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102화 (102/122)

102화 죽다 살아난 사람들(2)

사람들은 유종태가 변했다고 한다.

위기 때 결단력이 부족하고 추진력에 문제가 있다고 수군댔지만 지난 일이 년 사이 확 달라졌다는 것이 공통된 시선이다.

결정하면 밀어붙인다.

안되는 것이 어딨느냐고 소리친다.

현장에서 산재 사고가 발생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공사를 계속 진행시킨다.

공격적이고 거칠어졌다고 한다.

더 이상 미지근한 행동으로는 유장풍의 뒤를 잇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과감한 체질 개선을 도모하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여의도를 자주 찾고 다른 재계인사들과도 수시로 소통한다.

“오 팀장!”

유종태가 고개를 들어 오도석을 바라보았다.

“예! 사장님!”

“자동차 노 사장님 사표 받으세요.”

“헉!”

“사…… 사, 사표!”

실내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란다.

“우리 회사의 정년퇴직이 몇 살이오?”

갑자기 정년을 묻자 오도석의 표정이 굳어졌다.

몰라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다.

“일반 직원은 부장까지 포함하여 58세이고 임원급은 63세입니다.”

“노 사장 나이가 올해 몇이오?”

유장풍의 친구이며 창업 동기이다.

“일흔일곱입니다.”

“무슨 회사가 요양병원에 들어앉아 있어야 할 노인을 월급 주며 데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회복지 사업체입니까?”

노골적으로 쫓아내라는 뜻이다.

“회장님 퇴원하시면 그때 결정하는 것이…….”

“왜? 난 하면 안 됩니까? 지금 태천그룹의 최종 결재권자는 나 유종태입니다. 내가 하는 인사가 곧 아버지 뜻이기도 합니다.”

오도석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왜 말이 없죠? 내 말이 우습게 들려요?”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오도석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한쪽에 앉은 유동풍의 입술이 말려 올라간다.

뭔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이거야말로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 아닌가.’

감히 청하지는 못하나 원래부터 바라던 바라는 뜻이란 의미다.

앞장서 행동하지는 못해도 진심으로 눈앞의 결과를 바라고 원했다는 뜻인데 노기술의 사표야말로 유동풍이 제일 바라던 일이었다.

자신도 창업 동기다.

형님 유장풍을 도와 온갖 궂은일 뒷바라지에 몸을 던졌다.

모든 사업의 초창기는 더러워진다.

더러울 수밖에 없다.

그 더러움을 씻고 닦아내는 청소부 역할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형님의 성공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수고의 대가를 노기술이 얻어가고 있었다.

형님 친구였기에 불만이 있어도 참고 어떻게든 노기술에게는 깍듯했다.

사장님 동생이라고 대충 어영부영한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더욱 앞장섰다.

그야말로 새벽 별을 보고 나가 저녁 별을 보며 퇴근했는데 항상 결과물의 첫 번째는 노기술의 몫이었다.

- 가서 일하지 않고 뭐 하러 왔어?

- 기술이 자네가 없었다면 난 지금 여기 있지 못했을걸.

- 나 안 죽어,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가서 일해. 대한민국 최고 기업으로 키우려면 목숨 걸어야 해.

과로로 쓰러진 노기술을 찾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위로하던 유장풍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형님이 맞는가 싶을 만큼 무지막지했다.

- 네 눈에는 이것이 제대로 된 공사라고 보이냐?

- 같은 밥 처먹고 넌 왜 항시 그 모양이야?

- 아프면 그만둬야지.

공사장에서 발목을 삐끗하여 이틀 무단결근을 했더니 전화를 걸어와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잔정이 없는 형님이라는 걸 인정하고 타고난 성품이라는 걸 알지만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혔다.

“왜 안 되는 겁니까?”

십오 년 전, 지금도 잊지 않는 그 날은 음력 칠월칠석이다.

은하수 양쪽 둑에 있는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이 1년에 1번 만난다고 하는 전설에 따라 별을 제사 지내는 절기다.

