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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벌집 청소부-86화 (86/122)

86화 너와 나의 느와르(1)

외국인들인데 평범하지가 않다.

인터넷을 검색한 결과 국제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글로벌 기업들의 총수거나 아니면 월스트리트에서 막강한 위력을 과시하는 투자가들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골드만삭스, JP모건, Citi그룹, 블랙록, 뱅크오브아메리카의 고위 임원들이 보낸 조화를 무슨 눈으로 봐야 할까.

“로버트 작품이었어.”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고주식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

“자기 입으로 그러더라고, 석대가 요청해서 그렇게 조화를 받아 세워 놓은 것이라고.”

“뭘 노리고?”

“그건 나도 모르지.”

정말 모르겠다.

목적이 있는 건 분명한데 감을 잡지를 못하겠다.

유태수는 조용히 서 있다.

***

유종태는 눈썹을 찌푸렸다.

“진짜요?”

그는 지금 회사 일로 뉴욕 세인트 레지스 호텔에 묵고 있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데 표정이 굳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비서 정준구가 서 있다.

“알겠습니다.”

유종태는 핸드폰을 천천히 내렸다.

길게 숨을 한 번 내쉬더니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냉장고 안에서 시원한 캔맥주 한 개를 꺼내 마개를 따고 한 모금 마신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무슨 일입니까?”

정준구가 묻는다.

“데이브 유란 친구, 생각보다 미국 내 인맥이 튼튼한 것 같군.”

정준구가 눈살을 찌푸린다.

갑자기 비즈니스 차 뉴욕에 와서 데이브 유 얘기라니 생뚱맞기 때문이다.

“무슨 전화입니까?”

“그 정도였다고?”

혼자 중얼거리던 유종태의 눈이 가늘어졌는데, 그건 약간 안도에 찬 표정이기도 했다.

“급했나?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자신에 대한 다짐이다.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걸 지금 깨달은 것이다.

상대가 강한 패를 쥐고 있다면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잘 준비하고 때를 기다렸다가 재기불능의 치명타를 먹여야 한다.

‘이기지 못할 놈은 애초부터 싸움을 걸지 마라. 싸움을 걸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짓이겨 놓고.’

아버지 유장풍의 경영 철학 중 하나다.

그런데 짓이기지 못했다.

이번 일은 상대를 가늠하기 위해 살짝 한 번 떠본 셈으로 치고 잠시 숙고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벌컥벌컥!

유종태는 단숨에 맥주를 비웠다.

***

문상객이 뜸하다.

친척이라고 온 사람들 중 몇몇은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사라졌고 남은 사람들도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다.

척!

유태수는 천천히 세워진 조화들을 바라보았다.

보낸 사람 이름이 쓰인 리본을 만지며 웃기도 하고 때로는 이마를 찡그리기도 했다.

그야말로 하나 같이 신문 지상에 한두 번씩 오르내린 재계와 금융계의 거물들이다.

“궁금한 것이 있다. 석대.”

송만술이 다가왔다.

“데이브라고 불러.”

유태수는 리본을 펼쳐 보며 대답했다.

“이 조화들이 던지는 메시지가 뭐지?”

“메시지?”

그러면서 송만술을 돌아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경고야!”

“무슨 경고?”

“당신은 한국 사회에서의 절대 성역이겠지만 난 미국에서 성역이다.”

“성역! 누구?”

“이번에 날 죽이려 했던 쪽.”

“그게 누군데?”

“나도 몰라. 다만 이미 여길 다녀갔든지 최소한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 정도는 보고가 됐을 거야.”

“보고라니?”

“조화에 걸린 이름들을 말하겠지. 연락을 받은 상대는 몹시 무척 놀랐을 테고,”

송만술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누군가 데이브 유를 죽이려고 했다.

칼잡이들은 하수인일 뿐이다.

조화는 그 배후세력에게 전달하는 데이브 유의 옐로카드다.

당신 못지않은 힘을 갖고 있으니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마라.

한 번만 더 건들면 그때 봐주지 않겠다.

