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작업(1)
스으윽!
유태수는 붉은 벽돌로 된 담장 끝을 잡고 지면을 박차며 도약했다.
철봉에 올라서는 것처럼 양손을 짚고 담벼락 위에 섰다.
딸칵!
한 사내가 대문 오른쪽에서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고 있었다.
쉬익!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지면에 발이 닿는 작은 소리에 사내가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푸우욱!
유태수의 칼이 사내의 복부를 파고들었고 왼손은 입을 틀어막는다.
유태수는 칼을 복부에 박은 채 사내를 질질 끌어 담벼락에 밀어붙이고 한 번 더 꽂는다.
푸욱!
천하에 없는 장사도 칼을 맞으면 소릴 지르지 못한다.
물론 칼을 맞을 때 비명 정도는 낼 수 있지만 칼을 맞았는데 소리를 질러 적의 침입을 동료에게 알린다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물론 백 퍼센트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인간의 본능은 아픈 내 몸에 더 집착하게 되어 있고 칼이 내장을 뒤흔들어 버리면 거의 정신줄을 놓는다.
털썩!
사내는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대로 담벼락을 타고 주저앉았다.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내 멀리 던져 버렸다.
“이 새끼, 오늘 안 들어오면 내일 올 때는 반드시 쥐약 사 온다.”
그때 흑곰을 어쩌지 못하고 사내가 씩씩거리며 걸어왔다.
콰악!
산 쪽으로 주차되어 있는 차량 뒤에 숨어 있던 유태수가 득달같이 튀어 나갔다.
사내는 흠칫했고 본능적으로 물러나려 했지만 유태수의 오른손에 들린 칼이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욱!”
파앗!
유태수는 재빨리 휘청거리는 사내의 입을 틀어막으며 아랫배에 깊숙이 칼을 꽂아 넣었다.
사내의 입은 유태수의 손에 막혔지만 두 눈을 뜨고 있었다.
“조용히 있으면 내일 아침 해는 볼 수 있을 거야.”
사내를 끌어다 주차된 차량 뒤로 밀어 넣었다.
퍼억!
사내는 힘없이 엎어졌고 꿈틀거릴 뿐 일어나지를 못했다.
잠시 꿈틀거리는 사내를 바라보던 유태수는 이번에도 핸드폰을 찾아 산 위로 던져 버렸다.
유태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감각에 잡힌 네 명 중 둘을 정리했으니 남은 사내는 골목 입구에 있는 둘이다.
뚝뚝!
늘어뜨린 칼끝을 타고 피가 흘러내린다.
‘차에 있군.’
꺾어지는 코너에 검정 승용차 한 대가 있었는데 차 안으로부터 빨간 불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는데 담배 불이다.
그러면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듯 킬킬거리며 웃는다.
‘군대로군!’
다른 한 사내는 입구 어귀에 서 있다.
즉 차 안에 있는 사내는 오늘 밤 작전의 리더로 보인다.
되도록 발소리를 죽였지만 일부러 살금살금 다가가지는 않았으므로 골목 어귀에 있는 사내가 돌아보았다.
가로등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밤에는 단 한 개의 가로등도 없다.
필시 사내들이 자신들의 작전을 위해 고의로 전등을 깨뜨렸을 것이 뻔했다.
자신들이 득을 얻고자 파손한 가로등이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악재가 되고 있었다.
골목 어귀 사내는 가까이 다가갔지만 얼른 알아보지는 못했다.
단지 동료 같아 보이지는 않는 듯 똑바로 쳐다본다.
“누구?”
누구냐고 채 묻지도 못했다.
질문보다 칼이 더 빨랐고 뭔가 번쩍하는가 싶더니 뜨거운 기운이 배 속을 파고든다.
“크훅!”
푸푸푹!
연거푸 칼질을 두 번 더 한 유태수가 번개처럼 돌아섰다.
승용차 운전석에 앉아 통화를 하던 사내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간파하고 문을 열고 나오려고 했다.
콰앙!
유태수의 오른발이 열린 문을 찍듯 걷어찼다.
