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회 바람, 바람, 바람(1)
유태수는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커피숍 문이 열리고 영릉(英陵)을 턴 조팔구가 쉰 중반가량의 사내를 데리고 들어섰다.
사내는 나이에 비해 유난히 머리가 희었고 머리에 얼룩무늬 부니햇을 쓰고 있었다.
조팔구는 곧바로 다가와 인사했다.
“모셔 왔습니다. 인사하시죠, 대표님. 금만중 씨입니다.”
유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브 유라고 합니다. 이름이 미국 사람처럼 비슷할 뿐 한국인이니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뭘 듣고 싶다는 거요?”
금만중이 대뜸 때릴 것처럼 노려보며 묻는다.
“청와대까지 투서를 넣었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일인데 이제 와 뭘 어쩌겠다고 또 꺼내는 건지…… 개지랄!”
금만중은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다.
금만중은 금해 금씨 상현공파 77대손이다.
금수로왕의 형님 금무로 직계 혈통인 것이다.
금수로의 형님인 탓에 금해 금씨의 대종가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상현공파 종가로 면면히 이어져 오던 금씨 집안에는 당연히 많은 고서화가 풍부하게 소장되어 있었다.
물론 일제 강점기에 적지 않은 소장 문화재를 빼앗겼지만 독립운동을 한 증조부의 헌신으로 상당한 양의 유산과 유물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정부에서는 금해 금씨의 역사적 유물을 정부에서 관리하기로 하고 박물관 공사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정치적 이해 관계로 공사는 미뤄졌고 그사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금해 금씨의 상현공파 적통인 금만중이 보관해오고 있던 금동관(金銅冠)은 물론 보물과 국보급 문화재 다섯 점이 사라졌고 결정적인 건 시조 금무로의 무덤이 도굴된 것이다.
금무로의 무덤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가문과 족보 곳곳에 약간의 흔적들이 나타나는데 철의 왕국답게 푸른색 쇳덩이로 빚은 청철미륵불상(靑鐵彌勒佛像), 아홉 개 방울이 달린 금동구두령(金銅九頭領), 금무로가 전쟁을
나갈 때 입었다는 투황철제갑옷(鬪皇鐵製甲衣) 등이 묻혀 있다고 했다.
물론 그동안 남부지역 일대에서 발견된 고분에서 나온 유물을 분석하고 나타난 기록에서도 족보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글들이 있었다.
무덤에는 금무로가 살아생전 사용하던 많은 물건들이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데 그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도굴된 것이다.
경찰에서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조사에 나섰지만 어떤 증거나 흔적도 찾지 못하고 영구미제로 남았다.
‘못 잡는 것이 아니라 안 잡는 것이다.’라는 의심을 갖고 있던 금만중은 쉬지 않고 수많은 사회 기관에 투서를 하여 수사를 진행해 줄 것을 청했으나, 우리도 사건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답장 말고는 어떤 조치도 아직 없다.
“사라진 목록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정확한 목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지요. 우리도 여러 문헌에 나타난 것 말고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니까.”
금만중은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 혹시라도 짚이는 곳이나?”
경찰이 해결하지 못했다고 두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금만중은 나름대로 옛 고분이나 왕릉만을 전문적으로 노린다는 도굴범들에 대한 조사에 나섰고, 사람을 고용하여 추적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K 대학 부설 가야문화연구소장 이 모 교수가 말하길 가장 가능성이 큰 곳이 바로…….”
잠시 긴장한 표정을 하며 말을 멈췄다.
“태천미술관이라고 하더군요.”
유태수는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쭈욱!
그리고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커피를 마셨다.
“금 선생님 부친께서 자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조상들 뵐 면목이 없다면서 농약을 먹고…….”
“으으음!”
유태수는 어금니를 물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문화재 관리국에서 나왔다고 들었지만 그곳 사람들 같지는 않고.”
눈을 좁혀 살핀다.
범인은 잡지도 못하면서 걸핏하면 정부 기관과 경찰에서 오라 가라 하여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래서 이제 딱 보면 안다.
