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93화 (93/122)

93화 데뷔전(3)

“네!”

기철무는 정장 차림의 사내, 유태수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기천수의 뒤를 따라 포장마차를 걸어 나갔다.

끌려 나가듯 따라가는 기철무를 보며 유태수는 빙긋 웃었다.

“아들은 멋진데.”

후루룩!

유태수는 다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아빠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금방이라도 차에서 끌어 내려 혼을 낼 듯 험악한 표정으로 그 사람과 어떻게 만났냐고 꼬치꼬치 묻는다.

기철무는 있는 그대로를 말했지만 기천수는 믿는 눈치가 아니다.

“정말이야. 아빠가 들어오기 30여 분 전에는 자리가 없었어. 그 아저씨 테이블만 비었었다고, 내가 자리가 없어 돌아나가려 하자 괜찮다면 아저씨 자리에 같이 앉자고 하여 합석한

거라니까. 못 믿겠으면 포장마차 아줌마한테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냐?”

기철무는 조수석에 앉았는데 짜증스런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왜 그러는데? 설마 내가 유괴라도 당할 줄 안 거야? 내가 어린애야, 모르는 사람 따라가게.”

“철무야. 아빠에게 거짓말하면 안 된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해.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알았어. 알았다구.”

기천수는 일단 아들을 진정시켰다.

“무슨 얘길 나눴니? 웃고 그러던데.”

“군대 얘기 들었어. 그 아저씨가 군대 복싱 대회에서 우승해 포상휴가 나갔다는 얘기. 아빠도 걸핏하면 나한테 군대 얘기하잖아.”

기철무는 단단히 화가 난 듯 거칠게 말했다.

쏴아아!

비는 더욱 거세게 내렸고 승용차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모두가 잠들었다.

그러나 딱 한 사람만 잠들지 못하고 연거푸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핸드폰 시계는 새벽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어휴, 여기서 뭐 하십니까?”

아파트 야외 휴게소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기천수를 발견한 경비가 랜턴을 끄며 놀란 표정을 했다.

“비 오는데 순찰 도시나 봐요?”

“돌아야죠. 전번 사건으로 부녀회에서 어찌나 말이 많은지.”

보름여 전 아파트에 절도범이 들어 두 집이 털렸다.

배달부로 변장한 절도범이 초인종을 눌러 반응이 없는 집을 골라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이다.

배달부가 배달 간다는데 경비실에서 통제할 수는 없다.

꼬치꼬치 묻고 귀찮게 하면 그 아파트는 배달 않는다고 자기네들의 블랙리스트에 올려 버린다.

그럴 경우 입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하며 경비실을 나무란다.

이래저래 깨지는 것이 군대나 다를 바 없다고 투덜거리는 올해 일흔한 살이라는 박영춘 노인에게 담배를 권한다.

“아이고!”

박영춘 노인은 마다 않고 받는다.

딸칵!

기천수는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양손으로 라이터를 감싸 불을 붙여 준다.

“어르신!”

“어르신이라니, 그냥 박 경비라고 불러요.”

입주민들 모두가 박 경비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그럼 쓰나요. 연세가 있으신데.”

기천수는 웃으며 박영춘의 마음을 적당히 도닥거린 뒤 오늘 포장마차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아들 기철무와 같이 앉은 사람이 자신과 원수 관계라고 했다.

원수가 아닌 다른 마땅한 표현이 없었고 지금 데이브 유와 자신들의 관계가 끝나지 않는 이상 그 상황을 리얼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원수라는 자극적인 단어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건 말이 안 되지.”

박영춘은 이마를 찡그렸다.

“아들과 일면식도 없고 우리 기 사장님이 결혼은 했는지 자식이 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수로 하나뿐인 아들과 마주 앉아 라면을 먹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박영춘은 가당찮다는 듯 담배를 길게 빨아들였다.

“무슨 말씀인지?”

“인생에 우연은 없어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건 그냥 그렇다는 것이고.”