“그럼 배후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뜻 아냐? 그러니까 조화를 통해 경고를 한 것이고? 아는 사람이지?”

“짐작은 하는데.”

송만술은 눈을 좁혔다.

누굴까.

거물들 이름의 조화를 세워 놨다는 건 누군지 알지 않고서는 보여줄 수 없는 카드다.

즉 상대 또한 굉장한 인물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상주를 자처한 건 뭐야?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네가 죽였잖아, 채석교?”

“상주가 되어야 하수인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잖아.”

“채석교의 패거리들이 문상을 오리란 걸 알았다는 거야?”

“당연히 와야지. 자신들이 보낸 칼잡이가 죽었는데 위로 겸해서 말이야.”

“그래서 봤어?”

우리가 채석교를 보냈다고 이마에 써 붙이고 온 문상객은 없었다.

물론 행색이 의심스러운 몇몇이 있긴 했지만 송만술의 시선으로 패거리들이 왔다는 건 볼 수가 없었다.

“왔다 갔지. 다섯.”

다섯이라는 말에 송만술이 눈동자가 움직인다.

부의함에 앉아 있었으므로 문상을 온 사람들 대다수는 기억한다.

‘다섯, 다섯!’

입으로 중얼거리던 송만술의 눈이 커졌다.

기억난다.

한 사내가 대표로 꽃을 놓고 단체로 절을 했다.

그리고 상주 노릇을 하는 데이브 유에게 고인과 어떤 사이냐고 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그 사람들, 다섯?”

유태수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돌아섰다.

“그들이 누군지 잠시 후면 드러날 거야.”

“사장님!”

송만술은 고개를 돌렸다.

정장을 한 사내가 급하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언뜻 문상을 왔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사내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송만술에게 눈인사를 함으로써 낮에 문상을 온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여기!”

사내는 들고 있는 서류 봉투를 유태수에게 건네준다.

그는 다름 아닌 가정 문제 상담소장 백기만이었다.

“태극동지회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상을 온 인물에 대한 조사 자료입니다.”

백기만이 낮에 다녀갔던 기천수에 대한 신상을 자세히 조사해 프린트해 온 것이다.

스윽!

유태수는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프린트된 내용물을 차분하게 읽는다.

송만술과 백기만은 숨을 죽이며 유태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랑!

모두 다섯 장이다.

유태수는 복도에 선 채 차분하게 다섯 장 모두를 읽었다.

팔랑!

마지막 다섯 장까지 넘기고 다시 첫 번째 장을 훑는다.

“한향대학?”

“그곳 경제학과를 나왔더군요.”

“태극동지회는 무엇 하는 곳이오? 무슨 애국단체 같은데?”

“전혀 아닙니다. 이름만 그럴싸할 뿐 폭력조직일 뿐입니다.”

“폭력조직?”

“아마 국내 조직 중 가장 규모가 크면서 양지 사업을 제일 활발하게 벌이고 있죠. 곡예사 줄 타듯 양지와 음지를 절묘하게 넘나들죠. 국회의원 제만동 의원이 태극동지회 고문이기도

합니다.”

“제만동?”

유태수의 눈이 빛났다.

알고 있다.

심지어 자기 집으로 찾아온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였다.

한참 복싱에 빠져 있었다.

그날도 집 뒤에 있는 소나무 가지에 톱밥이 가득 들어 있는 샌드백을 놓고 두드렸다.

추운 겨울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때리고 있을 때 한 사내가 나타났다.

정장의 사내는 8대2의 가르마를 분명하게 탔고 진한 청색 정장에 번개 무늬가 들어간 붉은 넥타이를 했다.

- 누구세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물었다.

- 회장님 자제분 중 하나가 굉장한 복서라던데 자네인가 보군?

- 날 아세요?

- 나도 젊은 시절 글러브를 낀 경험이 있지. 물론 자네처럼 대단한 실력을 가진 선수는 되지 못했지만 어쨌든 맞고 다니지는 않았어.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복싱을 했다는 것을 자랑하듯 말했다.

