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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벌집 청소부-94화 (94/122)

94화 데뷔전(4)

오늘쯤 전화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괜찮으면 우리 집으로 오시죠. 오늘 지금 말입니다.”

갑자기 집에서 보자는 말에 남정욱이 당황한다.

“어머니 심부름을 하는 분이시니 우리 집을 아직까지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유태수는 빙긋 웃으며 핸드폰을 내렸다.

잠시 탁자 위에 놓아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손님이 오기로 했으니.’

소파에서 일어난 유태수는 곧장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정확히 한 시간 후 초인종이 울린다.

유태수는 고무장갑을 벗고 현관의 비디오 화면을 응시했다.

정장 차림의 사내가 허리를 숙여 자신의 얼굴을 이쪽에서 확인하도록 해준다.

톡!

대문을 열어주고 유태수는 현관문을 밀며 마당으로 나갔다.

정장을 한 남정욱이 손에 작은 쇼핑백 하나를 들고 들어섰다.

멈칫!

앞치마를 두르고 나타난 유태수를 보며 남정욱은 깜짝 놀란다.

“어서 오십시오.”

유태수가 오른손을 내밀자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마주 손을 뻗어 악수를 했다.

“들어가시죠!”

유태수가 앞장서 들어갔고 뒤를 따라가는 남정욱은 앞치마 끈이 묶인 허리를 보며 작은 신음을 흘렸다.

‘도대체가!’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깨뜨린다.

남자가 앞치마 두르고 부엌일 하는 것이 놀랄 일은 절대 아니다.

문제는 그 남자가 누구냐에 따라 앞치마의 위력은 달라지고 상대에 대한 감정과 평가 또한 바뀐다.

아침 신문에서도 지금 자신을 데리고 들어가는 사내가 어떤 근성을 지녔는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국내 재계서열 1위인 태천의 물산 주식을 마음껏 주무르고 버무려서 1,599억이라는 천문학적인 거액을 챙겼다.

돈은 무조건 번 놈이 임자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픈 놈들이 우리나라에는 너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언론이다.

강자가 돈을 벌면 같은 편이 되어 아부를 하지만 약자가 챙기면 그 꼴을 못 본다.

어쨌든 그렇게 큰돈을 벌고 사회적 이슈 한가운데에 있는 사내가 앞치마를 두르고 아침을 준비하는데 어찌 평범하게 보인단 말인가.

“이것!”

거실로 들어선 남정욱이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갑자기 오느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아는 분이 하동에서 차 재배를 하는데 조금 보내준 것입니다. 약소합니다.”

유태수는 쇼핑백을 받아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직사각형의 길쭉한 상자였다.

상자를 열자 직경 십 센티미터는 될 것 같은 대나무 통이 한지에 싸여 나온다.

한지를 벗기자 안에 잘 덖어진 찻잎이 가득 들어있었고 유태수는 살며시 코를 가져다 댄다.

흠흠!

코 깊숙이 마른 차향이 스며들었고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런 귀한 선물을.”

사람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남정욱의 눈에 비친 데이브 유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날 밤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냉혹한 사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전혀 딴사람이다.

남의 집에서 아침 대접을 받아 보긴 처음이다.

그것도 대충 차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화려한 아침상과는 거리가 먼 반찬 다섯 가지에 미역국이 전부지만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밥은 많이 있으니 또 드세요.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 합니다.”

멈칫!

미역국을 떠먹던 남정욱이 고개를 들었다.

너무 귀에 익은 소리다.

- 왜 그것밖에 안 먹어?

아침 일찍 채무령을 태우러 간 적이 있었다.

새벽 일찍이어서 식사를 하지 못했는데 아침을 차려주었다.

자리가 어려워서인지 밥을 조금 남겼더니 채무령이 말했다.

-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 하는 거야. 알아? 더 먹어?

채무령뿐만이 아니라 유장풍 회장도 아침을 강조했다.

