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89화 (89/122)

89화 달의 노래(2)

그림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평생 두 번 보기 힘든 이런 귀한 작품들이라면 한 번쯤 방문해 볼 필요가 있다.

더욱이 어머니 채무령의 미술품에 광적일 만큼 집착하여 은연중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다.

아마 태천미술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런 전시회가 열린다면 분명 끝나기 전까지 한 번은 찾아가 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에 보이는 세계적인 미술품이 경이적인 감정으로 전혀 다가오지 않는다.

욕망을 위해 살인도 망설이지 않는 여자.

「이건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메일 제일 아래 쓰인 백기만의 추신이었다.

아직도 상당수가 추적 중이라고 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어머니 채무령의 범죄사실이 드러날지는 알 수 없었다.

클리닝 타깃.

이른바 사신의 청첩장으로 불리는 명단에 어떤 오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자신에게 한없는 사랑을 주었을 뿐이었다.

- 힘이 세다고 약한 친구를 때리면 안 된다.

- 생일날인데 친구들 집으로 초대해 같이 시간 보내는 것이 어떻겠니?

- 공부하기 싫으면 하지 말거라.

항상 자신의 입장에 섰고, 무조건 편을 들어주었다.

그런 어머니가 클리닝 타깃 2위에 오르자 놀라움을 넘어 어이가 없었다.

뭔가 잘못됐을 거야.

하지만 꿈일 뿐이었다.

말 그대로 어머니야말로 완벽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전형이었다.

자신도 속고 온 가족이 속고 있는지 모른다.

가족도 속이는데 세상을 속이기에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한숨이다.

그냥 나오는 한숨이다.

***

유태수는 식당을 나왔다.

송만술과 고주식을 택시에 태워 보낸 유태수는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본다.

소주를 한잔 마셨기 때문에 대리기사를 불렀다.

“죄송합니다. 대리 부르셨죠?”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사내가 허겁지겁 다가왔다.

점퍼 차림이었는데 두 손으로 키를 받아 재빨리 차 문을 열었다.

“타시죠!”

뒷문을 열어준다.

유태수는 뒷좌석으로 앉았고 잠시 후 운전석에 사내가 올라탄 뒤 차가 출발했다.

유태수는 주소를 불러 주고 좌석에 등을 붙였다.

송만술과 고주식은 태천 입사 동기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은 이라크를 거쳐 다시 한국에서 데브그루라는 투자회사 직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열심히 일한다.

유태수가 시키는 일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움직인다.

저녁 겸 술 한잔했는데 둘은 많은 질문을 했고 유태수는 최선을 다해 대답해 주었다.

비밀이 많으면 거리는 절대 가까워지지 않는다.

중요한 몇 개의 비밀을 제외하고는 두 사람에게 숨길 마음은 추호도 없다.

설태왕은 지금 뉴욕에 있다.

역시 데브그루 펀드 매니저 중 한 명인 친구 무어와 함께 향후 투자에 대한 새로운 시나리오를 짜고 있다.

‘기천수.’

문득 한 사내가 떠올랐다.

교통사고에서부터 몸에 칼까지 박았던 그날 밤 사건의 조종자다.

관광버스 운전사는 대리운전기사 유족들과 형사 합의를 보았고 며칠 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 유족과 합의하는데 박소봉의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합의 할 만한 거액도 없고.

은밀한 개인 정보지만 가정 문제 상담소 백기만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

그는 경찰 인맥을 통해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정보를 귀신처럼 빼내 유태수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결국 기천수를 중심으로 하는 태극동지회에서 흘러갔을 것이다.

- 태극동지회야말로 한국판 마피아 아닙니까.

백기만이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사업가로 위장하여 정치인들을 후원하고 지원하면서 그들의 약점을 틀어쥔다.

여의도뿐만 아니라 검찰에도 태극동지회 자금이 깊숙이 뿌려지고 있다는 설이 도는데 백기만은 진짜라고 했다.

