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데뷔전(2)
경찰은 추락사로 판정했다.
추락하기 이전에 살해를 당한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채석교와 동행했던 배문덕이다.
그가 사라졌다.
거주지를 이잡듯 뒤졌지만 찾을수 없고 심지어 여동생까지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지이잉!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보더니 통화 버튼을 터치한다.
상대가 말을 하는지 기천수는 가만 듣고 있었다.
기천수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30여 초 가까이 예, 예 하며 대답만 하더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말로는 큰소리쳤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건 현재 아무것도 없다.
덜컹!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오른팔 임동술이 들어섰다.
“튀었습니다.”
“어디로?”
“미국입니다. 법무부 아는 사람에게 얻어낸 정보입니다. 여동생도 같이 출국했습니다.”
“그놈이 미국을 왜 가?”
사냥 명령을 받고 사냥하러 떠난 사냥꾼이 숲으로 가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다는 말에 기천수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확실해?”
“예!”
기천수는 잔뜩 이마를 찡그렸다.
도무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형님!”
문이 열리고 또 한 명의 사내가 급히 들어섰는데 최종우다.
좌 종우 우 동술로 불릴 만큼 기천수가 신뢰하는 동생들이자 직계 부하였다.
“그 새끼 미국으로 토꼈는데요.”
“너는 또 그 말을 어디서 들었어?”
최종우가 흘긋 임동술을 바라본 뒤 입을 열어 말했다.
“여동생 배문혜가 회사에 그렇게 말했답니다.”
기천수는 털썩 의자에 앉았다.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이로 물어 뽑더니 불을 붙인다.
딸칵!
라이터 불이 담배 속으로 빨려 들어갈 만큼 깊숙하게 빨더니 연기를 내뿜어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한 놈은 죽고 다른 한 놈은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을 데리고 미국으로 날라버렸다.
느닷없는 미국행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이잉!
이마를 찡그리며 앉아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액정에 찍힌 이름을 보더니 재빨리 받는다.
“왜?”
“형님, 좀 와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야?”
“가게에 일이 좀 생겼습니다. 정 사장이 갑자기 꼬장을 부려 말리는데 그만 팔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정영길이?”
“예!”
“알았어!”
기천수는 전화를 끊고 일어섰다.
“가게에 일 생겼다.”
“무슨 일?”
임동술이 조심스럽게 물으며 뒤를 따라 나간다.
강원랜드 못지않은 시설이다.
카지노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바카라, 블랙잭, 룰렛과 텍사스 홀덤에 파칭코와 슬롯머신까지 갖추고 있다.
도박장은 자정이 넘어가는데도 사람들로 넘쳐났다.
국내에 있는 카지노에서 강원랜드를 제외하고 내국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없다.
여권을 위조하거나 아니면 연줄을 통한 불법 출입이 가능하지만 걸리면 일단 법적으로는 처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강남 한복판에 이토록 엄청난 테이블을 갖춘 불법 도박장이 성황리에 영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도박장 측면으로 난 조용한 복도를 걸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무실로 들어선 기천수는 깜짝 놀랐다.
한 사내가 피범벅이 된 채 양손에 수갑을 채웠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목까지 묶여 있었는데 고래고래 소릴 지른다.
“야 이 씹새끼들아, 빨리 안 풀어! 으아아, 개새끼들아!”
바닥에 누운 사내는 목청껏 욕을 뱉었다.
멈칫!
천장을 보고 한참 욕을 하던 사내가 내려다보는 기천수와 시선이 마주쳤다.
“기 사장 당신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어?”
태극동지회가 운영하는 사업체 중 한 곳이다.
기천수는 이곳 도박장을 관리하는 책임자다.
“뭐 해, 풀어 드리지 않고.”
“형님.”
“정 사장님은 이런 대접을 받을 분이 아니다. 어서 풀어 드려 자식아!”
버럭 소릴 지르자 두 명의 사내가 재빨리 수갑을 풀고 발을 묶은 노끈을 칼로 잘랐다.
