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머슴이 잘나가니 아랫배가 찢어진다(1)
그로부터 나흘 뒤 연락이 왔다.
아시아 카드에서는 자신들의 몸값으로 현재 시총의 세 배를 요구했다.
15조가 조금 넘는다.
거래는 실패다.
하지만 이병악은 웃지는 않았지만 전혀 불쾌해한다거나 실망의 얼굴은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예상이 약간 빗나간 것에 아쉬워할 뿐이었다.
두 배 정도는 충분히 요구할 것이고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었다.
“팔지 않겠다는 것 아닙니까?”
큰아들 이망천이 기분 나쁜 표정이다.
“그렇지 않다. 그쪽에서는 내게 팔 의향이 있다. 팔지 않을 것이었다면 세 배를 요구하겠느냐. 이쪽에서 두 번 다시 찝쩍거리지 못하도록 네 배나 다섯 배를 달라고 하지.”
이병악은 탁자 위에 놓인 물컵을 들어 물을 마신다.
“세 배 요구는 매매 의사가 있다는 뜻이다. 또한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고. 며칠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구나.”
이병악의 눈이 반짝거렸다.
거래란 서로의 계산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소믈리에는 투기자본이다.
그들이 회사 경영을 할 리는 없고 차익을 남기고 파는 데 우선 목적이 있다.
팔기는 팔 텐데 언제 파느냐.
그 시점을 알면 거래는 한결 쉬워진다.
앞으로 소믈리에의 움직임을 숨죽이며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태천카드, 아니 이제 아시아 카드가 된 회사에 유상주가 찾아온 건 정말 뜻밖이었다.
“당신이 웬일이야?”
전극준은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서는 아내 유상주를 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유상주는 대표실을 쭈욱 훑어보며 매우 놀라는 얼굴이었다.
예전 태천카드 대표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차분한 인테리어와 부드러운 색감에 놀랐다.
하지만 그녀가 진짜 놀란 건 하나의 사진을 보고서였다.
워렌 버핏과 전극준이 서로 악수를 하며 찍은 사진이었다.
아시아 카드에 그의 지분이 적지 않다는 건 이미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지만 워렌 버핏과 악수하는 사진이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져야 한다.
워렌 버핏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 같은 사람은 가까이 다가갈 기회도 없는 투자의 귀재다.
“너무한 것 아닌가? 남의 회사에 다짜고짜 아내라는 이름을 들이밀며 치고 들어오는 건 굉장한 결례야.”
“결례?”
“그럼 잘한 짓이야? 나 바빠. 찾아온 용건만 말해.”
“이해가 안 돼. 저 사람 나이 많을 텐데 혹시 치매 걸린 것 아냐? 어떻게 너 같은 사람을 전문 경영인으로 앉힐 수가 있대?”
전극준이 피식 웃었다.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고.”
자신 있다는 표정이다.
- 헛헛 그놈,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전극준이 대표가 되면서 태천카드의 자본잠식이 조금은 더뎌지자 유장풍이 했던 말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 사람이 아주 허당은 아니다. 일 처리하는 손끝도 맵고 태천카드의 부진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더라.
이 또한 유장풍이 유상주에게 했던 말이었다.
만약 전극준의 태생이 어느 정도 짱짱했다면 유장풍의 성격에 비춰 볼 때 반드시 곁에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장풍이 갖고 있는 자기만의 인사 스타일이 있다.
부장급까지는 능력으로 올라가지만 이사급부터는 절대 선택받은 운명이 아닌 사람은 불가능하다.
피지배자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라인의 핏줄들을 우선시한다.
-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 아니다.
천박한 것들은 꼭 등을 돌린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르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언젠가는 배신한다는 뜻이었다.
전극준은 아버지의 사고에 정확히 저촉되는 인물이었다.
사위지만 그런 시선으로 보는데 어떻게 신뢰하고 미래를 예약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전극준은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다.
첫 단추가 제 구멍에 들어가지 못하면 모든 단추는 제 짝을 찾아 들어가지 못한다.
‘예정된 소모품.’