- 굉장한 주먹일세, 빠르고. 아 참, 내 소개가 늦었군. 회장님과 저녁 식사 약속이 된 제만동이라고 하네.

처음 듣는 이름에 멈칫거리자 다시 입을 열었다.

- 국회의원이라네. 회장님께서 많이 도와주고 있지. 이름이 뭔가?

- 유태수라고 합니다.

- 유태수, 매우 마음에 드는 이름일세. 눈빛도 좋고 말이야. 대단한 기세야.

큰 소리 내어 웃으며 돌아갔다.

유태수는 서류를 봉투에 넣었다.

“수고했어요.”

“시킬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그럼 이만.”

돌아가는 백기만을 불러 세웠다.

“조사는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그렇잖아도 내일쯤 중간 보고를 올릴 계획입니다.”

“어떻소?”

보고서는 보고서고 대충이라도 말해보라는 뜻이다.

흘긋!

백기만이 송만술을 바라보았는데 신경이 쓰인다는 뜻이다.

“신경 쓸 것 없소. 우리 송 과장은 나와 생사를 같이하기로 한 사람이니까.”

“허걱!”

송만술은 소스라쳤다.

자신은 한 번도 생사를 같이하겠다고 말한 적 없다.

더욱이 군인도 아닌 민간인이 무슨 생사를 같이한단 말인가.

갑자기 온몸이 차가워지고 목덜미가 섬칫해진다.

‘이게 뭐지.’

송만술은 애써 침착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좋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요?”

“입에 담기 좀 그러하지만 상상을 초월합니다.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린다면 난 아직까지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그렇게 나쁜 사람이 있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화악!

유태수의 눈이 커졌다.

“글쎄요. 내가 그 부부를 잘 모르지만 남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좀체 표정 변화가 없는 유태수다.

굳어지는 그를 보며 송만술은 고개를 갸웃하며 백기만을 본다.

부부라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남자와 여자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백기만이 문상객으로 왔으므로 명단에 어떤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송만술은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걸음을 옮겨 복도를 걸어갔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온 송만술은 방명록을 펼쳤다.

손을 짚어가며 빠르게 훑어가던 송만술이 세 번째 장을 넘기며 멈췄다.

「가정 문제 상담소장 백기만」

가정 문제 상담소라는 말을 이해 못한 송만술은 한참을 중얼거렸다.

방명록에 쓰인 것처럼 가정 문제를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 비슷해 보이지는 않았다.

송만술은 한참 동안 방명록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

돌려보고 또 돌려보았다.

하지만 화면이 너무 흐릿하다.

“에이 자식들, 웬만하면 CCTV 좀 교체하지.”

전주식을 살해한 범인 수사가 답보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하필 그날따라 화장실 CCTV는 고장 나 있었고 인근 가게 CCTV에도 용의자로 추정되는 사람의 모습은 찍히지 않았다.

그런데 학교 앞 삼거리에는 교통 감시용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출근길과 퇴근길 차량 흐름을 보여주기 위해 굉장히 높은 곳에 달아 놓았다.

그 카메라에 바로 옆 초등학교가 들어왔다.

특히 지하 체육관에서 1층으로 올라온 뒤 본관 건물로 이어지는 회랑까지 각도에 잡혔다.

문제는 화질이었다.

거리도 거리지만 화질이 좋지 않아 용의자로 추정되는 사내의 얼굴 생김새를 전혀 특정할 수가 없었다.

단지 한 가지는 정장 차림을 했다는 것이다.

“살인자가 정장이라.”

국내 담당 수사 3팀장 오하수는 눈을 좁혔다.

뭔가 풀리지 않는 일이 있을 때면 보이는 습관적인 행동이다.

방안에는 곽철종과 맹사성이 앉아 있었는데 각자의 앞에는 뚜껑이 열린 생수가 한 병씩 놓여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아침부터 사람을 죽이러 가는 자가 정장을 차려입었다. 살인이 회사 출근하는 일도 아니고.”

“전 입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맹사성이 눈을 빛냈다.

“마피아 킬러들 보면 중절모에 명품의 정장 차림을 하지 않습니까?”

“그건 영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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