단번에 문화재 관리국 사람 행세를 할 뿐 가짜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놀라는 표정이 아닌 것이 자신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혹시 자신이 모르고 있는 정보를 얻어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늘도 나온 것이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조팔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들고 커피숍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백 프로 약속은 하지 못하겠지만 가능한 한 돌려드리기 위해 노력하죠.”
화악!
금만중의 눈이 커졌다.
누구기에 돌려준다는 말을 이토록 쉽게 하는 것일까.
경찰도 잡지 못하고 끝내 영구미제로 넘긴 사건이다.
K 대학 이 모 교수가 태천미술관을 의심했으나 그렇다고 증거가 있는 건 아니다.
어쨌든 온갖 설들만 난무하던 유물의 행방인데 찾아 준다니 너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누구신데?”
유태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전화 통화를 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간 조팔구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딩동!
유태수는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태천미술관 방범 시스템 공사가 있다고 합니다.」
고개를 들어 조팔구를 바라보았는데 살짝 웃는다.
조팔구의 라인은 거미줄처럼 깔려 있다.
고미술 도굴계에서는 국내 일인자이고 직업이 그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국공립은 물론 사립미술관의 시스템까지도 어느 정도 꿰뚫고 있다.
공존공생.
도굴만 하는 게 아니다.
남의 미술관 물건도 자주 손을 댔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분야 전문업체나 전문가들과 은밀히 통해야 한다.
「이번에는 이스라엘에서 기술자들이 오는 모양입니다.」
국내 기술이 번번이 뚫리자 지구상에서 가장 앞서가는 방범 방첩 능력을 가진 이스라엘 전문가들을 초빙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유태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마를 찡그렸다.
오면 안 된다.
태천의 주식이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상당한 악재가 있어도 쉽게 흔들거리지 않는 전자와 바이오, 자동차를 포함한 몇몇 태천그룹을 선두에서 이끌어 가는 회사들의 주식도 추락을 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다.
결국 태천그룹 유장풍 회장의 병세에 대해 사실 그대로를 발표했다.
숨지 않고 이 위기를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유종태의 의지를 보인 것이다.
유장풍의 병명은 협심증.
협심증은 관상동맥이 좁아져 심장으로 들어가는 피의 양이 작아지고 그에 따라 산소 제공도 희박해진다.
우리나라 의학 수준으로서는 충분히 수술로 치료되는 병이지만 문제는 유장풍이 일흔일곱의 고령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태천의료원장 고무룡 박사가 직접 기자들 앞에 나와 유장풍 회장의 수술 경과를 설명했다.
낙관적이다. 별것 아니다.
건강하게 회복되고 있다는 표현으로 자신감을 보였으나 시장의 기세는 그룹 내 여러 이런 행동들과는 조금 떨어졌다.
주식 폭락의 폭이 조금 작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시총 백조가 지난 한 달 사이 날아갔다.’
언론 보도는 아니다.
하지만 증권 전문가들은 백조가 넘었으면 넘었지, 이하는 아닐 것이라고 소문에 힘을 실었다.
그런 가운데 데브그루는 태천카드의 주식을 폭식하듯 매수하기 시작했다.
태천계열사 중 태천카드의 주식은 시장에서 거의 맥을 추지 못했다.
데브그루의 태천카드 주식 매수는 차분했다.
시장에서 태천카드의 위력은 확실히 예전만 못하였다.
초창기 태천그룹이라는 배경이 작용하면서 한 때는 신용카드 시장의 약 70퍼센트까지 점유율을 보였지만 삼왕카드가 아멕스와 제휴를 맺으며 뛰어들어 순식간에 판도가 바뀌었다.
거기다 은행권들도 카드 시장에 뛰어들면서 파격적인 할인과 서비스로 고객 붙잡기에 올인 했다.
순수 국내 카드 원조답게 시장 점유율은 약간의 변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1위 자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지금은 중하위권에서 파닥거리는 비참한 처지다.
뭔가 준비 중이다. 왜 태천카드인지 증명해 보이겠다.