옛날에 견우와 직녀의 두 별이 사랑을 속삭이다가 옥황상제(玉皇上帝)의 노여움을 사서 1년에 1번씩 칠석 전날 밤에 은하수를 건너 만났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 까치와 까마귀가 날개를 펴서 다리를 놓아 견우와 직녀가 건너는데, 이 다리를 오작교(烏鵲橋)라고 한다.

칠석 때는 더위도 약간 줄어들고 장마도 대개 거친 시기이나, 이때 내리는 비를 칠석물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호박이 잘 열고, 오이와 참외가 많이 나올 때이므로 민간에서는 호박부침을 만들어 칠성님께 빌었다.

또한 칠월칠석은 유장풍의 생신이기도 했다.

온 가족과 일가친척 모두가 모였다.

유씨가문의 번창을 기원하며 수많은 정·재계 인사들이 화환과 축전을 보내고 대통령은 직접 방문까지 했었다.

한껏 고무된 유장풍은 적지 않은 술을 마셨고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것으로 판단한 유동풍이 입을 열었다.

“형님, 다시 한번 생신 축하드립니다. 만수무강 하십시오.”

“고맙구먼. 동생도 적은 나이가 아니야. 건강 잘 챙기라고.”

“형만 한 아우 없다고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건강은 형님에게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그건 그래. 어려서 자넨 감기 한 번 안 걸렸지. 자, 자네도 한 잔 받지.”

형님이 건네주는 술을 두 손으로 받은 뒤 유동풍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형님! 자동차를 한번 맡겨 주시죠.”

당시 태천의 주력은 중공업과 자동차 전자였다.

지금은 일본 자동차에 약간 밀리는 형국이지만 그때만 해도 도요타니 닛산이니 하는 일본 자동차들이 태천 자동차의 팔십 퍼센트 수준밖에 접근하지 못했다.

디자인은 물론 내부 기술까지 태천이 앞섰다.

물론 지나친 자신감이 잠시 방심을 낳았고 오늘날 위치가 바뀌었지만.

탁!

술잔을 마시려던 유장풍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때까지 만면에 웃음을 가득 짓고 많은 사람들과 호방하게 얘길 나누던 유장풍의 얼굴에 얼음이 끼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자동차를 한 번 맡겨 달라고 했습니다. 맡겨만 주면 일본 자동차를 다시 추월할 자신 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한마디로 잘라 버렸다.

“자동차가 어떤 분야인지 알아? 무려 삼만 개가 넘는 부속품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리고 한 몸을 이뤄 움직인다. 그만큼 자동차처럼 첨단 기술의 집약체는 없다.”

한마디 한마디가 매섭다.

“그 많은 부품을 줄이고 소형화하는 자가 미래 자동차 시장을 장악할 것이다.”

“그래서 안 된다는 것입니까?”

“넌 다른 일도 많잖아.”

“자동차를 키워보고 싶습니다.”

“네가 배가 부른 모양이구나. 하기 싫으면 그만 물러나도 괜찮다.”

흠칫!

단번에 그만두라고 한다.

40년을 형님 밑에서 땀 흘렸는데 자동차 분야를 맡아보고 싶다는 의견을 냈다고 그만두라는 말이 나오는 게 과연 정상일까.

“주제를 알아야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주제라니.

자신이 그토록 무능력한 사람이었단 말인가.

그토록 무능한 사람을 데리고 지금까지 일을 시켜온 형님은 그럼 뭔가.

“그럼 누가 자동차를 맡습니까?”

당시 대규모 인사이동을 앞두고 있었다.

“이미 노 이사가 내정됐으니 딴생각 말고 넌 그 일이나 열심히 해.”

이때 유동풍은 태천전자서비스 분야를 맡고 있었다.

태천전자도 아닌 서비스.

이름하여 고장 나면 고쳐주는 그런 곳이다.

그날 밤 노기술에게 전화를 걸었다.

용건은 간단했다.

유장풍에게 말 좀 잘해서 자신을 태천자동차로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친형님처럼 따랐고 가슴 한구석에는 존경하는 마음까지 자리 잡고 있었던 노기술은 기대와 달리 뜻밖의 말을 뱉었다.