- 태극동지회장이 누구요?

- 드러난 이름은 태억상인데 난 믿지 않습니다.

깜빡 잠이 든 것 같았다.

차가운 냉기에 눈을 떴는데 사방이 캄캄했다.

유태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세워 다시 한번 살핀다.

자신은 여전히 뒷좌석에 앉아 있는데 운전하던 대리기사의 뒷머리만 보이고 있었다.

“그만 내리실까요?”

고개를 돌렸다.

켜진 핸드폰에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핸드폰으로 무슨 게임을 하는지 양손 엄지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 왔는데 정신 차리셔야죠.”

유태수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딘지는 알 수 없었으며 그 흔한 전깃불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서울은 아니라고 보았다.

딸칵!

문 열리는 소리에 핸드폰에 시선을 모으고 있던 대리기사가 고개를 쳐들었다.

씨익!

대리기사가 웃음을 지었다.

유태수가 차에서 내렸는데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상황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행동으로 판단한 것이다.

대리기사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더니 차 밖으로 나왔다.

적당한 바위에 주저앉더니 몸을 기대고서 담배를 피우는 유태수를 바라본다.

집이 아닌 것에 놀라기는커녕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어딥니까?”

“맞춰 보시죠.”

유태수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딘지 알아내겠다는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갯내음이 맡아지는 것이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는 모양인데.”

유태수의 혼잣말에 대리기사가 이마를 찡그렸다.

담배를 물고 밤바람을 쏘일 상황이 아니다.

자신이 친 덫에 빠졌다.

덫에 걸렸으므로 살려달라고 소리치거나 하다못해 날갯짓이라도 해야 정상이었다.

지금의 유태수의 태도는 덫에 걸린 위기의 사냥감이 아니었다.

“날 어쩔 생각입니까?”

대리기사가 느릿하게 깔고 앉아 있던 바위에서 일어났다.

유태수 쪽으로 서너 걸음 다가오더니 멈춰 섰고 좀 더 근거리에서 자세히 살핀다.

꿈틀!

대리기사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간파했다.

아무리 봐도 겁먹고 당황한 기색이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겁부터 먹는다.

언감생심 어디서 감히 담배를 피우고 차에 기대서는 여유까지 보인단 말인가.

스윽!

대리기사가 뭔가를 뽑아 들었다.

순간적으로 어둠이 밀려나고 주위가 은빛으로 물들었다.

회칼이다.

칼이 뽑혀 나오자 어둠이 밀려간다.

그만큼 칼날이 잘 서 있다는 뜻인데 자세가 안정되어 있고 조용히 손잡이를 거머쥐고 내미는 동작은 부드럽다.

‘남 비서가 이런 사내였어.’

운전사면서 비서라는 것도 알고 있다.

또한 운전사는 최일선의 경호원이라는 사실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회칼을 휴대하고 다닐 정도면 얘긴 달라진다.

원래 갖고 다니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위협하기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건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칼을 쥐고 있는 모습이 무척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녹록하지 않은 연륜이 묻어난다.

“원래는 계획에 없었던 일인데.”

칼까지 뽑아 들 생각은 없었다는 뜻인데 어쨌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놀라운 속도로 칼이 들어왔다.

은빛 광채 하나가 들어온다고 느끼는 순간 앞가슴이 서늘해진다.

‘이건.’

칼을 쓴다는 인물들을 여럿 만났고 그들과 치열한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렇게 빠른 칼은 처음이다.

선공(先攻).

또는 선제공격이라고도 한다.

지금처럼 전혀 공격할 것 같지 않았는데 벼락처럼 들어오는 걸 기습이라고 부른다.

기습의 특성은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또한 예상을 전혀 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쪽에서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기습은 반드시 그에 걸맞은 이득을 얻어내야 한다.

그러자니 모든 걸 쏟는데 대리기사로 변장한 남정욱은 자신했다.

