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99화 (99/122)

99화 이래도 버틸 거요(1)

목숨을 걸고 같이 싸우는 전우야말로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 진한 것이다.

“왜 태천그룹에 그토록 집착합니까?”

설태왕의 질문은 이어졌다.

태천그룹 말고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는 기업은 지천이다.

물론 대기업을 상대로 투자하면 세상의 주목을 받기 때문에 헤지펀드의 성향, 즉 조용히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성공을 하면 워낙 판이 큰 곳이기 때문에 묵직하게 주머니를 채울 수가 있는 것이다.

설태왕이 겪어본 데이브 유는 배포가 크다.

잔돈푼에 연연하지 않는다.

한판을 먹어도 제대로 먹는 스타일이다.

그런 성격이 태천그룹을 노리는가 했는데 근래 들어 생각해보니 여기저기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태천과 한국대표 기업 자리를 다투는 삼왕그룹도 있고 시가총액에서는 다소 밀리지만 백산그룹과 성운그룹도 작전에 들어가면 태천에 버금가는 수익을 낼 수 있다.

그런데 가장 큰 태천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드르륵!

창문을 열고 천장의 환풍기를 켜더니 담배를 피워 문다.

후우우!

말보로 레드의 푸른색 연기가 사무실에 퍼지기 시작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란 말을 들어 봤습니까?”

“압니다. 중국 전국시대에 오나라 손무라는 사람이 지은 병법서에 나오는 말 아닙니까?”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상대와 나의 약점과 강점을 충분히 알고 승산이 있을 때 싸움에 임하면 이길 수 있다는 애기인데, 고전이지만 오늘날 세상을 경영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고 지도자라면 한 번쯤 암기하듯

읽어 둘 필요가 있다는 필독서다.

한국인은 유태인 삶의 지침서라는 탈무드를 대단하다고 보는 반면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서는 중국의 병서 손자를 훨씬 높이 평가한다.

“태천그룹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태천그룹을 상대로 판을 벌이는 것이고?”

대답은 없다.

그건 그렇다는 긍정이다.

설태왕이 미소를 지으며 남은 커피를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님, 내가 펀드 매니저라는 것 좀 알아주세요.”

펀드 매니저야말로 지피지기 백전불태를 추구하는 사내들이다.

상대를 알지 않고서는 절대 베팅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공격할 대상을 당사자보다 더 잘 알아야 하는 부류가 펀드매니저들이다.

그렇게 많은 수익을 올리려면 그냥 지피지기 백전불태 정도 갖고서는 어렵다는 뜻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지피지기 정도 가지고는 10조를 넘는 거액을 벌기 힘들지.’

자신은 지피지기를 넘어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자신이 공격하면 아버지가 어떤 전략으로 방어할지, 큰형이 동원할 수 있는 전술은 물론 누님들과 매형들의 반응까지도 거울 보듯 알고 있다.

한 마디로 저들은 자신을 모르지만 이쪽에서 저쪽은 훤히 알고 있으니 싸움이 될 리는 없었다.

부욱!

담뱃불을 끈 유태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침보다 구름이 더욱 낮아졌다.

오늘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강수량이 10mm 내외라고 했지만 서울 하늘을 덮고 있는 구름의 높이가 심상찮다.

저 멀리 남산 타워는 보이지도 않는다.

‘비가 오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콰아앙!

천둥 번개와 장대비다.

아직 아홉 시도 되지 않았는데 예상 강수량 50mm는 훌쩍 넘겼다.

인터넷에서는 기상청을 성토하는 비난 댓글이 쏟아졌다.

아무리 지구 온난화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맞추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

슈퍼컴퓨터만 있으면 거의 맞출 것처럼 하더니 사줬는데 이게 뭐냐.

서울 일부 지역은 이미 80mm를 넘겼다는 소식이 왔고 그제서야 기상청은 서울 경기 인천 지역에 호우경보를 발령했다.

10mm 내외에서 많은 곳은 200mm도 넘을 것이라는 예보가 나온 것이다.

신호등에 차를 세웠다.

와이퍼가 정신없이 돌아가는데도 쏟아지는 빗물을 제대로 쓸어내지 못했다.

자꾸 시야가 흐려지다 보니 답답하다.

신호에 걸렸으므로 와이퍼도 잠시 멈추고 싶지만 순식간에 쏟아지는 빗물로 전방 신호등이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계속 돌려놔야 했다.

아직은 빨간 불이고 횡단보도 초록 불이 깜빡거리며 움직인다.

팟!

신호가 바뀌었다.

덜컹!

막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뒷문이 열렸다.

타악!

강한 비바람과 함께 시커먼 사내가 올라타더니 출발할 것을 요구했다.

비옷을 입고 후드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는데 도무지 잠긴 문이 어떻게 열린 것인지, 그리고 누군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뚝!

뚜두둑!

빗방울이 차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사내가 후드를 벗었다.

“으허허허!”

곽철종은 기겁했다.

데이브 유다.

빵빵빵!

“뒤차가 빨리 가라고 빵빵거립니다.”

놀라지 말고 운전 제대로 하라는 말이다.

부우웅!

그나마 아는 얼굴이라는 것에 안도하면서 핸들을 잡고 속도를 높인다.

왔다.

기어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그동안 김평대와 전주식을 제거한 범인이 자신 앞에도 나타날 것이라 확신했다.

물론 그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항상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갖고 다녔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접근이 있을 때는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조용했고 그러면서 마음의 긴장도 약간씩 누그러졌다.

특히 그동안 치밀하게 데이브 유의 생활을 밀착 감시했지만 어디에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용의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심증은 가지만 언제까지 감시할 수는 없다면서 2주 전 모든 걸 해제했다.

