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아침저녁으로(2)
무자비하게 휘둘렀으니 칼의 장막(刀幕)이 생겨 들어올 수는 없다.
자신이 휘두른 칼에 걸려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고수가 너무 많다.
또한 생각은 생각으로 끝난 경우가 허다하다.
푸우욱!
오른쪽 어깨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 한 방으로 싸움은 정리됐다.
오른팔 어깨에 칼을 맞았으니 오른손은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다.
이를 악물고 오른손을 움직여 보려고 했으나 끄떡도 않고 오히려 쥐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투툭!
스윽!
유태수는 죽포자에 묻은 피를 자신의 바지에 닦았다.
“누구십니까? 승용차 안에 처박힌 내게 칼질을 한 사람이?”
움찔!
칼을 떨어뜨린 사내가 놀란다.
유태수는 씨익 웃었다.
“군대나 민간이나 위에서 까라면 깔 수밖에 없죠. 칼솜씨가 상당한 것이 열심히 직장 다니는 사람 같지는 않고?”
처억!
한 발자국 다가가자 사내는 뒤로 물러났다.
“비밀은 지켜 드리죠. 최대한 당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해드린다는 얘깁니다.”
“어떻게?”
유태수의 표정은 자신들이 자객이 되어 접근해 올 줄 알았던 표정이다.
“별것도 아닌데 뭘.”
“우욱!”
아픈 모양이다.
하지만 유태수는 단순한 신음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건 마치 입을 열 마음이 있다는 메시지로 느껴진다.
뭔가 제안을 해야 나도 입을 열 것이 아니냐는 뜻으로 해석한 유태수는 부드럽게 말했다.
“신분 세탁을 해주죠.”
피식!
사내가 웃었다.
지금 장난하냐는 투다.
한국에서 무슨 신분 세탁이란 말인가.
“못 믿으면 하는 수 없고.”
처억!
유태수가 다가갔다.
사내는 다가간 만큼 물러난다.
다가가고 물러나며 둘은 어느새 옥상 끝에까지 이동했다.
1미터 높이의 알루미늄 난간이 있다,
“난 거짓말 하지 않는데.”
유태수는 다시 한번 자신의 진실됨을 강조했다.
“그들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상대들이지. 당신이 대통령이나 된다면 믿겠지만.”
사내는 개소리 말라는 듯 웃기까지 한다.
“원하면 외국으로 보내줄 수도 있소.”
“날 좆으로 보는군.”
나더러 그 말을 믿으란 말이냐며 화난 표정이다.
자신을 달래려 하는 수법이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즉 믿을 수 있는 말을 해야지, 외국으로 보내주니 신분 세탁을 하니 하는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말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나와는 거래를 할 수가 없다?”
“죽이는 것이 빠를지도.”
씨익!
유태수가 웃었다.
“진심을 몰라주는 것처럼 서글픈 일도 없다고 우리 아버지가 그랬는데.”
푸우욱!
망설임 없이 칼이 박혔다.
크후훅!
사내의 눈이 커졌다.
칼은 정확히 자신의 명치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내 진심을 몰라주니 무척 섭섭하군요.”
화악!
버티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그대로 사내를 밀쳐 난간 너머로 떨어뜨려 버렸다.
12층 옥상에서 1층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딸칵!
유태수는 담배를 피워 문다.
잠시 서서 현란한 네온사인에 뒤덮인 서울의 하늘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돌아섰다.
흠칫!
남은 사내가 소스라친다.
담배를 청했던 사내다.
유태수의 칼에 허벅지를 맞아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단단히 칼을 쥐고 있었지만 공격의 의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사내는 질려 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사람을 옥상 아래로 밀어버린다.
쉬운 일이 절대 아니다.
사람을 죽인다는 건 엄청난 사건이고 몇 번을 고민해도 쉽게 행동으로 나설 수 없는 대형사건이다.
칼을 부지기수로 휘둘렀으나 아직까지 단 한 명도 죽여본 적은 없다.