- 내가 무슨 힘이 있나? 자네가 직접 해결해야지. 나도 유 회장 눈치 보는 입장 아닌가.

한마디로 싫다는 뜻이었다.

예정대로 노기술은 태천자동차를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낙엽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다고 이듬해에 다시 새 잎사귀가 되는 건 절대 아니지.’

기어코 떨어졌다.

떨어진 낙엽은 흙에 파묻혀 썩을 뿐이다.

“채 팀장!”

“예, 사장님!”

“잠깐 내 방으로 와요.”

유종태가 핸드폰으로 누군가를 오라고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오늘 회의는 이만 끝냅시다.”

유종태가 일어서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오도석은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인사과장 전해군이 기다리고 있더니 급히 말했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미래전략실 총무팀장 채경수가 실장으로 전격 승진했다고 합니다.”

“뭐어?”

“총무팀장 채경수가 미래전략실장으로 발령 났습니다.”

“뭐라고?”

잠깐, 사무실에서 자기 방으로 건너오라는 유종태의 전화가 그것 때문인가.

그래도 그렇지, 고작 20여 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천지가 개벽할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미래전략실은 말 그대로 태천그룹의 심장부다.

태천그룹의 컨트롤타워이자 투자와 개발의 중심이며 모든 계열사는 미래전략실의 간섭을 받는다.

실장 직위이지만 계열사 사장들을 휘어잡는다.

채경수는 유종태의 대학 동창이다.

즉 최측근인 셈이다.

지이잉!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바라보니 유장풍의 수행비서 장민혁이다.

[무슨 얘깁니까?]

“뭐가요?”

[태천자동차에 유동풍 바이오 사장님이 가셨어요.]

장민혁은 지금 유장풍을 모시고 병원에 있다.

몹시 당황스런 목소리다.

얼마 전 두 사람은 힘을 모으기로 약속했고 그동안 소리 없는 정보를 교환해오고 있었다.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회사 핵심 부서에 자기들 사람들을 심어 놓기도 했고 유장풍 회장의 빈자리를 대비해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중이다.

그런데 유장풍 회장이 잠깐 병원 신세를 지는 사이 유종태가 회사 중요부처를 전격 자기 사람들로 채우고 있다.

주인이 바뀌면 사람이 이동한다.

거센 세대교체 바람이 불면서 나이 든 사람들은 스스로 사표를 내도 나갈 것이고 버티는 사람들은 한직으로 밀려날 것이 뻔했다.

그중 핵심 인물 중 두 명을 뽑으라면 오도석 인사팀장과 장민혁 수행실장이다.

유종태가 경영권을 거머쥔다면 그의 첫 총알받이가 될 것이다.

누구보다도 앞으로의 상황을 잘 안다.

불과 얼마 전에 자신도 그런 칼을 휘둘렀었다.

유장풍 회장의 지시를 받아 한 일이지만 유종태의 측근들 상당수를 해외로 보내거나 한직으로 쫓아버렸다.

유종태가 직접 찾아와 배려를 부탁했지만 소용없었다.

회사 내에서 어떤 힘의 집단도 만들지 못하도록 했다.

- 회사 내에서 사조직이 만들어지면 안 된다.

아직까지는 유장풍의 여러 자식들 중 누구도 은밀한 사조직을 만들어 움직이고 있지 않다.

장민혁은 청소부로, 오도석은 인사권으로 유종태의 팔과 다리를 잘라냈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칼이 자신들 목을 칠 것은 불문가지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도석이 물었다.

장민혁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오래가지 않아 우리 둘의 인사이동 발표가 날 텐데.”

오도석의 말에 장민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릴 칠 기회를 보긴 하겠으나 아직은 너무 빠릅니다. 회장님 수술이 끝나면 복귀는 아니어도 어떤 식으로든 칼자루는 다시 가져오실 테니까. 물론 칼의

예리함이 예전만 못하겠지만.]

둘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은밀한 이야기는 이내 스멀스멀 피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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