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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벌집 청소부-104화 (104/122)

104화 바람, 바람, 바람(2)

송만술은 잔을 비우고 술을 따르는 배석대를 살짝 쳐다보았다.

배석대와 태천그룹 사이에 그냥 넘길 수 없는 뭔가가 있다.

이라크에서 있었던 사건 가지고 저토록 집요하고 끈기 있게 목을 조여가지는 않을 것이다.

진짜 있다.

확실히 큰 건수가 있다는 것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지금 묻지 않는 건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그 스스로 말해 줄 것이다.

***

전극준은 간부들과 심야 회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치고 들어오는 손길이 있다.

숨기려 들지도 않고 그냥 당당하게 밀고 들어오는 손의 주인은 이름도 특이했다.

전극준은 유장풍의 첫째 사위다.

아내 유상주는 딸로서는 큰 딸이고 자식들로서는 큰아들 유종태에 이어 두 번째다.

유기태가 살아 있었다면 셋째가 되는데 그의 인상은 잔뜩 굳어 있었다.

태천카드의 주식을 덥석 삼키며 들어오는 막강한 자금.

소믈리에.

태천카드 주식을 삼키며 들어오고 있는 투기자금의 이름이다.

언뜻 와인 감별사를 떠올리게 하는 친근감 있는 이름 뒤에는 적대적 인수합병을 노리는 음험한 심보가 부글부글 끓는다.

시장에는 수많은 투자 회사들이 난립한다.

소믈리에 역시 그런 투자 회사들 중 하나이며 본사는 서초동에 있었다.

한국계 투자 회사이지만 태천카드 주식을 쓸어 담고 있는 자금까지 한국계라고 볼 수는 없다.

“오늘은 여기서 끝냅시다!”

전극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뚜렷한 대책이 나오지 않는 회의를 오래 끌고 있어 봤자 피곤할 뿐이다.

간부들이 하나둘 떠나며 회의실은 조용해졌고 한 사내만 돌아가지 않는다.

전극준의 비서 오규수다.

“넌 안 가?”

그는 비서이면서 대학 후배이기도 했다.

사석에서는 편안하게 말을 놓는 사이였다.

“사장님.”

“말해.”

“지금 상황에서 두 가지 해결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호텔 유 대표님에게 카드 지분 매입을 요청하는 겁니다.”

“또 그 소리!”

전극준이 버럭 소릴 질렀다.

호텔 유 대표는 다름 아닌 전극준의 아내 유상주를 말한다.

둘은 부부다.

유상주와 전극준은 대학 시절 만났다.

둘의 연애와 결혼은 모든 재벌집 자식들이 그러하듯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전극준은 체육학과를 다닌 태권도 선수였으며 아버지는 강력계 형사였고 어머니는 군인이었다.

집에서 결혼을 반대하자 유상주는 농약을 마셔 버렸다.

결국 유장풍은 어쩔 수 없이 둘의 결혼을 허락했는데 분명한 약속 한 가지를 받아 냈다.

- 유 씨가 아닌 사람은 절대 회사 경영에 끼어들 수 없다.

그만큼 유장풍의 눈에 전극준은 모자랐고 부족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오 년 정도 지나 한 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전극준과 유상주의 연애는 치밀한 사전 각본이라는 것이다.

전극준이 친구들을 동원해 작전을 세웠고 재벌집 딸인 유상주가 거기에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 정말이야? 계획적인 접근이었어?

- 결혼해서 우리 이렇게 잘살고 있는데 이제 와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사랑하면 된 거지.

- 진짜라는 거야?

유상주의 감정은 묘했다.

누군가 펼쳐 놓은 그물에 걸려 사랑을 했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자존심이 상했고 조금씩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충돌이 잦아졌고 어느 날부터 이혼 얘기가 흘러나왔다.

- 이혼은 안 된다.

유장풍에게 이혼 얘기를 꺼내자 단호히 막았다.

- 내가 그 자식의 꼭두각시였는데 참으란 말이에요?

- 중요한 건 넌 걸려들었고 전 서방 그놈은 목표물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난 잡힌 놈보다 잡은 놈에 관심이 가는구나.

