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아지랑이(2)
“죽어?”
“교통사고를 위장해 당하고, 강도에게 지갑을 털리면서 칼을 맞았고 가족들과 피서를 갔다가 수영 미숙으로 바다에 빠져 죽었죠.”
“당신은?”
왜 안 죽었냐는 질문이다.
“난 그들이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청소를 했다는 걸 알고 도망쳤습니다. 비행기를 타면 흔적을 남기죠. 나라 바깥은 더욱 살인하기 좋은 장소이기에 고민 끝에 밀항을
선택했습니다.”
“오사카에서 데려왔습니다.”
백기만은 경찰 출신이다.
해양 경찰에 아는 선을 이용해 밀항 조직과 접선했다.
그리고 8년 전 조팔구를 시모노세키 인근 부두에 내려주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추적 끝에 오사카에서 붙든 것이다.
“살인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겠습니까?”
“우리 넷이 한날한시에 동시 공격을 받았습니다. 과연 세상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조팔구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 명씩 시간 터울을 두고 죽이면 눈치를 챌 것이라 판단하여 한 번에 덮친 것입니다. 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탔죠. 택시 운전사가 그쪽에서 보낸 칼잡이였습니다.
천우신조였죠.”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보낸 사람은 누구였죠?”
“태천문화예술원 이사장이오.”
태천문화예술원 이사장이면 어머니 채무령이다.
“그 부분에 대해 좀 자세히 말해 보시죠. 채무령 이사장과 어떻게 만났고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 말입니다?”
“뭐 해, 빨리 말해!”
하봉철이 재촉했다.
8년 전 한 여자가 찾아왔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오는 사람들 거의가 대리인을 보내지 자신이 직접 오지 않는데 채무령은 달랐다.
인사동에 있는 조팔구의 사무실로 턱 하니 들어섰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이미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서 본 얼굴이기에 금방 알아보았다.
- 영릉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영릉이라는 말에 조팔구의 눈이 빛났다.
세종대왕의 릉은 도굴범들에게 있어 기어이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 미지의 장소이자 엘도라도였다.
툭!
채무령이 둘둘 말린 두루마리 한 개를 내놓았다.
달력처럼 말린 두루마리를 펼치자 놀랍게도 약도 하나가 그려졌는데 한참을 내려다보던 조팔구는 깜짝 놀랐다.
- 여…… 영릉.
놀라는 조팔구를 보며 채무령이 말했다.
- 역시 국내 제일 그 방면 전문가답군요.
채무령은 한눈에 간파하는 조팔구를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 여긴 뭡니까?
영릉에서 직선거리로 오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집 한 채가 그려져 있었다.
- 부동산에서 내놨기에 내가 샀어요.
- 하면?
- 감옥이라면 숟가락으로 굴을 파야겠지만 바깥세상이고 첨단 장비들이 즐비하니 넉넉잡고 석 달이면 영릉까지 들어가는 길을 만들 수 있지 않겠어요?
조팔구는 떠억 입을 벌렸다.
조선의 스물일곱 명의 왕 중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의 무덤에 평범한 물건이 들어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왕릉은 일반인들의 묘지와 달라 도굴이 쉽지 않다.
- 전문가라던데 모르나 보죠?
- 뭘?
- 훈민정음 해례금지(訓民正音 解例金紙).
훈민정음해례본이라는 것이 있다.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거쳤으며 어느 원리에 바탕을 뒀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이 있다는 건 역사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한글에 대한 여러 설들과 구구한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다 안동에서 발견되고 현 간송미술관을 만든 전모 씨가 구입해 소장하면서 한글의 위대함이 증거로서 나타난 것이다.
어쨌든 국보로 지정되었고 한참이 지나 상주본이라고 하여 어느 민가를 허물다 발견되었는데 이 해례본을 갖고 소장자와 국가 간의 다툼이 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훈민정음 해례금지는 또 무엇인가.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 죽자 관속에 넣은 황금 종이로 된 해례본을 만들어 넣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름깨나 알려진 보물들은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고미술품에 해박한 조팔구는 소스라쳤다.