처음에는 사랑이면 모든 것을 헤쳐 나가고 어떤 위기도 넘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부부 동반 모임에 나가면 전극준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지렁이를 보는 것처럼 혐오스러워했고 아내들이 그러자 신랑들까지도 말을 섞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하나둘 시간이 흐르고 속이 상한데다 계획적 접근이라는 소문까지 터지면서 전극준이 싫어졌다.
급기야는 회사 경영 문제로 충돌이 생기면서 부부는 따로 살기 시작했다.
“아버지 성격 알면 조용히 살아.”
아시아 카드 대표가 됐다고 까불지 말란 뜻이다.
“푸훗!”
“왜 웃어? 지금 날 비웃는 거야?”
전극준이 웃음을 지은 얼굴로 말했다.
“네가 주혜 엄마니까 넘어간다. 내가 여자한테는 손찌검을 하지 않지만 지금은 아니야. 다른 여자였다면 죽통을 뭉개 놨을 거야.”
전주혜는 올해 중1인 두 사람 사이의 딸이다.
“아 참, 어제 서류 보냈어. 도장이나 잘 찍어줘.”
이혼 서류를 말한다.
“변호사 따위 제발 끼워 넣지 마. 이혼이 뭐 대단한 거라고 너네들은 걸핏하면 변호사를 시키던데 추접스런 짓거리 하지 말자고.”
전극준의 태도가 차갑다.
깔끔하게 찍고 갈라지자는 뜻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오규수가 얼굴을 내밀었다.
“대표님, 모두 모였습니다.”
“알았어요.”
“오 비서, 나 안 보여요?”
오규수는 태천카드 시절부터 전극준을 지킨 비서이며 대학 후배다.
유상주를 모를 리 없는데 보고서도 알은체 않고 돌아설 수 있냐는 질책이다.
“보여요. 아주 잘.”
탁!
오규수가 문을 닫고 사라졌다.
바르르르!
유상주가 온몸을 떨었다.
“야 오규수, 싸가지 없는 새끼야!”
“유상주! 어디서 소릴 지르고 그래. 나 회의 가야 하니까 그만 돌아가.”
“개자식이,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대접받고 싶으면 대접받을 짓거리를 해야지. 하 비서, 손님 모셔요.”
인터폰을 누르자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여자 비서가 들어섰다.
“가시죠. 손님!”
“손님?”
“그럼 당신이 손님이지. 하 비서에게 어떤 행패라도 부려봐. 진짜 가만 안 둬.”
“걱정 마세요. 대표님, 제가 가만 안 있어요.”
여비서 하소미가 빙긋 웃었다.
탁!
전극준은 급히 문을 열고 사라졌다.
“나가시죠. 주인도 없는 방인데.”
방 안에 홀로 서 있는 유상주에게 하소미가 웃으며 말했다.
로비 층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유상주가 내렸다.
“안녕히 가세요!”
하소미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타고 올라간다.
“아 놔!”
유상주의 안색이 시퍼렇다.
“비서가 뭐 저따위야. 기가 막혀.”
“사장님!”
기다리던 운전사 고칠장이 달려오더니 붉으락푸르락하는 유상주를 보며 물었다.
“왜 그러시죠?”
“이거 꿈 아니지? 진짜 어이없네.”
차에 탄 유상주는 여전히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핸들을 잡은 고칠장이 자꾸 룸미러를 흘깃거렸다.
유상주의 표정은 차돌처럼 딱딱해져 있었는데 잔뜩 독이 오른 모양이다.
“많이 불편하십니까?”
“고 과장은 신경 쓸 것 없어.”
“제가 도와드릴 건 없나 해서요. 운전만 하는 경호원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없어!”
없다.
정말로 없다.
누가 잘못한 것이 있어야 어떤 분풀이를 하는데 대상이 없으니 무슨 수로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있는 이 화를 가라앉힌단 말인가.
“정 그러시다면 차라리 술이라도 한잔하시죠. 때로는 끓는 속 마음을 달래는 데 술만큼 좋은 것도 없습니다.”
술이라는 말에 유상주는 번쩍했다.
즐겨 마시지는 않지만 아닌 게 아니라 우울할 때 한 잔씩 마시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사하라로 가.”
“예, 사장님!”
고칠장은 차의 속도를 높이며 빠르게 달렸다.
