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재벌집 청소부-106화 (106/122)

106화 머슴들의 반란(2)

송만술이 커피 머신에 원두를 넣고 준비할 때 유태수와 전극준은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식사는 마음에 들었습니까?”

전극준은 씨익 웃었다.

“예술이었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전극준이 잠시 말을 끊었다.

“공교롭습니다.”

“뭐가요?”

“아침 반찬으로 나온 나물들 말입니다. 사실은 제가 나물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지금도 퇴근길에 반드시 시장에 들러 나물을 사 가지고 들어갑니다.”

“내가 나물을 좋아하여 준비한 건데 대표님께서도 나물을 좋아하신다니 다행이군요.”

“이사님!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던 대로 해요. 안 되는 것도 기어이 되도록 만들려는 전 대표님의 열정이면 만족합니다.”

전극준은 경영에 서툴렀다.

심지어 밑에 있는 직원들까지 그를 우습게 보며 소리 없는 왕따를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누구를 탓하지 않았다.

모든 건 자기 탓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노력했으며 밤잠을 설쳐가며 태천카드를 근사하게 만들어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닳고 닳은 사업가들이 외면한 회사를 아마추어가 회생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비록 인수합병에 넘어갔지만 이미 경험을 했다.

아시아 카드만큼은 어떤 회사보다 크고 건실하게 가꾸어 나갈 자신이 있었다.

“커피 드시죠!”

송만술이 쟁반에 석 잔의 커피를 들고 다가왔다.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

15만 원 선에서 약간의 오르내림만을 할 뿐이다.

7,500원짜리가 15만 원을 유지하면서 시가총액 5조를 훌렁 넘어버렸다.

국내 카드사 중 시장 점유율 1위인 삼왕카드의 턱 밑까지 치고 올라간 것이다.

인간은 구별되기를 원한다.

타인과 달라지기를 원한다.

남보다 더 융숭한 대접을 받기를 원한다.

그런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들고 고가의 전략, 프리미엄의 작전으로 나선 아시아 카드는 시장 장악을 빠르게 끌어 올리고 있었다.

***

가을에 접어들고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 당신 말고 진짜 주인을 만나고 싶소.

뉴욕에 있는 마이클 무어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온 것이다.

아시아 카드 실소유주는 마이클 무어가 맞다.

그런데 상대는 대뜸 당신은 바지잖아, 바지 말고 몸통을 만나고 싶다면서 몇 마디 뱉고 끊었다.

적인지 아군인지.

즉 비즈니스를 하자는 건지, 아니면 싸우자는 건지 구분이 모호한 전화 예절과 말투가 마음에 걸린다.

어쨌든 전화는 다시 미국에서 한국으로 걸려 왔다.

“무어!”

유태수다.

한국은 오후 2시가 막 넘었다.

유태수 또한 조금 전 점심을 먹고 들어온 참이었다.

“이병악 회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단 말입니까?”

유태수는 눈을 빛냈다.

이병악이란 이름을 가진 재계 거물은 삼왕그룹 총수 말고는 없다.

유장풍 회장과 영원한 라이벌이자 피 튀기는 전쟁을 무려 오십 년 동안 해오고 있다.

호텔 타임스퀘어는 이병악 회장의 소유이다.

지금은 둘째 딸이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는데 한때는 외국인들이 선호하는 국내 호텔 1위를 유지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타임스퀘어의 서비스와 시설은 국빈 방문하는 외국 정상들 숙소로도 많이 사용된다.

오후 3시.

해가 조금씩 강 서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어는 타임스퀘어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통역으로 유태수가 옆에 붙어 섰다.

브람스 교향곡 3번이 흘러나오는 커피숍 안에 20여 명의 손님들이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커피숍을 둘러보던 무어의 시선이 창가에 멈춘다.

저벅저벅!

통로를 따라 걸어가는 무어의 시선은 창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거기에는 낯익은 노인 한 명이 달랑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삼왕의 이병악 회장이다.

