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84화 (84/122)

84화 아침저녁으로(1)

이마를 찌푸렸다.

“음!”

뭔가 자꾸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병실에 들어오고부터 지금까지 몇 번을 살펴도 뭔가 짐작한다거나 자신에게 숨기고 있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팟!

바로 그때 갑자기 백도태 경사의 눈이 섬광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였지.’

분명 봤다.

백도태는 눈을 깜빡거렸다.

자신이 지금 뭔가를 잘못 보고 있나 싶어 손등으로 눈까지 비비며 다시 바라보았다.

유태수는 처음 그대로 침대에 앉아 있다.

그런데 조금 전 순간적으로 유태수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렸다.

흔들거리며 열기가 타오르듯 흐느적거린 것이다.

착시는 절대 아니다.

곧 사라질 듯 흔들거렸었다.

“관광버스 운전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사망자 유족들과 거의 합의가 이뤄져서 내일쯤 풀려날 것 같소.”

형사 합의가 이뤄졌다는 뜻이다.

“내 몸에 칼을 박은 자들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습니까?”

“경황이 없어 자신은 모른다고 하더군요. 하긴 고가의 벤츠를 타고 올라가 버렸으니 정신이 온전할 리 없지. 더욱이 관광차가 도로를 가로막아 버려 반대편에서 누군가 접근하여 칼을

휘둘렀다면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겠지. 안 그렇소?”

“기사 말을 믿는단 뜻입니까?”

“안 믿지.”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다?”

“난 한 패거리로 봅니다. 찌른 놈들과 기사 놈 모두.”

백도태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몸조심해야 할 것 같소. 관광차 기사와 놈들이 한 패거리라면 데이브 유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고 다시 올 수도 있지 않겠소?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죽을 놈은 죽습니다.”

“팔자소관이다. 젊은 사람이 무척 낙천적이군요.”

백도태는 다시 한번 병실을 둘러보더니 돌아섰다.

“시간 내주어 고맙소. 아 참!”

문손잡이를 잡다 말고 돌아섰다.

“조금 전 십팔 평 아파트에 사는 인간들에게는 좆이 터지게 부자겠지만이라고 했는데 면전에서 그토록 뜨거운 칭찬을 받아보긴 처음이오.”

자신이 십팔 평 아파트에 산다.

백도태는 그 십팔 평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탁!

문이 닫히고 사라지고 유태수가 중얼거렸다.

‘역시 눈치 백 단이라는 말이 사실이군.’

유태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었을 때 송만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조금 전 박소봉이 담당 변호사와 같이 나왔어.”

“오케이!”

유태수는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사내가 아니다.

상당한 기간 밀고 당기는 씨름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딸칵!

문이 열리면서 권희수가 약품을 실은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주사예요.”

소매를 걷어 올리자 차갑게 말했다.

“엉덩이에요.”

유태수는 잠시 권희수를 바라보다 하는 수 없다는 듯 돌아서서 바지를 조금 내렸다.

딱!

주사기를 꽂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어제 처음 보는 남자 둘과 원무과장이 만났다고 합니다.”

쏙!

주사기 바늘을 빼고 소독솜을 부위에 대고 문지른다.

“일 분 정도 문질러 주세요.”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카트를 밀고 사라졌다.

‘이리 왔다 저리 갔다, 갈대도 그런 갈대가 없어요.’

원무과장의 인간성에 대해 묻자 권희수는 조석으로 처세가 돌변한다고 했다.

그건 믿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필요에 의해 손을 잡고 일을 추진할 수는 있지만 완전한 신뢰는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부르는 성향이라는 걸 파악했다.

다행히도 권희수의 후배가 원무과에 근무하는데 그를 통해 전동칠 원무과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수시로 연락받는다.

‘처음 보는 남자들.’

원무과장이니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입·퇴원으로 인해 만나는 환자의 보호자들을 이상한 남자로 볼 직원은 없을 것이다.

‘두 명의 남자.’

유태수는 중얼거렸다.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특실이므로 안에서 몰래 피운다고 하여 누가 뭐라 그럴 리는 없겠지만 유태수는 말보로 레드를 환자복 상의 주머니에 라이터와 같이 넣었다.