물론 부상을 입히고 심지어 영원히 장애가 남을 만큼 깊이 칼을 준 상대도 있다.
스윽!
쭈그리고 앉은 유태수가 물고 있는 담배를 건네주었다.
흠칫!
사내가 놀란다.
어서 받으라는 듯 계속 들고 있자 사내는 떨리는 왼손으로 담배를 받아 물었다.
“옥상에서 떨어져 봤습니까?”
하마터면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자신도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옥상에서 던지겠다는 뜻이다.
“여긴 병원입니다. 아직 당신 다리를 고칠 기회가 남았다는 것이죠.”
다리 상처가 깊다.
웬만하면 움직여 보겠는데, 살짝만 힘을 줘도 뜨거운 불덩이가 지지는 듯 아프다.
“협조하겠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다.
지금으로서는 유태수의 뜻을 따르는 것만이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
탁!
유태수는 사내의 어깨를 토닥이며 일어섰다.
다리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런데 병원이 조용하다.
남선도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본 정장의 남자가 옆에 서 있다.
송만술이다.
“수술 부위가 비행기를 탈 정도만 되면 곧장 미국으로 떠납니다. 당신의 여권과 비자 모두 이미 준비되어 있죠.”
“옥상 추락?”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이다.
“염려 마십시오. 지금쯤 가족에게 시신이 인도되었을 것이고 아마 장례 준비로 바쁠 것입니다.”
“장례 준비?”
“돌아가셨으니 장례식을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례식을 왜 모르겠는가.
사람이 죽으면 당연히 사흘 동안 살아생전 교류했던 지인들과 가족 친지들의 애도를 받는다.
하지만 죽은 채석교는 옥상에서 떨어졌다.
경찰이 수사에 나서고 지금쯤 수사관들이 자신의 병실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도대체 이 조용한 분위기는 무엇인가.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지구상에서 몇 명 안 되는 행운아 중 한 명이라는 것이죠.”
꾸울꺽!
여전히 정리가 안 된다.
‘도대체가.’
여전히 상황을 이해 못하겠다는 듯한 시선에 송만술이 웃는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그분은 우리와 다릅니다. 마음만 먹으면 이보다 더 큰 일도 흔적 없이 처리할 수 있는 능력자죠.”
“능력자.”
“미혼이시고 여동생이 한 명 있던데 원하시면 같이 미국 비행기에 태워 드리겠다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하나 있는 여동생은 조그만 중소기업에 다니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잔소리꾼이다.
세 살 차인데 어머니처럼 군다.
원룸에서 살고 있는데 주말이면 찾아와 방 안 꼴이 이게 뭐냐.
왜 이렇게 밥통이 깨끗하냐.
편의점 밥 그것 아무리 먹어 봤자 살로 안 간다.
라면은 간식으로 먹는 거지 주식이 아니다.
때마다 김치며 밑반찬 거리를 만들어다 놓고 돌아가며 빼놓지 않는 잔소리가 때로는 짜증 날 때도 있지만 언제부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화하기 시작했다.
쌀을 씻어 밥을 손수 해 먹고, 냉장고에 쌓인 반찬을 맛있게 먹어주자 여동생은 무척 행복하다고 했다.
“부탁합시다.”
그들이 결코 여동생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
장례식장을 들어선 사내들의 눈이 커졌다.
특실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앞 복도로 삼십여 개의 조화가 일렬로 서 있었는데 상당수가 사회적으로 이름이 있는 사람들이 보냈다.
「서울대 경제학과 김명흉 교수」
「성형외과 전문의 박사 최만종」
「주한 미국대사 스티브」
흠칫!
주한미국 대사 스티브 조화 앞에서 사내들 모두가 놀란다.
“야! 조회해봐.”
가운데 작달막한 체구의 사내가 말했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구분이 안 될 만큼 작고 가느다란 눈에 눈썹이 듬성듬성 심어 놓은 듯 몇 올 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얄팍한 입술은 차갑고 냉혹한 인상을 풍기는데 핸드폰으로 검색하던 사내가 대답했다.