이미 사정권 안에 있고 칼은 정확히 유태수의 복부에 꽂힐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스으윽!

옆으로 빠져나간다.

백 퍼센트 박았다고 자신했는데 자신의 칼끝을 피해 옆으로 이동하는 유태수의 움직임을 본 것이다.

‘우훗.’

믿어지지가 않는다.

완벽한 공격이었다.

입에 물려 있던 담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보면 유태수 또한 무척 다급했던 모양이다.

슉!

슈슉!

남정욱의 칼이 재차 번득였다.

혼이 담긴 칼이다.

이미 남정욱은 유태수를 유인하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걸려들었다는 걸 간파했다.

그건 한 가지를 의미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 유태수를 제압하지 못하면 일이 커진다는 것이다.

슈슈슈슈!

어둠이 산산이 부서진다.

하지만 유태수의 몸은 결코 잘리지도 않았고, 더욱이 부서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온전하지는 않았다.

이미 입고 있는 양복은 칼에 베이고 찢어져 걸레 조각이 되어 있었다.

복서로 다져진 현란한 스텝과 네오에게 특별히 배운 이른바 해브 노 섀도 트리플(have no shadow triple).

그림자가 없는 세 걸음, 즉 무영삼보(無影三步)로 불린다.

세 걸음을 움직이는 데 그림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어떤 공격도 세 걸음이면 충분히 내 신변을 보호할 수 있는 간격이고 거리라는 것이다.

네 걸음도 필요 없다.

세 걸음만 혼신을 다하면 피하지 못할 공격이 없다고 했다.

아직은 멀었다.

하지만 빠르긴 했다.

헉헉!

남정욱의 입에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친 것이다.

눈에 띄게 칼도 느려졌다.

그에 반해 유태수의 걸음은 더 빨라졌다.

옷이 찢어지고 약간의 상처를 입긴 했지만 남정욱의 칼을 상대로 무영삼보를 본의 아니게 수련하고 있었다.

아차 하면 목숨이 달아날 절박한 실전인 탓에 효과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결국.’

유태수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남정욱은 식구들 누구도 모르는 어머니의 청소부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놀라운 기술을 지니고 있을 리 없는 것이다.

탁!

빠른 잽이 다가서는 남정욱의 턱을 가격했다.

힘을 싣지 않은 대신 속도에 주안점을 둔 놀라운 스피드의 주먹에 남정욱이 움찔했다.

가벼운 잽이지만 남정욱이 받는 충격은 강력한 훅을 맞은 수준이었다.

자신의 눈은 유태수의 왼손 잽이 들어오는 걸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그만해, 넌 죽었다 깨어나도 날 어쩌지 못해 하는 경고 같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벗어났다.

일이 잘못되면 자기 한 명 희생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슉!

체력이 떨어지면 본능적으로 속도를 높이기 위해 몸에 힘을 넣는다.

몸에 힘이 들어가면 절대 빠를 수 없다.

타탁!

연거푸 두 개의 잽을 맞고서야 뒤로 주춤 밀려났다.

남정욱의 눈이 커졌다.

이토록 빠른 주먹은 본 적이 없다.

아니, 딱 한 번 있었다.

미들급이면서도 경량급의 스피드를 감추고 헤비급의 펀치를 지녔다는 한 명의 복서가 생각난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사내는 유태수가 아니다.

“딱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사실대로 대답해 주기 바랍니다.”

유태수는 헐떡거리는 남정욱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 시켰습니까? 내 말은 어떤 지시를 내렸냐고 묻는 것입니다.”

헐떡거리는 남정욱의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 뭐 하는 놈인지 알아보고 조사가 필요하다 싶으면 데리고 와요.

채무령은 그렇게 지시를 내렸다.

“얘기해 줘야 합니다.”

언뜻 사정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자신의 칼이 실패한 상대라는 것 때문인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얘기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말보다 더 무섭게 느껴진다.

꾸울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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