“으악!”
한쪽 다리는 땅바닥을 짚었고 상체는 반쯤 나온 상태에서 문이 닫히자 비명을 지른 것이다.
퍼억!
퍽!
유태수는 연거푸 차 문을 찍어 찼다.
사내는 온몸을 떨며 고통스러워했는데 유태수가 문을 열자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쿵!
사내는 땅바닥에 나뒹굴었는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유태수는 두 사내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아 꺼냈다.
툭!
길바닥 한쪽에 던지듯 놓고 차 문에 끼어 나동그라진 사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날 너무 쉽게 봤군요?”
사내는 그제서야 내려다보고 있는 유태수를 발견했다.
“데이브…… 유.”
“사람들이 그러는데 호랑이는 토끼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호랑이와 토끼 사이라는 건 아니고.”
유태수는 지그시 웃었다.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너무 쉽게 봤다.
그리고 자신들의 실력을 지나칠 만큼 과신했다.
더구나 수적으로도 워낙 우세하였기에 느긋한 사냥을 상상했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당했다.
“119죠? 여기 구기동 23번지.”
유태수는 피를 흘린 부상자가 발생했다면서 119에 전화를 걸었다.
사내 임동술의 눈이 더욱 커진다.
무슨 생각일까.
이런 일에 119나 경찰이 개입해서는 절대 안 된다.
스윽!
두 개의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더니 한 개비 건넨다.
임동술은 담배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 입에 물었다.
몸을 일으켜 차에 상체를 기댔는데 왼 손목이 부러진 듯 축 늘어뜨리고 있었고 정강이에서 흘러내린 피가 지면을 적시고 있다.
후우!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만 피웠다.
지이잉!
한쪽에 던지듯 놓아둔 전화기 한 대가 불이 들어왔다.
「형님」
이라는 글씨가 화면에 뜬다.
유태수는 핸드폰을 주워 왔다.
“내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다고 하세요. 평소처럼 무척 차분하게 말입니다.”
그러면서 피 묻은 칼을 임동술의 왼 손목에 뭔가 썰 것 같은 각도로 붙였다.
움찔!
허튼짓하면 손목을 잘라 버리겠다는 경고다.
스윽!
자신이 통화 버튼을 터치하여 임동술에게 건넨다.
“인마,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죄송합니다…… 형님!”
“왜, 아직 안 와?”
임동술은 흘긋 자신의 왼 손목에 대어져 있는 피 묻은 칼을 보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손목 하나가 잘려 나가면 이 바닥에서는 무조건 은퇴다.
아직 떠날 마음도 없고 그럴 때도 아니다.
몇 년만 기천수 밑에서 잘 견디면 조그만 사업체 하나 불하받을 수 있다.
정 안되면 술집이라도 강남에 뿌리박으면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다.
손목이 날아가는 즉시 그 모든 꿈이 거품으로 사라질 것이기에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눈치챈 것 아냐?”
“그럴 리는 없습니다.”
“쉽게 볼 놈이 아닌데…… 그러지 말고 오늘은 그냥 철수해라.”
“알겠습니다.”
“가게로 들어와!”
“예!”
전화가 끊어졌다.
딸칵!
툭!
유태수는 담뱃불을 구둣발로 비벼껐다.
이어 조수석 문을 열고 임동술을 구겨 넣듯 태웠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핸들을 잡더니 차를 돌려 골목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쯤에 이르렀을 때 119가 급히 올라오고 있었다.
부우웅!
차는 내리막길을 달려 도심으로 스며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부러진 왼손은 자연스럽게 내렸고 피를 흘리던 정강이는 바지에 가려졌다.
건물 지하 1층이 전부 도박장이다.
“형님!”
임동술을 보며 정장을 한 사내 오칠성이 아는 체를 했다.
임동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으며 태연한 표정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임동술이었기 때문에 오칠성은 약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같이 들어서는 유태수를 바라보았다.
이곳을 출입하는 손님들 얼굴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입구에서 신원 검색을 하며 일차로 거르는데 통과하는 걸 보면 임동술이 보증인인 모양이다.