“진짭니다.”
그러면서 검색한 핸드폰을 건네준다.
「주한 미국대사 스티브」
자신들도 가끔 가공의 조화를 많이 세운다.
자신들의 사회적 세를 과시하려는 목적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 이곳 조화들도 그런 목적으로 세워진 가공의 것들 아닌가 싶어 검색했는데 진짜라고 했다.
“보냈는지도 확인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미국 대사관인데 영어만 쓰는 건 아니겠지.”
“미국 여행가거나 볼일 보러 가는 한국인이 많은데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사내는 미국 대사관 전화번호를 119를 통해 알아내고 전화를 걸었다.
“미국 대사관이죠. 혹시 스티브 대사님 이름으로 조화 보낸 적 있습니까?”
“네. 있어요. 상국대 병원 장례식장인데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사내의 안색이 변했다.
“진짜 보낸 모양입니다.”
눈썹이 드문드문 난 우두머리 사내 기천수가 이마를 찡그리며 조화들을 훑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죽은 채석교는 시골 출신이다.
조화를 보낸 사람들의 면면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고 그들과 알고 지낸다는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어쨌든 기천수를 필두로 다섯 명의 사내들이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유니폼을 착용한 상조회 사람들이 부지런히 문상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멈칫!
신발을 벗고 방으로 올라서던 기천수가 깜짝 놀랐다.
상주석에 팔에 상장을 차고 있는 사람은 유태수, 즉 데이브 유였다.
뒤늦게 유태수를 발견한 사내들 모두가 소스라친다.
하지만 유태수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가벼운 묵례로 사람들을 맞이했다.
쏙!
상조회 여직원이 화병에서 국화 한 송이를 뽑아 건넸다.
기천수가 대표로 한 송이를 받아 위패 앞으로 다가가 놓았다.
그리고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나 사내들 모두 단체로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유태수는 덤덤한 표정으로 절을 하는 사내들을 내려다보았고 두 번의 절이 끝나고 일어선 기천수 일행이 방향을 틀었다.
척!
처어억!
상주와 맞절을 하는데 모두가 얼굴을 숙이면서도 최대한 눈을 치켜뜨고 유태수를 살폈다.
유태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깊숙이 머리를 숙이고 일어난다.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고인과는?”
기천수가 눈을 빛낸다.
“잘 아는 형님입니다. 형제도 없고 하여 내가 상주 자리에 서 있기로 했습니다.”
파르르!
기천수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무슨 개소리야.’
채석교 주위 인간들은 거의 안다.
그런데 상대방이 아는 형님이라니 순간적으로 혼란스럽다.
아주 가끔 상주 할 만한 사람들이 없어 친구가 대신 하는 일이 있다.
하지만 이건 요상하다.
“저쪽으로 가시죠. 좀 모셔요.”
유태수가 상조회사 직원에게 말했다.
기천수 일행은 직원을 따라가면서도 계속 고개를 갸웃거린다.
한편 부의함 앞에 앉아 있는 송만술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모든 것이 새롭다.
아니,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신의 손으로 죽여 놓고 태연하게 상주 노릇을 한다.
죽은 채석교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신다.
하지만 너무 연로하여 고향 진도에서 올라오지 못했다.
고향 친인척 몇이 올라왔으나 교도소를 밥 먹듯 들락거리는 채석교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지 않을 수는 없고 왔지만 누가 상주 노릇을 하는지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배석대가 상주로 나선 데에는 어떤 계산이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어떤 계산이라는 것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약간 추측할 수 있는 건 진열된 조화들이다.
미국 대사 스티브가 고인인 채석교와 교류하고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의 조화는 배석대의 작품이다.
좋다.
용병 노릇을 했으니 네이비 씰 출신들을 적지 않게 알 것이고 그들의 도움을 얻어 미국 대사 조화를 받았다 치자.
문제는 나머지들이다.
국내에서도 제법 거물이라 할만한 몇 명이 보이긴 했지만 진짜는 나라 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