배덕용이 작명까지 하여 보내준 대나무 죽포자(竹包刺).

직역하면 포위하고 찌르는 대나무 정도 되겠다.

복도로 나온 유태수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으응!

잠깐 사이에 엘리베이터는 12층 옥상에 멈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두 개의 유리문을 통과하자 옥상이 나타났다.

흡연실이다.

모래를 담은 화분형 재떨이 세 개가 옥상 귀퉁이에 놓였고 희미한 가로등이 켜진 가운데 다섯 명의 환자복 차림의 사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서 피우는 환자도 있고, 목발을 짚고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언제봐도 담배는 인간의 육정(六情)을 초월한다.

(육정, 희(喜), 로(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여섯 가지의 감정)

코헨이 떠오른다.

- 폐암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군.

코헨은 애연가다.

하루에 네 갑씩 담배를 피우는데 하루는 장난삼아 조금 줄이는 것이 어떠냐 흡연이 폐암의 첫째 원인이라고 들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 죽을 놈은 언제라도 뒈지지. 난 담배 끊었다고 백 살 채우는 놈 못 봤어. 그럴 바에는 이 가인(佳人)과 같은 담배를 피우면서 살다 떠나는 것이 폼 나는 것 아니겠나.

흡연에 대해서만큼은 확고한 생각을 지녔다.

어떤 의사도 그의 앞에서 담배 끊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네이비 씰 시절 부상으로 입원했는데 군의관이 골초인 그를 향해 흡연 자제를 요청했다.

건강을 망치기만 하는 한마디로 백해무익한 것이 담배라는 것이었다.

- 담배를 모욕하는 발언은 삼가시길.

얼마나 살벌하게 노려봤으면 군의관이 움찔 놀랐다고 한다.

딸칵!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유태수는 한쪽 목발을 짚고 있는 사내와 왼손에 깁스를 한 두 환자들과 같은 재떨이 앞에 섰다.

후우우!

말보로 레드 특유의 푸른색 연기가 어둠 속으로 흩어진다.

“그거 독하지 않습니까?”

같이 담배를 피우는 두 환자 중 왼손에 깁스를 한 사내가 물었다.

“글쎄, 남들은 그렇게 말하는데 난 잘 모르겠던데요.”

“레드가 독하다고 하더라고. 하나 빌려 볼 수 있을까요.”

“그러세요!”

유태수는 왼쪽 상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담배를 꺼냈다.

스윽!

담뱃갑을 퉁기듯 반동을 주며 움직여 한 개비가 앞으로 나오도록 했다.

사내는 유태수가 내민 말보로 레드를 뽑기 위해 깁스하지 않은 오른손을 뻗었다.

사내는 피우던 담배를 이미 모래에 꽂아 껐다.

휘익!

유태수가 사내에게 담배를 권하는 바로 그때 왼쪽에서 목발 하나를 집고 있던 사내가 느닷없이 후려친다.

담배는 깁스 사내에게 권하는데 목발의 사내가 달려든다.

누구도 예상 못한 기습이고 변칙적인 공격이다.

담배를 권하며 시선을 끌고 목발이 친다.

퍼억!

하지만 사내의 목발은 딱딱한 옥상 바닥을 찍었다.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쏵!

유태수의 왼손에 쥐고 있던 대나무 칼이 번쩍하더니 얼굴에서 피가 튀었다.

목발이 떨어지는 순간 뒤로 물러나며 약간 숙인 사내의 얼굴을 칼로 그어 버린 것이다.

큭!

사내는 본능적으로 목발을 쥔 오른손으로 뺨을 감싼다.

주르륵!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린다.

상처가 깊다.

씨익!

유태수가 미소를 지었다.

툭!

그때 담배를 받으려 했던 사내가 왼손 깁스를 뚝 빼내 바닥에 버렸다.

쉭!

그리고 환자복 속에서 사시미 칼을 꺼내 들었다.

“그럼 그렇지!”

담배를 받으려 했던 사내의 손에 빛나는 사시미 칼이 들려 있다.

파랗게 빛나는 두 자루의 회칼.

“오늘 회를 쳐주마!”