그리고 그토록 외면하던 유장풍이 오육 년 정도 지나 전극준을 태천카드 과장으로 발령냈다.

이어 이사로 승진했고 마침내 사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부부지만 여전히 둘 사이는 가끔씩 차가운 바람이 분다.

유상주가 남편 전극준을 부르는 이름이 있다.

차돌.

태권도가 발로 차는 운동이고 머리는 텅 비었다고 하여 발차기할 때 차와 돌대가리의 돌을 붙여 차돌이라 부른다.

“절대 안 돼!”

도움을 들어줄 유상주가 아니다.

부부지만 둘은 따로 집을 얻어 산 지 7년이 넘었다.

“두 번째는 직원들에게 읍소하는 것뿐입니다.”

“어떻게!”

“우리사주 사기 운동.”

“우리사주!”

한때 유행했었다.

종업원들의 회사를 향한 소속감과 애사심을 자극할 목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났었다.

소속감과 애사심은 회사에서 직원들에 대한 충분한 복지와 안정된 근무 환경을 보장할 때 생긴다.

평생직장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진 시대에 사는 직원들에게 과연 그런 구시대적 유물 수법이 통할까.

“당장 회사 넘어가면 실업자 될 텐데 안 사고 배깁니까?”

전극준이 피식 웃는다.

“아니면 말고?”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지 않느냐.

일단 실행해 보긴 해야 할 것 아니냐는 의미였다.

딸칵!

전극준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말없이 담배를 서너 모금 빨았다 뱉었다를 반복하더니 갑자기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왜 태천카드를 주셨을까? 다른 계열사도 많은데?”

“한 말씀 해도 될까요, 사장님?”

후우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는다.

할 얘기 있으면 해보라는 걸 의미했다.

“주위 눈 때문이었겠죠. 명색이 재벌집 사위인데 언제까지 태권도 코치나 하며 살아가도록 방치할 수는 없잖습니까?”

결혼 이후 한동안 출신 대학교 태권도부 코치로 활동했다.

그것도 재벌가 사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교 측에서는 혹시라도 태천그룹으로부터 교육투자라도 받을까 하는 마음에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맹물도 없었으나 혹시나 하면서 계속 붙들어 놓았는데 그런 와중에 태천카드 과장으로 인사 명령이 난 것이다.

“그래서 버린 카드다?”

“사실이잖습니까? 태천카드는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다시 정비하여 잃어버린 시장을 회복하자면 천문학적인 투자가 필요한데 그럴 바에는 신산업 분야에 쏟는 것이 이익이죠. 어차피 개나

소나 웬만하다 싶으면 줄줄이 신용카드 시장에 뛰어든 마당인데.”

“후훗!”

전극준은 가늘게 웃었다.

모욕적인 말이지만 전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틀리지 않는 솔직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좋아! 일단 우리사주 운동으로 어떻게 버텨보자고.”

파상적인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지만 그렇다고 지레 겁을 먹을 것까지는 없다.

아직 싸움에서는 져 본 적이 없다.

“우리사주?”

유상주는 뒷좌석에 앉아 통화를 하고 있었다.

조수석에는 유상주의 최측근이자 호텔 이사로 승진한 양성국이 앉아 있었다.

“제법인데, 알았어. 잘 지켜봐.”

유상주는 핸드폰을 천천히 내렸다.

“태천카드입니까?”

조수석에 앉은 양성국이 상체를 뒤로 돌려 앉아 묻는다.

“전 직원 주식 사기 운동과 자사주 매입을 적극 추진하는 모양이에요.”

“어차피 지분 싸움이 될 테니까 방법은 그것뿐이죠. 하지만 버티기 쉽지 않을걸요.”

피식!

유상주가 씨익 웃는다.

법적으로는 부부지만 잠자리를 같이한 지는 오 년이 훌쩍 넘었다.

법적으로만 부부일 뿐 남과 다를 바 없었기에 전극준에게 어떤 동정이나 안타까운 감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단지 태천카드는 초창기 한국 신용카드 시장을 리드했고 회사가 어려울 때마다 크고 작은 지원을 하는 데 공이 컸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그랬지. 회사든 사람이든 보낼 때는 미련 없이 보내버려야 한다고.’