클럽 사하라는 아무나 출입하지 못한다.
판매되는 술들이 모두 내로라하는 해외 유명 위스키들인데 그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가깝게는 일본의 가루이자와를 비롯해 맥켈란, 모틀락, 클라이넬리쉬를 비롯해 아드벡이나 보모어 등, 한국인에게 제일 알려진 발렌타인은 저가의 술로 취급당하는 곳이 이곳 사하라였다.
VVIP.
누가 만들어 냈는지는 모른다.
VIP도 모자라 기어이 앞에 또 하나 브이(V)자를 집어넣어 더욱 차원이 다르고 존엄의 사치를 극대화한 칭호. 이 칭호를 유상주가 받았다.
한국인처럼 편 가르기를 즐겨하고 차별화 받고 싶어 하는 성향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상술이 마음에 들고 그래서 여길 찾는지도 모른다.
“사장님, 저쪽 손님이 목소리를 조금만 낮춰 달라고 부탁해 오셨습니다.”
평소에는 안쪽 VVIP 룸으로 들어가는데 오늘따라 웬일로 바(BAR)에 앉아 마시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화제는 오늘 아시아 카드에서 당하고 밟힌 모욕에 대한 것인데 입 밖으로 꺼내 놓은 내용은 사실과 전혀 달랐다.
여비서가 하도 굽신거리며 쩔쩔매는 바람에 가슴이 짠했다는 인간적 모습을 늘어놓는다.
당연히 대작을 위해 맞은 편에 자리한 사하라 주인 캐서린 채는 유상주의 인품에 크게 감동하고 사장님의 지성은 언제봐도 우아하다는 아부를 빠뜨리지 않았다. 이 와중에 웨이터가 살며시
다가와 전달한 것이다.
“누군데? 어떤 손님?”
사하라 출입자 중 유상주보다 더 무게 나가는 손님은 없다.
그건 무조건 큰소리를 내고 이쪽에서 불편함을 내비쳐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비넥타이에 단정한 차림으로 서 있던 남자 직원이 한곳을 돌아보았다.
정장을 한 세 명의 남자가 술을 마시고 있다.
조각가 이만섭 작 ‘꿈꾸는 여신’이 세워진 바로 옆 탁자다.
오랜 술장사의 눈썰미로 세 남자를 살피던 캐서린이 무시하듯 말했다.
“알았어. 신경 쓰지 말고 일해.”
종업원을 보내 놓고 두 여자는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캐서린은 누구보다도 유상주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지금 거꾸로 말을 하고 있다.
서류상으로는 부부지만 등 돌린 지 오래인 전극준을 찾아갔다가 개망신을 당한 것이 분명하다.
자신도 요즘 재계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 알고 있다.
그쪽 손님들이 주 단골이다 보니 알아야 대화가 통하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아시아 익스프레스 카드 대표가 되어 버린 전극준이 눈꼴사나웠을 것이다.
거지처럼 바둥거리며 자기를 찾아와 살려달라고 해야 하는데 제대로 로또 1등을 맞아 버렸다.
요즘 뉴스의 중심에 서 버린 그를 도저히 그냥 놔둘 수 없었을 테고, 부부라는 이름으로 찾아가 한바탕 행패를 부리고 나오려는데 오히려 역관광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애써 거짓말과 총동원한 자기 합리화로 위로를 얻으려는 것이다.
“까가가각!”
“호호호호!”
이럴 때일수록 더 큰 소리로 웃어줘야 한다.
손님 기분을 죽자 살자 맞춰 주는 재주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 사하라를 강남 제일의 사교 클럽으로 만들 수 있었다.
“사장님!”
다시 종업원이 찾아왔다.
“그렇게 떠들고 싶으면 룸으로 들어가라는군요.”
룸은 비즈니스가 이뤄지는 공간이다.
그 비즈니스가 범죄이든 사업이든, 외부의 시선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이용한다.
물론 그런 목적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지만 오늘따라 유상주가 답답하다면서 바깥에서 마시는 중이다.
“알았어. 가봐!”
종업원을 보낸 캐서린은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냥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얘기를 하며 떠들고 웃었으며 유상주의 표정은 밝아졌다.