵!
송만술은 갑자기 깜빡이를 켜더니 차를 길가에 세웠다.
차를 세운 송만술은 굳은 표정으로 가만 앉아 있더니 왼손으로 유리를 내렸다.
딸칵!
그러더니 자신도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후우!
완전히 내린 창밖으로 담배 연기를 뱉는다.
“배석대 씨죠?”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조수석의 유태수를 바라보았다.
“배석대 씨와 오랫동안 생활하지는 않았지만 워낙 인상이 강렬한 친구여서 말입니다. 배석대 씨는 4년 동안 얼굴 부딪치면서 생활했던 대학 동창들보다 내 머릿속에 깊고 강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얼굴은 다르지만 배석대라는 것을 충분히 의심한다는 뜻이다.
“배석대라!”
유태수가 말끝을 흐렸다.
“나쁜 쪽입니까, 아니면 좋은 방향입니까?”
송만술이 배석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위험한 친구죠.”
유태수가 고개를 돌렸는데 눈이 빛난다.
“얼핏 보면 나쁜 면이 많아 보이는데 곰곰이 생각하면 불법을 저지르는 건 아니거든요.”
“거친 친구였군.”
“차가웠죠. 굉장히 차가웠습니다. 가끔 이라크 사막 너머로 지는 석양을 바라볼 때의 눈빛은 붉은 증오에 담긴 듯 보이기도 했고.”
“역시 송 형이군. 아니, 우리 말 놓기로 했으니 만술이 넌 다르다. 맞아. 난 배석대야.”
“허억!”
잠시 창밖으로 담뱃재를 털기 위해 고개를 돌렸던 송만술이 기겁하며 돌아보았다.
어느새 배석대의 얼굴이다.
조금 전까지 앉아 있었던 데이브 유의 얼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 석대!”
“4978 주정차 금지 구역입니다.”
경찰차가 지나가며 떠들었다.
“일단 가자!”
송만술은 다시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켰다.
유태수는 그간에 있었던 자신의 변화에 대해 말해 주었다.
물론 뺄 건 빼고 말했다.
무릎뼈 사이에 칼을 박아 넣었는데도 말을 하지 않는다.
비록 짧은 시간에 쫓기느라 제대로 고통을 주지 못하긴 했지만 결코 평범한 일로 넘길 수는 없는 문제였다.
박소봉은 아프다며 비명을 질렀고 온몸을 떨긴 했으나 항복은 아니었다.
눈동자를 보면 안다.
박소봉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비밀을 지키려는 이유는 뭘까.
답은 간단히 추려 낼 수 있다.
돈이다.
자신이 죽어도 남은 가족들이 평생 돈 걱정하지 않고 살 만큼 누군가에게 거액을 받기로 했다면 그런 눈빛이 가능하다.
죽음 앞에 그토록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한 이는 아직 보지 못했다.
성전(聖戰)이라 부르며 온몸에 폭탄을 두르고 뛰어드는 이슬람 테러 조직원들도 그 정도는 아니다.
일말의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는데 박소봉은 아니다.
독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미국 대사관 서기관이자 화이트 요원이기도 한 브룩스가 병실로 들어섰다.
사고 이후 통화는 몇 차례 했지만 직접 대면은 오늘이 처음이다.
브룩스는 침대 위에 환자복 차림으로 앉아 있는 유태수를 스윽 훑어보더니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생수 한 병을 꺼내 마개를 따고 물을 마셨다.
“건강해 보입니다.”
정말이다.
뉴스에 나올 만큼 큰 교통사고였다.
밤새워 긴급 수술을 받았고 그야말로 천운이라 할 만큼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지금은 거의 완벽해 보인다.
확실히 신비한 인물이다.
배석대에 대해 나름 많이 알아보았지만 희한하게도 정보가 무척 제한적이었다.
어느 선까지 추적해 올라가다 뭔가 나올 듯싶다 할 때면 어김없이 끊어진다.
잘 달리던 길이 뚝 잘려 버리듯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가 더 이상 접근해서는 안 될 부분까지 다가오면 훼방을 놓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특히 가족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다.
“그 사람에 대해서 좀 알아봐 주시죠.”
브룩스에게 핸드폰으로 찍어온 박소봉의 얼굴을 보낸다.
브룩스는 핸드폰 속의 박소봉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관광차 기사요.”
브룩스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벌컹!
그때 노크도 없이 병실 문이 열렸다.
브룩스는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허름한 점퍼 차림의 대머리가 들어서자 유태수의 눈이 번쩍 피었다가 사라졌다.
“당신 뭐요?”
잔뜩 이마를 찡그리고 묻는다.
“아, 미안합니다. 급히 오느라 노크를 한다는 걸 깜빡했군요. 난 백도태 형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중국집 배달부로 위장해 들어가면서 한 번 보았다.
송만술로부터 어느 정도 정보도 얻었다.
다만 인상을 깊게 찌푸린 건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깜빡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노크를 하지 않고 들어왔다.
흠칫!
건장한 체구의 백인이 서 있자 백도태가 움찔했다.
자신이 그려본 상황과 전혀 맞지 않았다.
깜빡한 척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데이브 유는 뭔가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뭔가를 잡아야 한다.
물론 데이브 유는 피해자다.
하지만 칼을 맞았다는 것에서 이번 사건이 단순하지 않다는 걸 직감하고 치밀하게 쫓고 있다.
가해자 쪽에서는 어떤 단서도 나오지 않고 있으므로 피해자 주변을 훑어 뭔가 실마리를 잡아 보려는 것이다.