부우웅!

차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

일사천리.

단독지분만 18.8퍼센트가 되어 순식간에 제1대 주주가 되었다.

미국의 JP모건에서 지분 8.8퍼센트를, 일본 라쿠텐카드가 소유한 지분이 5.1퍼센트다.

반면에 태천카드에 우호적인 지분을 보면 태천생명이 14퍼센트로 가장 많다.

나머지 지분들을 긁어모은다고 해도 30퍼센트를 겨우 넘었다.

지분 취득 전면에는 펀드 매니저 무어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가 쥔 우호 지분을 전부 합하면 50.1퍼센트다.

속전속결.

임시 주총 소집이 되었다.

회의라고 할 것도 없었다.

칼자루를 쥔 소믈리에 측의 결정대로 모든 건 진행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모조리 갈아 치웠다.

또한 인정사정없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다만 그냥 쳐내지는 않았다.

구조조정 당한 직원들은 2년 치 연봉에 1억 원의 위로금이 지불되었고, 6개월 동안 재취업을 위한 자기 계발 투자금 2천만 원이 주어졌다.

평균 2, 3억씩은 주머니에 담았기 때문에 노조에서도 그다지 반발하지 않았다.

‘땡큐, 태천카드.’라는 말이 이때 만들어진다.

그리고 회사 이름도 바뀌었다.

「아시아 익스프레스 카드(Asia Express Card)」

그리고 모든 정리와 조정이 끝나고 놀라운 소식이 발표되었다.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로부터 50억 달러(한화 약 7조 원)의 투자 각서를 체결했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170년 역사를 자랑하면서 신용카드의 대명사로 불리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의 최대 주주다.

회장은 그 유명한 워렌 버핏.

버크셔 헤서웨이의 시가총액은 한화 1,000조 원이다.

아멕스의 영업력과 노하우가 그대로 아시아 익스프레스로 스며들 것은 자명했고 그때부터 주가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삼왕카드 또한 아멕스와 지분이 섞여 있는 데 반해 버크셔 헤서웨이는 관련 없다.

어쨌든 한 집 건너 이웃이 된 것이다.

M&A가 끝나면 한 가지 작업에 몰두한다.

대대적인 수술과 비전 제시.

그렇게 회사가 안정되고 가치가 뛰면 투기자금은 충분한 이익을 남기며 회사를 팔아치우고 떠난다.

하지만 소믈리에는 직접 자신들이 회사로서의 가치를 성장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내용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태천카드 사장 전극준이 그대로 유임된 것이다.

모든 경영진이 자리를 떠나고 회사를 나갔지만, 최고 우두머리인 전극준은 새로운 대주주인 소믈리에 측으로부터 회사 업무의 지속성과 연속성이라는 명분 하에 유임된 것이다.

모두가 놀란다.

설마 전극준이 대표이사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가장 놀란 사람은 당사자인 전극준이었다.

주주총회가 끝나고 이사진 전원이 사직서를 제출했고 자신도 당연히 그러했다.

당연히 수리될 것이라 여겼는데 반려됐을 뿐 아니라 계속 자리를 지키라는 인사 명령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말도 안 돼.’

전극준이 뱉어낼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말도 안 돼.

정말로 그러한 일이다.

자신의 경영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다만 태천카드 대표에 올라 이날까지 단 한 번도 두 다리 뻗고 자본 적은 없었다.

사회적으로 알려진 거물 CEO를 찾아가 그들의 노하우를 들었고 경영이론의 전문가인 대학 교수를 찾아 비싼 돈을 주며 공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저들은 자신을 버린 카드로 사용했겠지만 기어이 시궁창을 1급수로 만들고 싶었다.

경영이고 인간관계고 소통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운동을 한 까닭에 화통하다는 말은 들었고 선후배들 사이에서도 의리는 있다는 소릴 듣고 살았다.

「학문과 지식으로 인간의 됨됨이를 평가한다면 그는 빵점짜리일 것이다. 하지만 관계와 소통으로 본다면 그는 비즈니스의 프로페셔널이다.」

언젠가 어느 일간신문 칼럼에 쓰인 전극준에 대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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