그에 따라 자신도 조금 마음을 놓았는데 이렇게 예상 못한 장소에서 생각 못한 방법으로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쏟아지는 폭우에 가려 근처에 CCTV가 있다고 해도 정확히 분별할 만큼 맑은 화면으로 찍혔을 리는 만무했다.

더욱 비옷을 입어 정체 식별은 불가능하다.

이런 악천후를 이용한 접근 방법까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곳이 없을 만큼 완벽했다.

“기다리고 있었을 테죠?”

후드를 벗은 유태수가 미소를 지었다.

“내게 잡혔을 것에 대비해 준비한 것도 있을 테고.”

움찔!

독심술사처럼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벽제 알죠?”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룸미러를 통해 바라보자 다시 말했다.

“화장터 있는 벽제 말이오.”

설마 산 사람을 태워 없앨까.

그러나 화장터라는 말이 귀에 즐겨 들리지는 않는다.

부우웅!

차는 빗속으로 사라졌다.

죽음 앞에서 당당한 사람은 없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포이며 가급적 피하고 싶은 일이다.

목숨이 한 개뿐인 이상 죽음과 정면승부를 벌일 용기와 배짱은 절대 갖고 있지 않다.

살아났지만 기쁘지 않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회사의 비밀을 발설한 대가로 목숨을 구한 것이다.

끼이익!

곽철종은 달리는 차를 멈춰 세웠다.

새벽 두 시의 지방도로는 차량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짙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벅벅벅!

와이퍼 돌아가는 소리가 조용한 차 안을 울린다.

담뱃불을 붙이고 유리를 약간 내렸다.

워낙 빗줄기가 거세다 보니 차 안으로 치고 들어왔으나 아랑곳하지 않는다.

주륵!

빗물이 아니다.

눈물이다.

곽철종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태어나 이토록 공포에 빠져보긴 처음이다.

데이브 유.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가족은 물론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 집과 생년월일, 여동생과 바로 위 형님 집까지 훤히 꿰고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다.

조카들이 다니는 학교와 무슨 학원에 다니는지까지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에 더 이상 어떤 저항도 꿈꿀 수 없었다.

- 아드님 꿈이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라더군요.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는 아들의 피아노 재능이 범상치 않다.

본인도 좋아하고 주위에서 피아노 천재라는 소리를 그냥 뱉어낼 정도로 같은 또래에서는 압도적이다.

- 열심히 하여 쇼팽 콩쿨에 한 번 나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뜻을 거역하면 아들의 앞길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경고다.

모든 부모에게 가장 큰 공포는 자식에게 찾아드는 어떤 불행일 것이다.

증거는 없지만 김평대를 죽여 택배로 보낸 사람이고 아이 입학식에 참석한 전주식은 머리를 깨 죽였다.

진짜 무서운 점은 증거 하나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미줄처럼 빼곡한 CCTV를 완벽하게 따돌린 행동은 가히 신기라고 할 수 있었다.

-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암호명 제5의 과일이죠.

- 으악!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국정원에 다닌다고 하여 내부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알지는 못한다.

각 부처, 각자가 맡은 일 아니면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아서도 안 된다.

단지 자신이 제5의 과일에 대해 들었던 건 프로젝트가 국내 파트에 의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우우!

담배 연기가 창문 틈으로 빠져나간다.

충격적인 건 모든 것이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설계하고 완벽한 연출로 자신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으려는 데이브 유 감독, 데이브 유 극본, 데이브 유 주연.

그런데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김평대와 전주식을 죽인 건 이라크에서의 보복이 맞다.

하지만 단순히 보복 차원에서만 죽인 건 아니었다.

김평대의 시신을 택배라는 방법으로 보내고 전주식을 아들 학교 화장실에서 주먹으로 때려죽인 수법은 그들과 같이 데이브 유를 죽이려고 했던 곽철종에게 몸서리치는 공포를 전달하려는

의도였다.

복수에 한 가지 더 목적을 넣은 것이다.

그 바람에 곽철종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회사 규정을 어기고 장전된 권총을 차고 다녔을까.

실제 작전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권총 휴대는 불법이다.

법을 어기는 직원은 거의 옷을 벗어야 하는데 설혹 벗지 않아도 정보기관에서 출세할 생각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만둘 각오를 하면서까지 목숨을 지키기 위해 불법을 자행했는데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자신을 노리고 세운 계획이라는 말에 영혼이 털린 기분이다.

한데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통제되지 않을까 봐 온 가족 형제 부모들 신상까지 거머쥐었다.

조카들 생일까지 아는 부분에서는 거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후우우!

땅이 꺼진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든가, 아니면 계속 회사에 다니든가.

- 난 절대 독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유일한 위로이나 아주 작은 희망을 발견했다면 그 말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혼자 잘 먹고 잘사는 일은 없다고 하면서 공존공영을 강조했다.

부우웅!

수차례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데 핸드폰 알람이 떴다.

은행 입금 계좌 알람이다.

이 깊은 새벽에 무슨 은행 통장 알람일까 하다 불쑥 보이스 피싱 생각이 떠올랐다.

요즘에는 전화나 문자를 이용하는 보이스 피싱은 구시대적 유물이라는 뉴스를 들은 적이 없다.

어떻게 알았는지 통장과 카드 비밀번호까지 알아내어 모든 돈을 싹 쓸어가 버린다.

경찰은 은행 직원이 연루되지 않고서는 힘들다는 판단에 수사를 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증거는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

“으악!”

동그라미가 너무 많다.

“시이이입억.”

십억이다.

세고 또 셌지만 찍힌 동그라미는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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