- 아침은 하루를 시작하는 거야. 아침밥은 하루를 멋지게 보내기 위해 먹는 나의 체력이라고, 아침을 설렁설렁 처먹는 놈치고 인생 성공하는 놈 못 봤어.

그런데 지금 또 한 사람이 아침 식사를 강조한다.

‘가만.’

남정욱은 시금치나물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는 유태수를 보며 눈을 빛냈다.

‘태수!’

그렇지 않아도 그날 이후 이상하게 목소리는 물론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귀에 익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보니 유태수다.

완전 유태수를 닮았다.

남정욱은 공깃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남정욱은 자신이 선물로 가져온 녹차를 내놓았다.

“좋은 차는 물이 좋아야 한다는데 수돗물로 끓여 맛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유태수는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셨다.

“좀 더 일찍 찾아왔어야 하는데 제가 사람의 마음을 읽는 눈치가 더뎌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뭘 하고 싶죠?”

움찔!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되묻자 남정욱은 깜짝 놀랐다.

“하고 싶은 일 하세요. 그것이 좋은 것 아닐까요?”

남정욱은 찻잔을 내려놓고 유태수를 바라보았다.

문득 듣는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같은 말일지라도 큰 차이를 만든다는 걸 깨닫는다.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면 그야말로 백 점짜리 어른일 것이다.

획일화되어 있는 우리의 교육체계에서 하고 싶은 걸 하라는 말이야말로 경이적인 소통이다.

그러나 지금 그 말이 남정욱에게는 소통이 아니라 섬뜩한 얘기다.

하고 싶은 일.

과연 어떤 일을 해야 유태수가 흡족해할까.

유태수는 웃으면서 말했으나 남정욱은 결코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리장도(笑裏藏刀)라는 말이 있다.

웃으며 말하지만 소매 속에 칼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이 상황에서 눈치 있게 행동하지 않고 엉뚱한 짓거리를 했다간 걸어서 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

눈앞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데이브 유는 자신이 겪은 사람 중 가장 무섭다.

자신에게 무서운 사람의 우선순위는 스승에게 배운 본국검을 깨뜨린 상대일 수밖에 없고 그런 면에서 데이브 유가 가장 두렵다.

그런 인물이기에 웃고 말한다고 웃고 대답할 수는 없다.

“하고 싶은 것이 뭡니까?”

다시 묻는다.

재빨리 찻잔을 놓고 일어나더니 한 걸음 물러섰다.

“가르쳐 주시죠. 제가 모자랍니다.”

피식!

유태수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아침 맛있게 먹고 이 무슨 좋지 않은 모습입니까? 좋습니다. 직접 할 일을 모른다고 하니 해야 할 일을 가르쳐 드리죠.”

“예! 예!”

“채무령 이사장에 대해 시작부터 끝까지 보고서를 작성해 가져오세요.”

“네에?”

“채 이사장님의 청소부였잖습니까?”

“그…… 그건 맞습니다만.”

“태천미술관에 소장된 세계적인 미술품과 우리나라의 고서화의 입수 경위 말이오.”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모르는 건 어쩔 수 없죠. 내 말은 아는 것만 정확히 작성하면 됩니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터치하며 물었다.

“계좌번호 불러 보세요.”

갑작스런 계좌번호 요구에 남정욱의 눈이 가늘어졌다.

단번에 경계의 빛이 떠올린다.

돈은 어떤 상황에서도 민감하게 자극하고 다가오는 존귀한 대상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마당에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미 모든 주도권은 데이브 유에게 쥐어져 있고 자신은 그의 지시를 따르고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남정욱은 불안한 얼굴로 계좌번호를 불러 주었다.

유태수는 받은 계좌번호를 핸드폰에 찍어 옮기더니 한참을 조작하고 화면 바꾸기를 반복했다.

디이이이!

남정욱은 갑자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리자 꺼내 살핀다.

갑자기 돈이 입금되었다는 내용이었고 재빨리 거래 은행을 들어가 계좌를 확인했다.

“허허헉!”