- 꺼내오면 10억을 드리죠. 물론 착수금으로 절반 5억을 주고.
십억이라는 말보다 착수금 5억에 놀란다.
아직까지 그런 거액을 받고 누군가의 일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케이 하자마자 10분도 되지 않아 자신의 통장으로 현금 5억이 들어왔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 도굴을 한다.
그 방면에 전문가 세 명을 불러 계획을 세웠고 오백 년을 잠든 대왕의 능 속으로 들어갔다.
저녁 식사 자리다.
많은 고기를 먹고 맛을 봤지만 단언컨대 이렇게 환장하게 살살 녹는 숯불구이는 처음이다.
오사카에서도 숯불구이는 있다.
하지만 지금 먹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밀항은 했지만 항상 쫓기는 자의 신세가 되어 먹는 음식이란 결코 황홀할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모든 신변을 데이브 유가 책임진다고 했고 믿을 만한 여러 증거들을 보여주었으며 특히 백기만이 안심하라고 했다.
현역 시절 백기만은 강력계 근무를 하여 도굴범죄의 우두머리인 조팔구와 만난 일은 그다지 없었다.
단지 백기만의 악명은 들었다.
경찰이라기보다는 일본 헌병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조사과정에서 폭언과 구타와 고문이 사라졌지만 백기만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건 누구에게도 백기만은 고발을 당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법정에서 어느 범죄자도 백기만의 강압적인 폭언과 구타가 두려워 시인했다는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백기만이 부하 직원처럼 굽신거리는 데이브 유의 말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는단 말인가.
마음이 편하니 갈비가 더욱 맛있는 것이다.
***
느낌이라는 것이 있다.
초식동물은 24시간 육식동물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살아온 피식자에게는 어떤 짐승도 따르지 못하는 감각을 지닌다.
육식동물의 사냥 성공률이 삼십 퍼센트를 넘지 못하는 건 바로 오랜 세월 위험 속에 살다 보니 발달한 피식자의 그런 감각 때문이다.
포식자로 살아 어느 한순간 피식자 신세가 된 유태수 또한 그러했다.
그의 온몸이 일어선다.
목덜미와 머리카락이 빳빳해지고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이 매우 좋지 않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
“차 세워요.”
대리를 불러 올라가던 유태수가 계곡 다리를 건너기 직전 얘기했다.
“여기에 말입니까?”
“한쪽으로 잘 세워요. 다른 차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대리기사는 차를 길가에 바짝 붙여 세우고 내렸다.
유태수는 지갑에서 오만 원권을 건네고 거스름돈을 거절했다.
“감사합니다!”
대리기사의 고개가 숙어지고 어둠 속으로 부지런히 걸어 내려간다.
딸칵!
대리기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있던 유태수는 말보로 레드를 꺼내 한 개비 꺼내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길게 빨아들인 연기를 뱉으며 흘긋 어둠 속 산비탈에 있는 집을 바라본다.
모두 단독주택들이다.
그러다 보니 골목도 폭이 넓고 여러 공간이 여유 없는 도심과는 다르다.
부우웅!
그때 차량 한 대가 다리를 건너 들어가고 잠시 후 유태수는 트렁크를 열었다.
느릿하게 트렁크가 열리고 유태수는 바닥에 깔린 매트를 들어 올렸다.
매트를 들어내자 배달부 배덕용이 선물로 준 대나무가 있다.
대뿌리 부분을 잘 다듬고 말려 완벽한 한 자루 칼을 만들었는데 스스로 이름을 죽포자라고 지었다.
죽포자(竹包刺).
스으으!
슬쩍 칼을 빼 보았다.
짙은 어둠이 밀려날 만큼 칼날에서 섬뜩한 은빛 광채가 뻗어 나온다.
놀라운 칼이다.
모든 걸 잘라버린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묻지는 않았으나 웬만한 철판도 뚫고 자르는 예리함을 갖고 있다.
마치 전설 속 용천검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툭!
담뱃불을 바닥에 버리고 구둣발로 비벼끈다.
그리고 오른손에 죽포자를 쥐고 다리를 건너 오르막길을 걸어갔다.