뺨에 상처를 입은 사내의 칼이 유태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앞뒤 안 가리는 정면공격.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모습이었다.

“개새끼!”

쏴쏴쏴!

방어는 염두에 두지 않는 공격일변도(攻擊一邊刀).

스윽!

미들급 복서였으나 스피드만큼은 경량급보다 빠르다는 극찬을 들었다.

복싱뿐만이 아니라 모든 격투기에서 공격의 위력은 발에서 나온다.

탄탄한 하체가 받치고 빠른 하체가 더해지면 그 파괴력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칼이 오기 전에 이미 두 걸음을 물러나 사정권에서 벗어났다.

사내의 칼은 더 이상 닿지 않을 만큼 최대치로 뻗었다.

사사삭!

복싱에서 상대가 파고들면 물러나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잽으로 견제를 하며 물러나느냐, 아니면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 주먹의 사정권을 벗어나느냐는 선수의 몫이다.

문제는 들어갔다가 유효타를 때리지 못하면 역습을 당한다는 것이다.

뒤로 물러난 유태수는 복부 높이로 들어온 사내의 손목을 보며 들고 있는 칼 죽포자를 힘껏 내리쳤다.

딱!

마치 나무 막대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톡!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시미 칼을 쥔 사내의 왼 손목이 잘려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어어어!”

사내는 아파서 질러내는 비명도 아닌 괴상한 소리를 토하듯 냈다.

아픔보다는 충격이 큰 탓이리라.

- 전쟁에서는 숨이 붙어 있는 한 방아쇠를 당겨야 하지. 그게 죽는 길이고 또한 사는 길이야.

네이비 씰 출신 코헨의 정신 속에 박힌 철학이다.

적은 절대 내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죽는 것도 실력이다.

포로로 잡히면 온갖 고문을 당하므로 마지막까지 방아쇠를 당겨 적의 총에 죽는 길을 선택한다.

죽고자 하면 산다.

감정의 사치다.

숨이 붙어 있는 한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는 전장의 생존방식, 즉 위기에 빠질수록 더욱 공격해야 한다는 걸 사내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손목이 잘렸다는 것에 너무도 충격을 받아 잠시 멍해졌다.

손목을 자른 상대 정도 되면 자비심은 결코 갖고 있지 않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너 죽고 나 죽자고 달려들어야 하는데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다.

푸푸푹!

충격으로 잠시 멈춘 순간 유태수의 칼은 다시 번쩍거렸다.

공격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크음!”

사내의 옆구리에 연거푸 세 개의 구멍이 더 만들어졌다.

“으으으!”

사내는 주춤하며 거대한 모래를 담은 재떨이 통에 등을 기댄다.

“으아악!”

또 하나의 비명 소리가 터진다.

측면에서 파고드는 담배를 청했던 사내가 내지른 것이다.

전광석화.

뒤로 물러서며 측면으로 길게 벤 칼에 허벅지를 맞더니 그대로 주저앉는다.

쿵!

사내는 일어서지 못했다.

잠시 사내를 바라보던 유태수가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빛에 손목이 잘린 사내의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었다.

학학학!

거친 숨을 몰아쉰다.

유태수의 칼 솜씨가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뒷골목 칼잡이 솜씨가 아니다.

마치 무협영화 속에 나오는 체계적이고 기초부터 탄탄히 배운 검객의 칼을 보는 듯했다.

싸아악!유태수가 온다.

분명히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는 미친 듯 칼을 휘둘렀다.

사사사삭!

거미줄을 치듯 어떤 칼도 들어올 수 없을 만큼 휘둘렀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눈을 떠야 한다.

복서는 맞으면서도 눈을 뜬다.

눈을 뜨면 날 때린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볼 수 있고 그래야 한 방이라도 때린다.

야구의 타자도 그렇다.

투수의 볼이 빠르다고 냅다 휘둘러 버리면 죽어도 맞지 않는다.

설혹 내 시선이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빠를지라도 볼 수 있는 것까지는 보며 휘둘러야 한다.

안 보고 휘두르는 것과 보고 휘두르는 것의 차이다.

지금 사내의 칼이 그러했다.

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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