곧 파격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바닥세에 머물렀던 주가가 상승세를 보였지만 유장풍의 입원으로 날개 꺾인 새가 되고 말았다.
“으음.”
늦은 밤이지만 데브그루 사무실은 불이 훤히 켜져 있었다.
유태수는 퇴근하지 않고 태천카드의 오늘 종가를 모니터를 이용해 바라보고 있었다.
“퇴근 안 하십니까?”
송만술이 방문을 열었다.
탁!
그러면서 슬그머니 문을 닫고 들어선다.
슈퍼컴퓨터로 치장된 유태수의 방을 쓰윽 둘러본 송만술이 물었다.
“얼마나 쓸어 담았는데?”
“십 퍼센트 갓 넘었어.”
아무리 휴지 조각이라고 해도 십 퍼센트의 주식이라면 이천억은 쏟아 부었을 것이다.
“전(前)과 동(同)?”
앞서 벌였던 작전과 똑같냐는 질문이다.
즉 태천물산을 인수합병 할 듯 분위기를 몰아가다 모조리 매도하며 큰 이익을 남겼는데 이번 태천카드도 그때처럼 시세차익을 노린 사냥이냐는 뜻이었다.
“아니!”
톡!
유태수는 손에 들고 있던 볼펜을 책상 위에 놓았다.
“아냐?”
유태수가 송만술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인수해야지.”
“인수?”
투툭!
풀어 놓은 시계를 왼쪽 손목에 차고 벗어 놓은 양복 상의를 걸쳐 입는다.
“왜 그런 눈이야? 또 무슨 토를 달려고?”
근래 들어 송만술이 걸핏하면 시비조로 나오자 이것저것 따지지 말라고 미리 선수 친다.
송만술이 빙긋 웃는다.
“퇴근하려고?”
“송 과장이 그냥 가지 않고 내 방을 찾아온 이유가 단순히 심심해서는 아닐 것이고.”
씨익!
송만술이 웃는다.
두 사람은 곱창을 놓고 앉았다.
이미 소주 세 병을 비웠고 주인이 네 번째 병을 가져다주었다.
짜악!
유태수는 능숙한 동작으로 마개를 따더니 자신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내 꿈이 뭐냐고 물었나?”
슥!
단번에 비운다.
커어!
가볍게 이마를 찡그리더니 다시 잔을 채우고 젓가락으로 지글지글 익어가는 곱창 한 점을 입속에 집어넣는다.
“나도 꿈이 있지. 내 꿈이 궁금해. 뭔 줄 알아?”
“궁금해? 워낙 사람에게서 묘한 냄새가 나다 보니 더욱 알고 싶고.”
“냄새?”
송만술이 입술을 비튼다.
“뭐랄까. 음습한 독버섯에서 풍기는 눅눅한 비린내,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피 냄새가 맞겠는데.”
“내 꿈은 태천그룹을 없애는 거야.”
“허푸!”
술잔을 들어 올린 송만술이 깜짝 놀라며 소주를 흘렸다.
“석대!”
“농담 아냐.”
“그렇겠지.”
파팟!
유태수의 눈이 가늘어진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기업을 무너뜨리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하거나 농담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송만술은 술잔을 떨어뜨릴 뻔했는데 그건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다는 의미다.
“믿는다는 건가?”
유태수는 씨익 웃었다.
“꼭 그 꿈을 이루길 빈다.”
“호오!”
유태수가 놀란다.
“송 과장, 궁금하지 않아? 왜 내가 유장풍 회장의 목에 칼을 들이대려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아.”
송만술은 얼마 전까지 자신의 정체성에 무척 관심을 가졌다.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며 탐색하듯 묻고 바라보았다.
사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주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자신의 주위에서 너무 많이 일어난다.
송만술 같이 빠르고 날카로운 사람이 그런 변화에 둔할 리 없다.
어쨌든 면전에서 누구냐고 묻기까지 하던 송만술이 이제는 궁금하지 않다고 말한다.
왜 궁금하지 않게 됐을까.
쭉!
유태수는 잔을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