골목은 조용했다.
시간이 깊어 불이 꺼진 집들이 더 많았고 멀지 않은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흑곰.’
지금 짖는 개의 이름이다.
견종은 진돗개이며 아주 드물게 온몸이 검은색 털로 덮여 있다.
가끔 주인과 함께 산책을 나가는 흑곰을 만났는데 처음에는 경계하는 듯했지만 이후로는 꼬리를 치며 부드럽게 다가왔다.
흑곰이 길고양이 따위를 보며 흥분하여 짖을 리는 없다.
흑곰의 주인 말을 들으면 웬만한 동네 사람들은 모두 기억한다고 했다.
즉, 짖을 일이 그다지 없는 것이다.
피식!
유태수는 살짝 웃는다.
사내들이 아무리 몸을 잘 숨기고 있다고 해도 흑곰의 감각을 속일 수는 없다.
흑곰이 살기를 품은 낯선 사내들이 숨어 있다는 걸 자신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걸 알기는 할까.
휘익!
유태수의 집은 골목 끝에 있다.
그곳까지 올라가는데 세 블록, 즉 좌우로 세 곳의 골목이 교차로처럼 뻗어 있는데 마지막 세 번째 교차로를 지나자마자 왼쪽 집 담장으로 몸을 날렸다.
빈집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아니라 은퇴한 부부인데 보름 전 프랑스에 사는 큰딸 집에 들른다며 출국했다.
불거진 빈집 마당을 가로질러 또 하나의 담벼락을 넘는다.
바로 자신의 집과 담벼락을 대고 있는 아랫집이다.
자는 듯 조용했고 번개처럼 넓은 마당을 달려 세 번째 담벼락을 넘어 자신의 집으로 들어섰다.
CCTV가 있으니 집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우우!
유태수는 길게 숨을 내쉬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킨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랐고 세 곳의 높은 담장을 넘어서인지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툭!
양복 상의 단추를 풀었다.
움직임이 좀 더 자유로워진다.
스으윽!
칼을 뽑는다.
그리고 엉덩이 뒤쪽으로 바짝 붙여 숨긴 뒤 잎이 우거진 목련나무 아래로 숨었다.
‘하나!’
대문과 골목 쪽을 바라본다.
‘둘, 셋, 넷.’
기척으로 사람의 숫자를 헤아린다.
네 명이 전부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사내들은 그다지 군대에서처럼 매복하며 적을 기다리거나 하는 일촉즉발의 신중함은 없었다.
왔다 갔다 하는 듯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누군가는 흡연을 하는 듯 담배 냄새가 난다.
사사삭!
이동하고, 움직이는 것이 마치 이라크에서 메헤 부사 하라이, 사막의 요람 소속 테러범들과 교전할 때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나라처럼 우거진 숲이 아닌 산악지역에서 교전할 때는 누가 빠르냐에 승패가 갈린다.
이곳에서 쏘고 저곳으로 이동하는 10여 미터의 거리는 이른바 군에서 배운 지그재그로 뛰며 적진을 향해 다가가는 약진 앞으로 훈련이 큰 도움을 주었다.
처억!
대문 바로 밑이다.
자세를 낮추고 다시 한번 귀를 세웠다.
“몇 시냐?”
“열두 시 반!”
“이거 오늘 안 들어오는 것 아냐?”
“뭣이 걱정이냐. 오늘 안 들어오면 내일 잡으면 될 일을.”
느긋한 사내의 대답에 먼저 시간을 물었던 사내가 피식 웃는다.
“꼭 그럴 때 보면 해탈한 땡중 같다니까.”
“말 안 했냐? 나 원래 꿈이 중 되는 거였어.”
대문 앞에 두 명이 있고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입구에 두 명이다.
“어디가?”
“저 개새끼 좀 어떻게 안 될까? 쏘세지에 쥐약 묻혀 던지면 바로 문다는데 씨발!”
“뭐 하려고?”
“무슨 수를 내야지, 시끄러워서.”
사내 한 명이 간헐적으로 짖는 흑곰이 신경 쓰이는 듯 골목 입구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