박영춘이 침을 삼키며 목소리에 힘을 넣는다.

“내가 보기엔.”

잠시 말을 끊는다.

기천수의 눈이 빛난다.

마치 고도의 경험과 사건 추적에 풍부한 지식을 가진 명탐정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세상에 우연이 없다고 볼 때 이건 계획적이오.”

“계획적?”

“한마디로 그거지. 기 사장님에게 아들이 있고 그 아이가 다니는 학원도 알고 있다.”

“그럼 우리 집도 알고 있겠군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기 사장님에 대해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뛰어봤자 벼룩이다. 내 손바닥을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뭐 그런 경고 아니겠습니까?”

꾸울꺽!

기천수가 침을 삼켰다.

마치 어둠 속의 맹수처럼 두 눈이 새파랗게 번득인다.

박영춘의 얘기가 크게 틀리지 않는다.

데이브 유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고 있다.

혹시 날 노리고 어떤 청부를 받았다거나 계획 중이라면 당장 멈춰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들 먼저 손을 보겠다는 틀림없는 경고였다.

“그래서 사람은 원(怨)을 지고 살면 안 되는 법이지요.”

툭!

박영춘은 담배를 야외 재떨이에 껐다.

덜컥!

우산을 펼쳐 쓰고 빗속을 걸어간다.

***

흘러가는 분위기가 묘했다.

적대적 인수합병 얘기가 시장에 돌고 있었다.

주식 시장에 떠도는 소문의 거의 다가 악의적인 유언비어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완벽히 백 퍼센트는 아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 나지 않는다.

즉 뭔가 있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있다고 유종태는 판단했다.

자신도 지금 모든 채널을 열어 시장을 살피고 있다.

데브그루는 태천물산 주식 6퍼센트를 소유한 대주주로 태천카드 증자에 참여하지 말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기에 이른다.

태천물산은 태천카드 증자에 자금지원 형태로 참여하는데 대주주가 된 데브그루에서 제동을 건 것이다.

“44퍼센트.”

유종태는 정준구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데브그루와 외국계 투자회사 에버튼을 포함한 나라 밖 사람들이 보유하고 있는 태천물산 주식이 44퍼센트에 이른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나? 공격을 해올 것 같나?”

M&A를 의미한다.

“글쎄, 일단 흔드는 걸 보면 뭔가 꿍꿍이는 있는 듯 보입니다.”

콰앙!

그때 갑자기 사장실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유장풍이 수행비서 장민혁을 대동하고 들어섰다.

“아버지!”

“이게 뭐냐?”

휘익!

쥐고 있던 신문을 집어 던진다.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집어 든 유종태의 눈이 커졌다.

지금 막 나온 오늘 자 석간에 데이브 유의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기자가 태천물산의 주식을 매입하는 의도가 뭐냐는 질문에 단순 투자 차원이라고 했다.

기자가 끈질기게 인수합병을 들먹이자 분명하게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건 인수합병의 의도가 있다는 뜻이었다.

“선장이라는 놈이 바다에 지금 어떤 파도가 치고 있는지도 모르다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대책을 의논 중이고.”

“어떻게 할 건데? 말해봐?”

“내가 이런 기사에 흔들릴 것 같습니까? 아버지, 저를 너무 저평가하십니다.”

유종태는 단호한 눈빛으로 유장풍을 바라보았다.

다음 날부터 시장이 널뛴다.

태천물산 인수 합병 얘기가 판을 흔들어 버린 것이다.

개미들보다 기관투자자들까지 태천물산의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사자는 주문이 쏟아지자 태천물산의 주식이 고공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오르고 또 올랐다.

***

미국에 있는 설태왕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말은 안부 전화라고 하지만 국내 주식 시장을 면밀하게 지켜보며 전화를 한 것이 틀림없다.

일체 주식 얘기는 꺼내지 않는다.

유태수가 태천물산을 상대로 투자에 나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신 설태왕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경험담 하나를 말하기 시작했다.

주식을 언제 매도하느냐는 매우 숨 막히는 일이다.