이미 사진과 영상을 통해 충분히 보았고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다.

“저 노인은 늙지도 않는군.”

유태수가 중얼거렸다. 이병악 회장은 아버지보다 한 살 많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유태수가 다가가 가볍게 허리를 구부렸다.

이병악 회장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왔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유태수를 보더니 이번에는 마이클 무어를 본다.

“회장님, 저희 회사 대표 무어 씨입니다.”

이병악은 잔잔하게 웃는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무어보다는 통역으로 나온 유태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앉아요.”

두 사람은 맞은편에 같이 앉았다.

“통역인가?”

“그렇습니다.”

이병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수긍의 동작이라기보다는 뭔가 모호하다는 그런 것이었는데 여직원이 들어오면서 주문한 커피 석 잔을 가져다 놓고 간다.

“무어 씨!”

무어가 고개를 들었다.

“소믈리에와 데브그루 로버트 설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머리는 두 개지만 몸통은 하나로 보고 있다는 질문이다.

무어가 씨익 웃는다.

“뉴욕에서 서울까지 비행기로 왔습니다.”

그따위 질문을 받기 위해 그 먼 거리를 날아오지 않았다는 불쾌감이다.

용건만 말해라.

직설에 이병악 회장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큰 소리로 웃더니 옆에 있는 유태수를 살짝 바라본다.

“낯이 익군요?”

유태수는 얼굴이 익다는 뜻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경륜과 치열한 시장의 삶을 살아온 사람답게 자신에게서 어쩌면 아버지의 기세를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저를 아십니까?”

“모르니까 낯이 익다는 것일세. 좋습니다. 무어 씨를 내가 보자고 한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아시아 카드를 인수할 의향이 있습니다.”

무어는 놀라지 않았다.

여길 오기 전 유태수로부터 아시아 카드 인수에 대한 얘기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귀띔을 받았다.

무어는 어떻게 그토록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유태수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 그는 유장풍 회장을 이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비록 태천카드라는 사명은 사라졌지만, 아시아 카드를 인수함으로써 짜릿한 쾌감을 얻으려는 거죠.

거기에 세계적인 기업들이 투자를 하고 있어 아시아 카드는 갈수록 더 맹위를 떨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지금은 몰라도 미래를 생각한다면 인수해볼 필요가 있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삼왕카드와 아시아 카드를 합병한다면 그 가치는 더욱 오를 것이다.

이른바 시너지 효과라는 것이 있다.

- 제의를 해온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 현재의 가치에서 세 배를 더 준다면 거래를 하겠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제 날짜 아시아 카드의 시총은 5조를 조금 넘었다.

그런데 세 배라면 15조 원을 달라는 뜻이다.

쭈욱!

무어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이곳 커피 향이 너무 좋군요.”

유태수를 보며 하는 말이었는데 그냥 뱉어내는 소리가 아니다.

유태수가 미리 코치를 했다.

이병악 회장의 둘째 딸이 운영하는 호텔로 태천그룹 소유 더 원 팰리스와 라이벌이다.

별것 아닌 듯하지만 커피 향이 좋다는 한마디 덕담이면 의외로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무어는 시키는 대로 했지만 커피 향이 좋은 건 사실이었다.

이병악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호텔에 입점한 가게 하나하나 철저하게 관여하고 터치하는 조건으로 받아들일 만큼 둘째 딸 이화진의 타임스퀘어 사랑은 극진했다.

그런 정성이 통해서였을까.

조금씩 더 원 팰리스를 추월하고 있었다.

특히 문화부에서 조사한 서비스 점수에서 더 원 팰리스를 간발의 차이지만 앞섰다.

“시간이 좀 필요할 듯싶습니다.”

“어느 정도면 되겠소?”

거래라는 것이 오래 끌어 좋을 것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이병악 회장이었다.

“결코 일주일은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오케이.”