동그라미가 너무 많다.

찢어질 듯 커진 눈으로 다시 한번 동그라미를 센 남정욱의 입술이 격하게 떨린다.

“시…… 십억!”

세고 다시 세어도 동그라미는 아홉 개였다.

- 그런 부류의 친구들은 데리고 있는 사람을 굶겨 죽이지 않습니다.

사형 위백수의 얘기가 떠올랐다.

또 본다.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보았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십억이다.

뉴스에서나 보고 채무령 이사장의 입에서 나오는 십억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자신의 통장에 그런 돈이 찍힐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채무령 이사장도 사건 하나를 해결할 때마다 보너스를 주지만 기껏해야 일이천만 원이었다.

퍼어억!

무얼 망설이라는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는 말보다 행동이 필요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라면 무릎이 깨져라 굽히는 것이다.

“채 이사장님 출근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가봐야 할 것 아닙니까?”

재빨리 손목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다.

항상 아홉 시에 출근하니 교통정체가 있을 걸 고려한다면 지금 가봐야 한다.

“제 목숨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바로 드리겠습니다.”

남정욱은 무릎을 꿇은 채 강인한 시선을 던졌다.

유태수는 지그시 내려다볼 뿐이다.

***

출근 준비를 하는데 아버지로부터 호출이 떨어졌다.

“여보, 나도 가?”

아내 구혜주가 묻는다.

“일단 가자고.”

요즘 구혜주도 채무령의 마음에 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부부는 부랴부랴 부모님이 사는 본가로 달려갔다.

마당을 들어서자 아버지 비서 장민혁이 알은체를 했다.

“장 실장, 뭔 일입니까?”

턱으로 집안을 가리킨다.

장민혁이 살짝 웃었다.

“그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데브그루 사건이겠죠.”

데브그루란 이름이 나오자 유종태의 표정이 굳어진다.

당했다.

멋지게 한 방 맞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는 것이다.

적대적 M&A를 암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언론보도는 그동안 잔뜩 경계만 하고 있던 유종태를 충분히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쭈욱 상황을 지켜보던 유종태는 어쩔 수 없이 지분 확보에 나섰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란 없다.

자신들이 소유한 지분과 우호주가 51퍼센트에 미치지 못하는 이상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주식은 뛰기 시작했고 사방에서 덩달아 매수 열풍이 시작되었다.

주가가 오르고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 데브그루는 소유 주식 전량을 매도해 버린 것이다.

“앉아!”

아버지 유장풍은 자리에 누워 침을 맞고 있었다.

가끔 한의사를 집으로 불러 침을 맞곤 하는데 무릎 근처에 집중적으로 침이 꽂혀 있다.

쉰 초반쯤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당시 다친 무릎이 아직까지 말썽이다.

“어떻습니까, 회장님?”

“어떻긴, 좋지.”

“불편하시더라도 20여 분 정도만 참으십시오. 전 바깥에서 있겠습니다.”

한의사가 방을 나갔다.

탁!

방문이 닫혔다.

아버지는 말이 없다.

고슴도치를 떠올리게 할 만큼 오른쪽 무릎에 빼곡하게 꽂힌 침을 보고 있을 때 아버지가 말했다.

“종태야!”

“예, 아버지!”

“언젠가 너에게 이 아비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데이브 유라는 놈이 적이냐, 친구냐 하고 말이다. 기억하냐?”

“물론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그렇게 물었죠.”

“그래, 기억하니 다행이구나. 그때 너의 대답이 무엇이었지?”

“적이라고 했습니다.”

“맞다. 넌 분명히 그렇게 대답을 했지. 그럼 한 가지 물어보자. 적은 무엇이냐?”

“투항하면 살려둘 수가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땐 반드시 괴멸해야 할 상대입니다.”

아버지는 처음으로 누워 고개를 유종태에게 돌린다.

“적의 의미를 그토록 정확히 알고 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아비는 아직까지 적을 살려 둔 적은 없다. 모든 걸 망가뜨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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