“미 대사관 브룩스 서기관이오. 브룩스, 인사하시오.”
유태수는 일부러 브룩스의 직함을 말하며 인사를 시켰다.
사업가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며 본 것이 하나 있다.
그건 한국 사람은 유난히 미국인에게 약하다는 것이다.
특히 관공서 사람들은 평범한 미국인에게도 허리를 구부리고 함부로 어찌하지 못하는 걸 낯 뜨거운 눈으로 숱하게 봐왔다.
같은 외국인이라도 미국이 아닌 타 국가 사람들에게는 당당하다.
- 사대주의 근성이다.
아버지는 조롱하듯 말했다.
하지만 유태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 근대사에 미국이 끼친 영향은 클 수밖에 없고 지금도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없으나 강자에게 친할 수밖에 없는 건 약자의 숙명이다.
누군들 큰소리치고 싶지 않겠는가.
어쨌든 오랜 세월 간섭 아닌 간섭을 받다 보니 우리도 모르게 미국인에 대한 거리낌이 생긴 건 사실이다.
“어이고!”
백도태 형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 대사관 서기관이라는 말에 허리가 휘어졌다.
한국 정부에 아무리 수사 중인 경찰관이라고 해도 그렇지, 타인의 병실에 노크도 없이 들어올 수가 있느냐고 항의라도 한다면 끝장이다.
“미안합니다. 다음에 다시 방문하죠.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브룩스를 향해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고 돌아가려는 백도태를 유태수가 불러 세웠다.
“브룩스 서기관님은 돌아가십니다. 이왕 오셨으니 용무를 보셔야죠.”
“그럼 다음에 또 뵙죠.”
브룩스는 평소와 달리 한국식으로 유태수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돌아섰다.
그 모습을 발견한 백도태의 눈이 커진다.
미국 대사관 서기관이 데이브 유에게 허리를 굽힐 정도면 자신이 입수하지 못한 또 다른 뭔가가 있다.
데이브 유는 용병 출신이고 지금은 데브그루 투자회사 이사로 근무 중이다.
민간 기업의 임원에게 대사관 서기관이 무슨 용무가 있어 직접 병실로 찾아왔을까.
초면이든 구면이든 가리지 않고 일단 의심하고 보는 백도태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풍부한 강력계 형사의 경험으로도 관계를 추정할 수가 없다.
“앉으세요!”
백도태가 의자 한 개를 자기 쪽으로 끌어다 앉는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특실이군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보기만 했지 처음입니다.”
냉장고를 포함한 깔끔한 싱크대와 시설물들의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루 입원비가 얼맙니까? 비쌀 텐데? 의료보험은 당연히 안 될 테고.”
그때 간호사 권희수가 문을 열고 카트를 밀고 들어섰다.
“아! 간호사님. 여기 하루 입원비가 얼마죠?”
생뚱한 질문이라는 듯 권희수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유태수를 바라본다.
대답해줘도 되느냐고 묻는 것이다.
유태수가 약간 미소를 짓자 권희수는 말해 주었다.
“사십팔만 원이죠.”
“사만 팔천 원이 아니고?”
백도태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차착!
권희수는 숙련된 동작으로 팔에 커프를 감더니 압력 펌프를 눌렀다.
팔이 조이고 본체를 보더니 커프를 풀었다.
“120, 88. 좋아요.”
그리고 커트 위에 올려진 약봉지 한 개를 들어 놓는다.
“식사 후 드세요.”
권희수는 드르륵 카트를 밀며 병실을 나갔다.
백도태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사십팔만 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 백도태를 보며 유태수는 속으로 웃었다.
‘능구렁이라더니.’
송만술이 조심하라고 했다.
백도태는 일부러 놀란 척하며 질문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죄가 있든 없든 이쪽이 초조해지고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
고도의 심리전이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걸 백도태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평생소원인 경위 계급으로 정년을 맞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 전혀 알지 못하는 얼굴이다.
“칼 맞았다는 얘긴 들었을 테고?”
유태수는 빙긋 웃었다.
“이번 교통사고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말은 단순 교통사고는 아닐 것 같다는 뜻이죠.”
“난 모릅니다. 경찰이 수사를 하면 드러나겠죠.”
“돈이 많더군요?”
“글쎄,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 같은 월급쟁이에게는 많을지 모르지만 재벌들에 비하면 좆도 아니다?”
백도태의 좆도 아니라는 말에 유태수가 눈을 빛냈다.
“비위에 거슬렸나?”
“아닙니다. 백 경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18평 아파트에 사는 인간들에게는 좆이 터지게 부자겠지만 태천그룹 총수에 비교한다면 좆도 아니죠 뭐.”
그러면서 씨익 웃는다.
“강남 가면 내 좆은 좆도 아닙니다.”
자신이 시작은 했다.
그런데 유태수는 말끝마다 좆좆좆이다.
좆은 곧 돈을 의미했다.
그러나 백도태는 유태수의 말속에 다른 뭔가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말속에는 차가운 비아냥을 감지한 것이다.
좆을 빙자해 자신에게 뭔가 전달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 좆 말이오. 혹시 수사하려면 똑바로 하라는 뜻 아니오? 진짜 좆같이 하지 말고.”
유태수가 히죽 웃는다.
미소는 대답 대신이다.
즉 자신의 짐작이 맞는다는 뜻이다.
수사 똑바로 하라는 건 뭘까.
혹시 경찰의 힘으로는 자신을 죽이려는 배후세력을 결코 단죄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피해자가 가해자의 정체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