이병악 회장은 만족스런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그만 일어나려고 하는데 이병악 회장이 입을 열어 말했다.

“이제 생각났소. 젊은이에게서 풍기는 기세를 내가 어디서 겪고 봤는지 말이오.”

유태수는 눈을 반짝거리며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해서 될지는 모르겠지만, 난 오래전부터 아주 마음에 걸리는 사람을 한 명 두고 있지요.”

유태수는 보나 마나 아버지 유장풍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죽했으면 그의 사진을 얻어 내가 잘 아는 관상가를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관상가는 예상대로 놀라더군요.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반란을 일으켜 제왕의 자리에 앉을 효웅의 상이라는

겁니다.”

효웅(梟雄).

우린 영웅이라는 말에 친숙해 있다.

효웅은 그다지 즐겨 사용하지 않지만 굳이 한 인물을 뽑는다면 삼국지 속의 조조가 대표적이다.

어쨌든 사납고 용맹한 인물을 효웅이라고 부른다.

당대의 거상이며 재벌인 이병악 회장이 두려움을 느낄 만큼의 효웅은 누구였을까.

또한 세상에 그 이름을 날리지도 않았는데 과감하게 효웅이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어떤 사내였을까.

“내가 잘 아는 어느 기업인에게는 아들이 다섯 있었소.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건 옛말이오. 요즘은 견자(犬子)를 호자(虎子)로 만드는 기술이 있으니 바로 재벌가 자식들 아니겠소.

사실 재벌가 자식들 대부분이 견자요. 견자도 못 되는 자식이 태반이지만.”

유태수는 이병악의 말에 내심 공감했다.

하나 같이 개새끼들이다.

그런데 범새끼가 되는 이유는 환경이 호구, 즉 범의 굴이다 보니 그러는 것이다.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돈으로 그럴싸한 경영인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들이 경영인의 자질이 있어서가 아니다.

독단적으로 해내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회사가 망하면 안 되기 때문에 밑에 있는, 또는 아버지를 도왔던 재능 있는 기술자들이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국가 또한 대기업의 파산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망하지 않도록 지원까지 들어간다.

그래서 대한민국처럼 기업 하기 좋은 나라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막내아들이 있는데 정말 적장의 핏줄이지만 탐이 났소.”

유태수는 이병악이 말하는 적장과 그 핏줄이 누군지 짐작했다.

적장(敵將)은 아버지 유장풍이고 핏줄은 자신이 분명했다.

겉으로는 웃는다.

하지만 서로의 소매 속에는 단번에 상대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칼을 숨기고 있는 관계가 유장풍과 이병악이다.

적장의 핏줄이면 무조건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이 일반적인 증오일 텐데 욕심이 났다는 건 무슨 뜻일까.

어쨌든 걸물임은 분명했다.

‘다르다.’

차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이병악은 아버지와 그릇의 크기가 또 달랐다.

“그 적장은 어떤 사람이고 탐난 핏줄은 누굽니까?”

질문은 무어가 했고 유태수는 통역만 해주었다.

물론 자신이 던지고 싶은 질문이었다.

“알면서 그러시나!”

이병악은 씨익 웃더니 일어났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회장님!”

자리에서 일어나 세 걸음을 걸어가던 이병악이 몸을 멈추고 돌아섰다.

유태수가 부른 것이다.

“그 아들 이름이 뭡니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지 누구기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권위가 있다는 회장님의 마음을 흔들었는지 궁금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권위가 있다는 극찬에 다소 마음이 흔들렸을까.

이병악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막내아들 유태수라는 친구죠. 물론 그는 지금 죽었을 것이오.”

그 한마디를 남기고 이병악은 커피숍에서 사라졌다.

유태수는 잠시 동안 서서 이병악 회장이 사라진 커피숍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태양이 걸어간다.

하늘의 태양은 하나지만 대한민국 기업의 태양은 둘이다.

“훗훗!”

유태수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남은 커피를 훌쩍 마셔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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