벌떡 일어난 정영길이 대뜸 수갑을 들고 있는 사내의 뺨을 후려갈긴다.
“이 씨발놈이 감히 내 손에 수갑을 채워?”
“정 사장님, 진정하십시오.”
기천수가 막고 나섰다.
“미안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야, 물수건!”
노끈을 자른 사내가 재빨리 물수건을 가져오자 기천수가 손수 정영길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준다.
“칠성이 강철이, 너희 둘은 밖에서 대기해.”
수갑과 노끈을 자른 사내가 문을 열고 나갔다.
“뭐 하냐, 정 사장님 소파로 모셔!”
따라온 임동술과 최종우가 정영길을 조심스럽게 부축해 소파에 앉힌다.
스윽!
앞에 앉은 기천수가 담배를 권한다.
오른손을 뻗어 담배를 물자 불까지 붙여준 기천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다치셨다던데.”
“팔목 나갔어.”
그러면서 왼손을 살짝 드는데 이마를 찡그린다.
전화상으로는 서로 밀치고 멱살잡이하다가 부러진 것이라고 했다.
즉 피해자 가해자를 나누기 애매한 일이었다.
어쨌든 기천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병원으로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됐고, 한 장 내놔.”
“얼마나 나갔기에?”
“다섯 장 나갔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아. 지금까지 여기 다니면서 잃은 적은 있지만 오늘 밤 같은 개패는 처음이야.”
텍사스 홀덤을 했는데 5억을 잃었다는 것이다.
딜러가 있는 다른 게임과 달리 텍사스 홀덤은 손님들끼리 치고받는 난투극이다.
베팅 룰도 판을 구성하는 게이머들이 정하기 때문에 가장 큰 판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한데 일억을 내놓으라는 요구였다.
“그렇지 않으면 나 그냥 안 넘어갈거야.”
정영길은 강남에서 제법 큰 술집 두 곳을 운영한다.
전라도 벌교 출신으로 중학교만 졸업하고 올라와 오늘의 부를 이룬 그야말로 인간 승리의 표본인 것이다.
웬만한 배짱이 아니고서는 수많은 조폭들이 들쑤시는 강남 바닥에서 자수성가하기 힘들다.
즉, 정영길도 평범하게 살아온 놈은 아니라는 것이다.
“드리죠!”
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뺨을 때릴 상대가 있고 어르고 달랠 놈이 있다.
똥이 무서워 피하는 건 절대 아니다.
손님은 계속 출입하게 만들어야 하고 정영길은 아직도 돈이 넘쳐나는 인간이다.
지금 추세로 나간다면 언젠가는 강남 요지에 있는 그의 술집 두 곳이 자기 소유로 들어올 수 있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것이다.
탁!
“일억입니다.”
임동술이 오만 원권 뭉치 스무 개가 담긴 상자를 가져다 놓았다.
바라보는 정영길이 깜짝 놀란다.
설마 진짜 일억을 내놓을 줄은 몰랐다.
“기 사장!”
“연배로도 저보다 형님이시고 이래저래 제가 잘 모셔야죠. 서운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그냥 홧김에 한 번 억지 부려본 건데.”
“병원부터 가시죠.”
“아냐. 병원은 무슨? 손목 부러져 병신 된 놈 없어. 잠시 놀다 갈 테니까 기 사장은 걱정 마.”
그러면서 일억이 든 현금 상자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형님, 일억을 주는 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쟤가 저걸 잃으면 그냥 갈 것 같냐? 반드시 차용증을 쓴다.”
한번 맛 들이면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 도박이다.
금방이라도 딸 것 같다.
또한 따는 날도 있다.
문제는 조금 더 하는 욕심이 사람을 끝없는 수렁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이었다.
기천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공짜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정영길의 베팅은 난폭했고 이성을 잃었다.
더구나 앞선 게임 때와 달리 패도 절묘하게 잘 뜨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제 초저녁부터 쏟아낸 본전 생각에 당연히 강한 베팅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내 패가 좋으면 상대 패도 좋다는 걸 알아야 한다.’