팔고 사는 일이 결코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만으로 결정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돈이 걸린 일이기 때문에 지구상에서 주식 투자보다 감정 소모가 심하고 다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겪는 매도 시점은 누구도 결정할 수 없다.

탐욕과 후회의 두려움을 가슴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더 얻으려는 탐욕과 때를 놓쳐 가슴을 칠 수 있는 것에 대한 공포 말이다.

십 퍼센트가 올랐을 때 팔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좀 더 지켜보면 혹시 이십 퍼센트가 오르지 않을까.

좀 더 오르면.

조금만 더.

“결론이 뭐요?”

유태수는 말이 길어지자 조금 피곤했는지 직설적으로 묻는다.

“매도 시점을 잘 보는 눈이야말로 타고난 자질이라는 것이죠. 그건 노력과 공부로 되는 부분이 아닙니다.”

“잘 기억하도록 하죠.”

유태수는 빙긋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사무실 공기가 팽팽했다.

모두가 컴퓨터 앞에 앉아 태천물산의 주가 흐름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송만술과 고주식과 고수향 모두 눈을 부릅뜨고 컴퓨터를 본다.

사무실에 있는 컴퓨터는 아무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초 단위, 아니 그 이하 소수점 단위로 매수와 매도를 할 수 있는 고성능 컴퓨터이다.

물론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이 프리퀀시 트레이딩(HFT: High frequency trading), 초고속 온라인 거래가 가능한 장비들이다.

“매도!”

팔짱을 낀 채 화면을 보고 있던 유태수가 짧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탁!

그런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매도 완료라는 글씨가 컴퓨터 창에 떠올랐다.

그야말로 매도 주문을 내고 팔리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1초, 아니 0.5초도 걸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긁어모은 태천물산 주식 6퍼센트가 잠깐 사이에 팔렸다.

“매매 차익 1,599억.”

“1,599억!”

셋이 동시에 말했다.

불과 석 달 만에 1,599억을 번 것이다.

“왜, 고 대리?”

고수향의 얼굴에 약간의 그늘이 드리워진다.

“금감원에서 불공정 거래가 있는지 들여다볼 거에요.”

“그럴 거야!”

알고 있었다는 듯한 유태수의 대답에 고수향의 눈이 커졌다.

“얼마든지 들여다보라고 해.”

외국계 투자회사가 국내 기업을 상대로 요란을 떨면서 거액의 매각차익을 얻었으니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불공정과 공정 사이는 백지 한 장의 차이도 없다.

만약 시비를 걸어오면 데브그루 법무팀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자신은 오로지 투자가로서 돈을 벌 뿐인 것이다.

발칵 뒤집혔다.

신문과 방송들이 태천물산을 상대로 올린 매각차익 1,599억 원에 대한 기사를 집중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언론은 국부가 유출된다는 식의 칼럼으로 국민 정서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방송과 신문에 일제히 태천물산에 대한 광고가 실렸다.

촤락!

집에서 조간신문을 보던 유태수는 미소를 지었다.

배후는 태천이다.

언론을 통해 금감원에 압력을 가하고 불공정거래의 단서를 찾아 이익금을 환수하라는 뜻이다.

“형님도 참.”

유종태를 떠올렸다.

지금 유종태는 태천그룹 후계 구도 맨 선두에 있다.

지금 실수하거나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됐으니 똥줄이 탔을 것이다.

“아버지는 잔인했으나 이런 식으로 야비하지는 않았는데.”

언론에 광고를 주고 기사를 게재하도록 압력을 넣는 건 아버지의 수법이 아니다.

지이잉!

전화가 울린다.

슬쩍 책상 위에 올려진 시계를 보았는데 아침 일곱 시 십 분이다.

액정에 찍힌 번호를 보며 벨이 몇 번을 울릴 때까지 기다리더니 슬그머니 검지로 통화 버튼을 쓸었다.

그건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행동이었다.

“여보세요!”

“남정욱입니다.”

유태수는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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