‘어마어마하군.’
미국에서 대학 생활을 할 때 카지노를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다.
화려함은 물론 방대한 규모가 그곳 특급 카지노 못지않았는데 유태수는 경이로운 표정을 했다.
당연히 불법일 것이다.
들어오면서 보았지만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슬롯머신과 파칭코를 즐기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족히 육칠백 명은 되어 보인다.
이 많은 사람들 중 분명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았을 리 없다.
돈을 잃었거나 아니면 업장과 충돌로 앙심을 품고 충분히 제보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영업이 성행하는 걸 보면 지역 파출소나 경찰서 정도로는 절대 터치를 할 수 없는 고위급과 소통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태극동지회(太極同志會).
경험할수록 흥미로운 집단임은 틀림없었다.
유태수는 남의 게임판을 기웃거리고 그 판을 이겨 칩을 쓸어가는 사람에게는 박수까지 쳐 준다.
“브라보!”
마치 자신의 승리라도 되는 듯 환호성까지 지르는 유태수를 보며 임동술은 이마를 찡그렸다.
출발하는 순간 속으로 실컷 웃었다.
유태수가 기천수가 있는 이곳 카지노 도박장으로 안내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넌 끝났어, 개자식아.’
그곳은 호굴(虎窟)이다.
누구든 들어가면 자신의 뜻이나 의지대로 할 수 없다.
걸어 들어갔다가 관에 담겨 나온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도피 30년 만에 체포된 메시나 데나로 이탈리아 마피아 우두머리는 자랑스럽게 말한 적이 있다.
- 내가 죽인 시체만 모아도 공동묘지 하나를 충분히 만들 것이다.
그의 말을 태극동지회로 옮긴다고 해도 절대 가혹하지는 않다.
엄청난 경쟁 조직들이 사라져 갔고 그 와중에 벌어진 전쟁의 희생자는 한두 명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다.
정치권과 경찰과 검찰은 물론, 우리 사회 구석구석 태극동지회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우리 사회의 가장 강력한 권력 집단은 청와대였다.
하지만 어느 대통령의 말처럼 시장으로 권력이 이동했다.
돈 많은 재벌들이 정치인의 생사를 쥐락펴락하다보니 생겨난 말이었다.
그 재벌들의 청소를 도맡는 곳이 태극동지회다.
출발은 청부업자거나 하청업자 정도의 미세한 존재였지만 청소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약점을 쥐게 된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본의 아닌 공존공영이 불가피해졌다.
어쨌든 그런 태극동지회 소굴 중 한 곳으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마치 카지노장에 놀러 온 사람마냥 흥겨워했다.
‘꿈틀!’
지나치게 여유가 있다.
아니, 여유를 넘어 조금은 모자라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인간이 변한 환경 속에서도 눈치를 채지 못한다는 건 두 가지 이유뿐이다.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바보거나.
데이브 유가 바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 안에서 뭔가 믿는 구석은 더욱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기습이었든 속임수였든 부하들 세 명을 순식간에 해치워 버리는 걸 보면 육체적 능력이 평범해 보이지는 않지만 여긴 어떤 힘도 통하지 않는 곳이다.
‘웃기는 새끼네.’
바보천치가 아닌 이상 적진으로 혼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지켜보고 살펴도 더 이상 경계할 구석은 찾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이 지나칠 만큼 조심스러운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짜증이 확 솟구친다.
“칠성아!”
정장을 입고 업장을 돌아다니던 오칠성이 달려왔다.
“예. 형님!”
“저 새끼 잡아라.”
“누구요?”
“저 새끼, 나와 같이 들어온 놈. 저 씨발놈을 잡아 사무실로 끌고 오라고.”
“형님!”
같이 입장한 사람을 잡아 오라고 하자 오칠성이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은 모양이었다.
“넌 한국말도 못 알아듣냐? 저 새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구경하고 다니는 저 새끼 잡아 오라니까?”
“알겠습니다.”
오칠성은 유태수를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