아주 단순한 도박의 진리다.
그걸 깜빡하는 순간 주머니는 순식간에 거덜 난다.
일억이 남의 손으로 넘어가는 건 아주 잠깐이었다.
“차용증?”
기천수의 고개가 들렸다.
그 앞에는 오칠성과 양강철이 서 있었다.
“그 인간!”
기천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렸다.
“작성 잘해. 차용증 그거 잘못 받으면 휴지 조각 된다.”
“걱정 마십시오.”
두 사람은 재빨리 사무실을 나갔고 기천수는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줄리아나, 블랙 패밀리.”
줄리아나는 정영길이 갖고 있는 나이트클럽이고 블랙 패밀리는 룸살롱이다.
길어도 삼 개월을 넘지 않고 그 두 곳이 자신의 소유로 들어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
승용차가 달린다.
0시 25분.
정영길 때문에 이것저것 처리하느라 깜빡했다.
중2짜리 아들 과외가 정확히 자정에 끝난다.
무려 25분이 늦은 것이다.
더욱이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여 마음이 급하다.
아내에게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더 늦을 뻔했다.
끼이익!
학원 앞에 차를 급히 멈춰 세웠다.
자녀들을 데리러 오는 부모들 차량으로 항상 북적거리는데 모두 데리고 돌아간 듯 조용했다.
재빨리 아들 번호를 눌렀다.
“아빠!”
아들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디야?”
“아빠는?”
“학원 앞에 왔지?”
“난 여기 포장마차. 배가 고파서 라면 하나 먹고 있어.”
“그래, 알았어.”
재빨리 차에서 내린 기천수는 우산을 펼쳐 들고 학원 건물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포장마차 위치를 알기 때문이다.
손수레에 포장을 치고 하는 길가 장사가 아닌 조그만 가게 형태로 운영되는 실내 포장마차이다.
주 손님들은 근처 학원이 많아 대부분 학생들이다.
건물을 돌아서자 뒤편으로 골목이 있는데 불이 들어온 포장마차란 간판이 보인다.
가게 가까이 다가간 기천수는 미닫이문을 거칠게 당겼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입구 좌우로 탁자들이 있고 가운데 통로는 안쪽 주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학생들로 보이는 손님은 없고 대부분이 진한 화장을 한 여자들이 라면과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오른쪽 창가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라면을 먹으며 얘길 하고 있었다.
입구를 보고 앉은 사람은 자신의 아들 기철무다.
마주 보고 앉은 사람은 등을 돌리고 있어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리드 그레이 톤에 굵은 체크무늬가 있는 정장을 했다.
“정말요? 아저씨 대단해요?”
기철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누굴까.
공부해라, 공부해라, 공부해라라는 엄마의 잔소리에 집에서 웃지를 않는 기철무다.
아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엄마의 만족을 얻을 목적인지 알 수는 없지만 기철무에 대한 아내의 공부 강요에 일기에 죽고 싶다는 내용을 남긴 아들이 지금 너무 환하게 웃는다.
“험험!”
헛기침을 하며 다가갔다.
“아빠!”
기철무가 고개를 올려 기천수를 발견하고 놀란다.
“아빠도 라면 먹을래?”
“아냐. 아빠는 됐어.”
그러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내려다보았다.
때마침 사내도 얼굴을 들어 올렸는데 둘의 눈이 마주치면서 기천수는 기겁했다.
“허헙!”
너무 놀란 기천수는 옆 탁자를 짚고서야 몸을 반듯하게 세웠다.
“왜 그래, 아빠? 아는 분이야?”
“철무 아버님 되시나 보군요.”
기천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철무야, 가자!”
“라면 덜 먹었어.”
“집에 가서 밥 먹어.”
“밥 싫어, 나 라면 먹을 거야.”
“가자니까?”
기천수의 사나운 얼굴에 기철무가 움찔하며 일어섰다.
“아저씨, 나 가야 돼요. 우리 또 만나요.”
“연락처 잘 찍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